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말을 하면서도 심장이 쿵, 떨어진 건, 케이크에 독이 들어 있는 게 맞다면 원래 그 독을 먹었어야 할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나 대신 독이 든 케이크를 먹고 저렇게 됐다고 생각하니 누군가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나 때문에.
내가 조심했더라면.
조금만 의심을 했더라면…….
“이 일은 아가씨의 탓이 아니니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자책하고 있다는 걸 안 알도르 경이 큰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해 주었다.
조금, 아주 조금은 위로가 돼서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알도르 경에게 눈짓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와 알도르 경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페르데스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 의원이 말했다.
“자세한 건 반응이나 여러 가지를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혀나 입술, 그리고 피부색이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아, 다행히 아니구나.
나는 그제야 가슴 깊이 안도하며 크게 숨을 토해 냈다.
하긴 나도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오면서 페르데스의 상태를 계속 살폈었지만, 의원과 같은 이유로 그가 독을 먹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럼 페르데스가 갑자기 쓰러진 이유가 뭐지?
내 궁금증을 읽기라도 한 듯 의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독은 아니지만, 약을 드신 건 맞습니다.”
“약?”
“네. 마비 증세가 있는 걸 봐서 그쪽과 관련된 약인 것 같은데, 말씀드렸다시피 좀 더 자세한 건 검사를 해 봐야…….”
“수 분 내로…… 의식이, 흐려진다고 하더군.”
의식을 차린 건지 페르데스가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스타카토처럼 뚝뚝 끊겼다.
“감각이 무뎌지고…… 약이라고 들었는데.”
그가 먹은 약의 성분에 대해 들었다고?
누구한테?
아니, 그것보다 이걸 알고 있다는 건 그 케이크에 이상한 약이 들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먹었다는 의미가 됐다.
내가 황당해하며 쳐다보자 페르데스는 내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의원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모두 나가 주겠어?”
* * *
아델은 나가지 않고 버티려고 했지만, 의원이 정밀한 검사를 위해서라도 비켜 주는 게 좋다고 말하니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뿐, 멀리 가지 않고 페르데스가 있는 침시 주변을 계속 서성거렸다.
그 때문인지 알도르도 떠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열리면서 의원과 조수가 나왔다.
아델이 단걸음에 다가가 물었다.
“페르데스 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약과 증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정말 그것뿐인가.
아델은 미심쩍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의원이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르데스 님이 어떤 약을 먹었는지 알아냈나?”
“네. 아나필시라고, 먹으면 일시적으로 몸과 의식을 마비시키는 약입니다. 보통 중증 환자를 치료할 때,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자 쓰입니다.”
“그래?”
의원이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사실일 터.
그러나 선뜻 믿을 수가 없는 건 황태자가 그런 약을 자신에게 먹이려고 했던 이유가 가늠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그런 용도로 쓰입니다만 종종 범죄에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유가 전혀 예상되지 않았는데.
“납치나 성폭행 같은 짓을 극악무도한 짓을 할 때 말이죠.”
“……!”
덧붙인 의원의 설명에 갑자기 확 이해된 아델이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만약 황태자가 의원이 덧붙인 것과 같은 이유로 제게 아나필시를 먹이려고 했던 거라면…….
“아가씨.”
실로 충격적인 사실에 이를 바득바득 갈던 아델은 알도르가 제 손을 감싸 쥐자 그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깨끗하게 정리된 손톱에 피가 진득하게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손바닥에는 손톱 모양으로 살갗이 파여 있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드는 줄 모르고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던 것.
“이런.”
의원도 아델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조수에게서 왕진 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소독약과 연고를 꺼내 능숙하게 상처를 치료했다.
“예쁜 손에 흉터가 남으면 어쩌시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
“황자 전하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나필시가 중독성이 있는 약이긴 하지만 한 번 먹은 걸로 중독이 되지 않을뿐더러, 지속 시간도 짧아서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지금 아델이 화가 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유도 있긴 하지만…… 그보단 황태자, 아니 황제의 시커먼 속내를 알아서 분노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황제는 첫 번째 생에서도 그랬으니까.
그 일을 실행하는 대상에 체르노서에서 황태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페르데스가 나 대신 피해를 입었지.
