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0/262)

136

아델이 필로스 왕자에게 보낸 편지는 약 일주일 뒤, 그의 손에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에 큼지막하게 찍힌 아델의 인장을 본 필로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곁에서 호위하고 있던 로고스도 아델의 인장을 보고 반갑게 웃었다.

“레오폴드 영애가 보낸 겁니까?”

고개를 끄덕인 필로스는 보던 서류를 옆으로 밀어내고, 아델의 편지를 집중해서 읽었다.

[경외하는 왕자 전하께.]

첫 문장부터 거리감이 확 느껴졌다.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필로스 왕자의 눈매가 약간 서글프게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도 눈동자는 바쁘게 아델의 편지를 읽었다.

으레 대부분의 편지가 그렇듯이 서두는 안부 인사였다.

그가 보낸 생일 선물에 대한 내용은 편지의 중반부에 있었다.

[생일 선물과 함께 기다리던 선물을 받게 돼서 무척 기쁩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왕자 전하의 마음에 보답하고자 하니 부디 제 선물도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드디어 시작하는 건가.

필로스는 문득 작년 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카데미를 자퇴한 뒤, 그는 아델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며 기반을 쌓는 데 집중했다.

그중 하나가 황실의 검이자 방패가 될 황실 기사들을 뽑는 거였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올해 졸업생 명단을 받아 두고, 그중 괜찮은 학생들은 봄에 미리 면접을 봤다.

그 면접을 위해 아카데미에 방문한 필로스는 아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으니 만나자고 연락을 넣어 두었다.

그렇지만 아델이 만나 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괜히 사람들의 눈에 띄어 좋을 건 없다면서, 직접 만나는 건 되도록 피하자고 말했으니 이번에도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그러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모처럼 아델과 직접 만나는 거니 필로스는 꽃단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진짜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닮은 붉은색 장미 꽃다발을.

“이거 받으세요.”

그러나 꽃다발을 내밀 틈도 없이 아델이 곱게 접은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에는 제국 어딘가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어느 괴짜 연금술사가 사는 집입니다.”

“연금술사?”

“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곳에 사는 연금술사를 꼬드겨서 가짜 금을 만드는 비법을 알아내세요.”

대뜸 연금술사를 꼬드기라는 것도 황당한데, 그 뒤에 붙은 말은 더 황당했다.

가짜 금이라니.

필로스는 한동안 멍하니 쪽지를 바라봤었다.

길거리에 널린 돌멩이를 황금으로 만드는 건 연금술사의 꿈이자 로망이었다.

그래서 먼 옛날부터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돌멩이를 황금으로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성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가장 비슷하게 연성한 연금술사가 백 여년 전에 한 번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은 있었다.

그 뒤로 연합국을 비롯한 모든 국가가 돌멩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연구를 금지했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돌멩이를 황금으로 바꿔서 금의 가치가 떨어지면, 자신들이 가진 화폐의 가치도 떨어지니까.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금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걸 반길 리가 없었다.

만약 시도하다가 걸리면 두 번 다시 연구하지 못하게 그 연금술사의 양손을 잘랐다.

이렇게 엄한 벌을 내리는데도 꿈과 로망을 버리지 못하는 연금술사들이 암암리에 금 연성을 도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놀라우면서도 그런 연금술사가 사는 곳을 아델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자를 당장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가짜 금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오라니.

“시간은 2주 정도면 되겠죠.”

“자, 잠깐만요.”

도저히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에 필로스는 손을 내저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연금술사가 있는 위치는 어떻게 안 겁니까? 그리고 가짜 금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 오라니. 도대체 뭘 하려고…….”

“쉿.”

아델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필로스의 말허리를 잘랐다.

“궁금하신 게 많은 건 이해합니다만, 저와 한 첫 번째 약속을 잊으시면 안 되죠, 전하.”

뒤이어 나온 지적에 필로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꼬리가 축 처지자 아델이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그 방법만 알아 오시면, 제가 이 다음에 뭘 하려고 했는지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겁니다.”

“……얼른 알아 오라는 재촉으로 들리는군요.”

“어머, 들켰네요.”

눈매를 초승달처럼 접으며 웃는 아델은 품에 안고 있는 장미꽃보다 더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최대한 빨리 알아 와 주세요. 그럴수록 다음 계획을 더 빨리 당길 수 있으니까.”

그 요사스러운 매력에 홀리니 ‘왜’라는 의문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필로스는 하던 것도 제쳐 두고 연금술사를 꼬드기는데 온 심혈을 기울였고, 고작 열흘 만에 가짜 금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러자 아델은 기분 좋은 칭찬과 함께 다음 계획을 알려 주었다.

