소설리스트

137화 (13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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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나가자니.

조금 뜬금없으면서도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내가 외출하려는 진짜 이유는 산책이 아닌 ‘그 물건’들을 보관할 창고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같이 다니면, 제대로 창고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허니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땐 거절하는 게 맞지만, 감정적으로 생각하면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모처럼 어색해진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그가 손을 내밀었는데, 무 자르듯이 단칼에 안 된다고 말하는 건 그에게 상처만 주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같이 산책 가면 곤란한 모양이군.”

“……아니요, 괜찮아요.”

이성과 감정,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내가 결국 손을 든 건 감정이었다.

“같이 나가도록 해요.”

오늘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둘러보는 식으로만 알아보면 되지.

그렇게 괜찮은 곳을 몇 군데 눈여겨봤다가, 나중에 그곳들만 자세히 알아보면 되는 거였다.

* * *

외출은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페르데스와 단둘이 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사람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도 했고.

날 감시하는 눈이 적어야 마음 편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알도르 경이 있었다면 필시 같이 가겠다고 나섰겠지만, 다행히 그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원래 오늘 외출 계획이 없었던 터라 어젯밤, 그에게 저택에만 있을 거니 내일 하루 쉬고 오라고 휴가를 줬었다.

그러자 알도르 경은 검 제작 주문을 비롯한 이것저것 사 오겠다며 레오가 보고하러 올 무렵, 나갔었다.

그런데 저택 밖으로 나왔으니, 만약 알도르 경이 이 사실을 안다면 두 번 다시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휴가를 준다고 해도 반납하며 기어코 곁에 붙어 있겠지.

그럼 곤란해지니 알도르 경이 돌아오기 전에는 무조건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에 올라탔다.

페르데스도 가뿐히 말에 올라탔다.

그는 처음 레오폴드 영지에 왔을 땐 승마를 전혀 하지 못했었는데, 이젠 능숙하게 말을 탈 줄 알았다.

몸에 딱 붙는 근사한 외출복을 입고, 백마에 올라탄 그는 동화책 속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근사해 보였다.

확실히 잘난 얼굴이긴 하지.

단언컨대 그의 이복형제 중에서 페르데스가 가장 외모가 출중했다.

이복형제들뿐일까.

지금 봤던 남자들 중 페르데스가 가장 비율도 좋고 잘생겼다.

알도르 경도 잘생긴 편이지만, 내 취향은 좀 더 페르데스 쪽이었다.

그렇다고 페르데스를 좋아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떠올렸을 뿐.

내가 빤히 쳐다보자, 시선을 느낀 건지 페르데스가 의아해하며 날 돌아봤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이었다면 솔직하게 잘생겨서요, 라고 대답했겠지만, 그에게 고백을 듣고 난 뒤로 이런 칭찬을 하는 게 조금 껄끄러웠다.

괜히 내가 그의 마음을 자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걸로 보일 수도 있었고.

그런 생각들 때문에 입조심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에게 할 수 있는 말들이 예전보다 많이 제한되었다.

“…….”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숨기는 걸 눈치챘는지, 페르데스는 묘한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산책은 어디로 갈 거지?”

“수도 외곽으로 갈 생각이에요.”

수도의 물류 창고들은 전부 외곽에 있었으니까.

말을 타고 산책하기에도 외곽 지역이 좋았다.

페르데스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곤,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수도 외곽은 그쪽이 아니에요, 페르데스 님!”

* * *

수도 외곽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점심시간이 맞물려서 우리는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인근 식당으로 들어갔다.

외곽 분위기도 살펴볼 겸, 일부러 야외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문득 페르데스가 물었다.

“찾는 거라도 있어?”

“그렇게 보여요?”

“응. 외곽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있잖아. 지금도 그렇고.”

그렇긴 하지.

“게다가 오전 일찍 그 레오라는 남자가 찾아온 것도 그렇고…… 뭔가 꾸미고 있는 모양이군.”

역시 페르데스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내가 대놓고 티를 낸 것도 있지만.

전부 페르데스를 믿어서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만약 그를 믿지 않았다면, 대놓고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그를 데리고 오지 않았겠지.

“뭔가 꾸미고 있긴 하죠.”

그러니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툭, 던졌다.

“하지 마.”