새삼 그 사실을 자각한 아델은 연고를 바른 손바닥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알도르에게 말했다.
“나 대신 의원을 배웅해 주겠어요, 알도르 경?”
“네, 아가씨.”
알도르와 의원이 떠나자 아델은 페르데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마비가 빨리 풀리려면 억지로라도 움직이는 게 좋다는 의원의 조언에 따라 페르데스는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
그러다 아델이 들어오는 걸 발견하고, 다급히 눈을 감고 자는 척 연기했다.
“깨어 계신 거 다 알아요.”
하지만 이미 아델에게 깨어 있는 걸 들킨 후였다.
그래도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꿋꿋하게 자는 척을 하려고 했지만.
훅-
“?!”
아델이 난데없이 귀에 입김을 부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말을 더듬는 걸 봐서 아직 마비가 안 풀렸나 보네요.”
기함하는 페르데스와 달리 아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에 페르데스가 몹시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아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고 계셨죠?”
오히려 팔짱을 끼고 페르데스를 내려다봤다.
“제가 먹으려고 했던 그 케이크에 아나필시가 들어 있는 걸 알고 드신 거죠?”
“…….”
페르데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곧 긍정이 됐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일 줄이야.
“하.”
아델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누군가 망치 같은 걸로 머리를 계속 때리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왜 드신 거예요?”
“…….”
“다 알면서 미련하게 왜 드신 건데요! 그냥 저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왜……!”
“……그 상황에서 어떻게 사실대로 말해.”
페르데스가 어눌하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황태자가 이상한 약을 탔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케이크에 들어 있는 줄은 몰랐어.”
“…….”
“그래서 말하기 더 애매했던 거야. 혹시 그렇게 말했는데, 아니라면 일이 더 복잡해지니까. 설령 맞다고 해도 우리의 발목이 묶이겠지.”
분하지만 전부 맞는 말이었다.
만약 케이크에 아나필시가 들어 있지 않았다면, 페르데스는 황태자를 모함한 죄를 물게 될 것이며.
아나필시가 들어 있는 걸 증명했다고 해도 황태자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며 발뺌을 했을 것이다.
그럼 범인을 잡을 때까지 아델과 페르데스는 황궁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페르데스의 대처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주 훌륭한 대처였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화가 났다.
페르데스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저 때문에 이상한 약을 먹고 쓰러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라렸다.
“괜찮아.”
아델이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자, 페르데스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마음 같아선 안아 주고 싶었지만, 아직 마비가 풀리지 않아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손을 꽉 잡아 주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의원에게 설명 들었겠지만, 아나필시는 독성도 없고, 지속 시간이 짧아서 금방 풀린다고 하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나마 혀는 마비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페르데스는 최선을 다해 아델을 위로했다.
그래도 아델의 우울한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죄송해요.”
오히려 페르데스의 손을 잡고, 눈물 젖은 목소리로 사과하기 시작했다.
“저 때문에…… 정말로 죄송해요, 페르데스 님.”
“사과하지 말라니까.”
“어떻게 사과를 안 해요. 저 때문에 이렇게 되신 건데…….”
어느덧 눈물이 고인 눈동자에 죄책감이 가득 서렸다.
보기 싫네.
하긴 좋아하는 여자가 죄책감에 허덕이며 우는 걸 보고 싶은 남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아델의 눈가에 대롱대롱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몹시 한탄스러웠다.
그런 자신이 한심해서 짜증이 나기도 했고.
“울지 마.”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울지 말라니까.”
그래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숨기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순간 감정 그대로 토해 낸 페르데스는 흠칫 놀라며 아델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상처받은 기색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페르데스가 짜증을 내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왜지?’
난 네가 울고 웃는 것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넌 어째서 관심이 없는 거야.
당연한 거였다.
그녀와 자신의 마음은 같지 않으니까.
자신은 그녀를 한 여자로서 좋아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계약자 혹은 동료밖에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머리로는 섭섭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섭섭하고 서운했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봐줬으면 하는 욕심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정신 차리라고 머리가 매섭게 채찍질을 했지만.
“있잖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마음은.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제멋대로 진심을 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