그래, 아주 엄청난 계획을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실행하려는 용기가 대단해.”

필로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걸 들은 로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아델이 가짜 금으로 뭘 하려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자칫 실수하면 그동안 쌓아 두었던 게 와르르 무너지는 건 물론, 가지고 있던 것도 다 내놓아야 할 텐데요. 저라면 절대 못 할 겁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로고스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사이 편지를 마저 읽은 필로스가 웃으며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영애와 우리의 그릇이 다르다는 거야. 영애 정도의 배짱은 되어야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거고.”

“그렇긴 하죠.”

로고스가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로스는 다 읽은 편지 끝을 촛불에 가져다 댔다.

모처럼 아델이 보내 준 편지를 태우고 싶지 않았지만,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는 만큼 증거를 없애야 했다.

화르륵, 고급 편지지에 금방 불이 옮겨붙었다.

필로스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편지가 반쯤 탔을 무렵 말했다.

“우리도 슬슬 준비하지. 영애가 계획을 성공하면, 그 다음은 우리 차례니까 미리 준비해 둬야지.”

“전하께선 레오폴드 영애가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필로스는 어느새 새카맣게 타서 재가 된 편지지를 물에 풀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계획한 것 중에 실패한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보란 듯이 성공할 거다.”

* * *

“달링,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난 달링이 보고 싶어 그동안 한숨도 못 잤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내 애인 행세를 하며 나타난 레오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온갖 아양을 떨었다.

다 큰 남자가 아이들이나 할 법한 애교를 부리니 무척 징그러웠다.

질색하며 떼어 놓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 그를 데리고 서재로 향했다.

그렇게 서재로 들어와 단둘이 되자마자 레오는 언제 딱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냐는 듯, 떨어지더니 구겨진 옷깃을 툭툭, 폈다.

“이거야 원, 연기하는 게 너무 힘드네요. 연기 수당을 따로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일이나 잘해.”

“아무렴요.”

싱글벙글 웃는 낯짝이 얄미운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으니 이상했다.

나는 붉은 벨벳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시킨 건?”

“거의 완료했습니다.”

앉으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자리를 잡은 레오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보고했다.

“아가씨는 물론 제 정체도 숨겼으니, 그쪽에선 절대 저희를 연관시키지 못할 겁니다.”

“그럼 끝난 거 아니야? 거의 완료했다는 건 무슨 의미지?”

“그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문제라고?

“그게 뭐지?”

“그 물건들을 보관할 창고가 없다는 겁니다. 알아보니까 생각보다 부피가 커서 전부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들고 가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제가 알아본 바 가장 큰 건 이 정도였습니다.”

레오가 일어서더니 어깨너비까지 팔을 벌리며 크기를 어림짐작으로 알려 주었다.

생각보다 크네.

“이런 물건이 못해도 열 개는 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개수까지 많다니.

확실히 전부 레오폴드 공작령으로 들고 가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몰래 숨겨서 가야 하니 더욱 불가능했다.

“그럼 일이 진행될 때까지 근처에 창고를 빌려서 보관하는 건?”

“그 창고 관리인이나 업주가 비밀을 유지해 준다는 보장이 있다면 그것도 괜찮죠.”

그게 문제이긴 하지.

“알았어. 그 부분은 내가 알아볼 테니, 넌 그대로 진행해 줘. 어차피 일이 진행되는 데 일주일은 걸릴 테니까, 그 안에 무조건 알아볼게.”

“믿고 진행하겠습니다.”

레오가 떠나고, 나 역시 외출 준비를 했다.

방에 틀어박혀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직접 발로 뛰며 괜찮은 보관 장소가 있는지 찾는 게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중앙 계단을 통해 홀로 내려가려는 그때.

“…….”

“…….”

하필 아래에서 올라오는 페르데스와 정면에서 마주쳤다.

페르데스가 약에 취해 내게 고백한 그 이후로 우리 사이는 어색 그 자체였다.

서로를 찾지 않는 건 물론, 지금처럼 가끔 마주쳐도 간단한 안부 인사만 묻고 쓱 지나쳐 갔다.

“좋은 오전이에요, 페르데스 님.”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인사한 뒤 지나치려고 했는데.

“외출하는 건가?”

페르데스가 인사 외에 다른 걸 물었다.

엉겁결에 멈춰 선 나는 어느덧 바로 옆에 선 페르데스를 올려다봤다.

“어디 가는 거지?”

“아, 날씨가 좋아서 기분 전환할 겸 나가려고요.”

사용인들에게도 말했던 핑계거리를 대자 페르데스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도 오랜만에 나가 볼까 했는데, 같이 나가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