“뭘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영애가 하려는 거.”

내가 하려는 거?

“제가 뭘 하려는 건지 알고 계세요?”

“내 복수를 하려는 거잖아.”

어라?

“황태자가 나한테 이상한 약을 먹였으니까, 그것에 대해 복수를 하려는 거 아니야?”

완전히 틀린 짐작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가 그곳을 선택한 건 페르데스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지만, 궁극적으론 내 복수를 위해서였으니까.

“내 말이 틀려?”

“글쎄요.”

하지만 이 역시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가 없어서, 나는 어물쩍하게 대답한 뒤, 질문으로 되돌려 주었다.

“그러는 페르데스 님도 요즘 뭔가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내가?”

“네. 집사에게 페르데스 님이 요즘 외출이 잦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고백 사건 이후, 페르데스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진 않았지만, 보호 차원에서 꾸준히 그의 동향에 대해 보고 받았다.

내 대답을 들은 페르데스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더니,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그냥. 지금까지 수도 구경은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이곳저곳 구경하러 다녔어.”

“그러신 것 같았어요.”

동향 보고에도 페르데스가 수도 이곳저곳에 돌아다녔다고 적혀 있었다.

정확히 어디를 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는 보고 받지 않았다.

그건 보호가 아니라 감시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가 무사한 것만 보고 받는 걸로 충분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직원이 막 가져온 맥주를 마셨다.

“아, 맥주는…….”

맥주는 어른만 먹는 거라고 말리려다, 그가 올해 성인이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고 그를 향해 반쯤 뻗었던 손을 다시 거뒀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이상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뭐야?”

“아니요. 아무것도.”

페르데스를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성년식에 직접 참가해 축하해 줬음에도 그가 어른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그가 작고 왜소했을 때의 모습이 머릿속에 박혀서 그런 것도 있었다.

곧이어 음식들이 나오고,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자른 샌드위치를 집어 드는 그때.

“이야, 이게 누구십니까. 4황자 전하와 레오폴드 영애 아니십니까?”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하늘을 품은 것처럼 새파란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 보였다.

얼굴을 보니 남자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니콜 테시스 공자.”

수도의 운송을 전반적으로 담당하는 테시스 백작가의 차남인 니콜 테시스였다.

사업상 그를 종종 만나긴 했지만, 이렇다 할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친분은 그의 형이자 테시스 백작가의 장남과 더 두터웠다.

그 장남이 장차 테시스 백작위와 가업을 이어받을 차기 후계자였으니까.

그렇다고 장남의 능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능력은 차남인 니콜 테시스가 더 뛰어났다.

하지만 장남에게 큰 결격 사유가 없는 이상, 장자 계승 원칙으로 그가 모든 걸 물려받게 되겠지.

새삼 느끼는 건데 참으로 불공평한 원칙이었다.

그나마 필로스 왕자와 달리 니콜 테시스는 작위나 가업을 잇는 것에 욕심이 없어 장남과 경쟁을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하하,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레오폴드 영애.”

“네. 정말 오랜만입니다, 테시스 공자.”

하여간 이렇다 할 친분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친근한 척하며 인사하는 게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니콜 테시스는 페르데스에게도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4황자 전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니콜 테시스가 페르데스를 본 적이 있다고?

그럴 리가. 

내가 알기로 최근 3년간 거래에서 니콜 테시스가 나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난 거지?

내가 기사 아카데미에 있을 때, 따로 만난 건가?

무슨 일로?

나는 조금 의아해하며 페르데스를 돌아봤다.

그러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을 한 페르데스가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 있구나.

그의 얼굴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곤란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두 분을 봬서 정말 다행입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네. 호신용으로 쓸 검을 사고 싶은데, 어떤 검을 사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이유라면 그가 무척 반가워하며 다가온 게 이해됐다.

검은 내 가문의 전문 분야였으니까.

아버지도 살아생전 주변 귀족들에게 검을 봐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었다.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요. 봐줄게요.”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테시스 백작가의 자제와 친분을 쌓아 나쁠 건 없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니콜 테시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레오폴드 영애가 아니라 4황자 전하이십니다.”

내가 아니라 페르데스에게?

“전에 듣자 하니 4황자 전하도 오랫동안 검술을 배우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검에 대해 잘 아실 테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같은 남자로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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