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29/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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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좋아한다니.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는 당황하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페르데스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이 흔들리면서 언뜻 드러난 귓불이 잘 익은 토마토보다 붉었다.

방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페르데스는 물론이고, 나 역시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적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뜻밖에도 페르데스였다.

“나도 참. 순간 약에 취해서 헛소리가 나가고 말았네.”

“……그런가요.”

“응. 아, 물론 완전히 헛소리는 아니야. 내가 영애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그는 누가 봐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 좋아하지. 영애를 한 여자로서……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자꾸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

“오해하지 마. 이건 전부 약 때문이야. 내가 영애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

혼자 허둥지둥하며 말을 쏟아 내던 페르데스는 뭔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지, 인상을 팍 쓰고 이불을 세게 움켜쥐었다.

꽉 다문 입술 끝에 힘줄이 바짝 섰다.

그는 허공에 적이라도 있는 양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진짜 약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것 같으니까…… 쉬어야겠어.”

그러니 나가 달라는 의미였다.

나 역시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군말 없이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뿐, 멀리 가지 못하고 굳게 닫힌 그의 방문에 기대서서 페르데스의 고백을 곱씹어 생각했다.

페르데스는 헛소리라고, 약에 취해 정신이 나가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그는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고백하는 순간 봤던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그가 날 좋아한다고.

동료나, 친구나 그런 게 아닌 한 여자로서 나를…….

“하아.”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끓어올랐다.

같은 생을 여러 번 반복했던 만큼, 이성에게 고백을 받아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애절한 고백도 받아 봤고, 세상에 다시 없을 화려한 프러포즈도 받아 봤었다.

하지만 페르데스처럼 진심으로 고백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다들 속에 새카만 흑심을 하나씩은 품고 내게 달콤한 말을 던졌었는데, 페르데스는 아니었다.

순간이지만, 그는 꾸밈없는 진심을 내게 보여 주었다.

누군가 진심으로 날 좋아해 주는 건 무척 기쁜 일이었다.

좋아해야 마땅한 일이건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진심이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며 날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 내 처지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무엇보다 불필요하고 사치였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페르데스가 그의 고백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모른 척했다는 거였다.

나도 모른 척해야지.

그래야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 그러는 거야.

크게 심호흡하며 놀라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가씨?”

의원을 배웅하러 갔던 알도르 경이었다.

나는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조금 걱정스러운 낯빛을 하며 다가오는 알도르 경을 쳐다봤다.

“안색이 어두우신데…… 어디 아프신 겁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페르데스가 내게 고백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으니,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상당히 늦게 돌아왔네요. 혹시 의원을 배웅하다가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만, 제가 의원에게 이것저것 몇 가지 물어보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뭘 물어본 거죠?”

“페르데스 님에 관한 겁니다.”

페르데스.

아까 일 때문인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혹시 페르데스 님의 마비가 늦게 풀리거나 다른 이상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봤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응급 처치를 해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나는 놀란 감정을 감추려고 일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알도르 경이 페르데스 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했는데, 이렇게 그분을 생각해 주다니…….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거였네요.”

내가 약간 감동했다는 어투로 말하자 알도르 경은 부끄러운지 내 시선을 피해 약간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걱정한다기보다 제가 모시는 주군의 약혼자분이니까 그런 겁니다. 페르데스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가씨께서 힘들어하실 테니까요.”

“그런가요.”

“네. 그런 겁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긴. 

알도르 경의 귀여운 행동에 웃음이 나오면서 페르데스의 고백에 대해 잊을 수 있었다.

알도르 경이 페르데스가 있는 침실을 한 번 쳐다보곤 내게 물었다.

“페르데스 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네. 아직 몸의 마비는 덜 풀렸지만, 그래도 말씀은 잘하세요.”

그래. 너무 잘해서 탈이지.

잠시 잊었던 페르데스의 고백이 다시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말이지, 왜 그런 말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들쑤신 건지…….

“아가씨께선 괜찮으십니까?”

“저야 당연히 괜찮죠. 약을 안 먹었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손바닥의 상처를 물어본 겁니다.”

아, 이거.

나는 손바닥을 펼쳐 상처를 확인했다.

피는 멎었지만, 손톱 모양으로 상처가 나 있었다.

알도르 경이 상처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흉터가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요.”

“괜찮을 거예요.”

지난 생에서도 이런 상처가 몇십 번이나 생겼었지만, 흉터가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보다 저한테도 주의 사항을 알려 주겠어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저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요.”

“네, 아가씨.”

“그럼 서재로 가서 이야기하죠.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면 페르데스 님이 쉬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요.”

* * *

아델은 페르데스가 쉬는 데 방해될까 봐, 친히 자리까지 비켜 줬지만.

“하아, 미치겠네.”

애석하게도 페르데스는 전혀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델에게 고백했던 그 순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아델이 무척 놀라며, 혹은 난감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던 그때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미칠 것만 같았다.

“고백할 생각은 없었는데…….”

사랑이 쌍방 통행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인 걸 알기에 가슴에 묻었다.

평생, 아델의 곁을 떠나는 그 날까지 꼭꼭 묻어 두고, 절대 꺼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다.

그랬는데 저도 모르게 진심을 말하고 말았다.

진짜 약에 취했던 걸까.

아무리 약에 취했기로서니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는데 그딴 소리를 지껄이다니.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지.”

페르데스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거렸다.

마비된 탓에 몸을 뒤척거리는 것도 무척 힘겨웠다.

속에 돌덩이가 천 개는 들은 것처럼 답답했다.

미친놈처럼 소리라도 지르면 답답한 속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은데, 누군가 들을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대신 베개를 세게 내려치거나 머리를 마구 헤집고 싶었으나, 이 역시 아직 마비가 덜 풀려서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지금 페르데스가 할 수 있는 건 화장실이 급한 강아지처럼 끙끙 앓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아델이 그의 고백을 약에 취해 한 헛소리로 치부하며 넘겼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걸 다행으로 여기는 게 맞는 걸까?

“하.”

문득 든 의문에 페르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베개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새삼 이런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다.

* * *

알도르 경이 알려 준 주의 사항을 머릿속에 새겨 넣은 뒤.

나는 페르데스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우선 수도의 레오폴드 공작저를 총괄 담당하는 집사와 하녀장을 불러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저택이나 사용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나 부족한 게 없는지 꼼꼼하게 보고 받았다.

이 모든 업무는 집무실이 아닌 서재에서 이뤄졌는데, 수도의 공작저에는 내 서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집무실은 있었다.

정확히는 레오폴드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지금 나는 유일무이한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이자, 공작의 대리 역할을 하고 있으니 공작의 집무실을 써도 상관은 없었다.

그런데 쓰지 않는 건, 그곳엔 아버지와 관련된 물건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괜히 들어갔다가 그리움에 젖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일단 집무실은 봉인해 두었다.

물론 영원히 봉인해 둘 생각은 없었다.

우선 급한 일을 처리한 다음에 천천히 집무실을 정리해야지.

정리하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공작저의 지하실에 대한 단서도 찾아보고.

“그전에 이 계획부터 실행해야 할 텐데…….”

나는 눈앞에 있는 상자를 내려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황궁에 가기 전, 레오에게 맡겨두었던 내 짐이었다.

이 상자 안에는 황제를 무너뜨린다는 내 원대한 계획의 일부가 들어 있었다.

극히 일부였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게 계획의 진정한 시작이었으니까.

옛말에도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터뜨리면 좋을지 쉬이 정하지 못하고 고민했는데 오늘 일로 답이 정해졌다.

“…….”

문득 페르데스가 나 대신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자업자득이에요.”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린 것에 대한 대가이니, 그들도 억울하진 않겠지.

나는 집사에게 고급 편지지와 펜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그가 부탁한 걸 가져오자 거침없이 편지를 적었다.

수신인은 필로스 왕자.

드디어 오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극의 막을 올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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