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황궁은 그 어떤 곳보다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설령 황제라고 할지라도 노크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면, 상당히 예의 없는 행동을 했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런 짓을 하는지 궁금해서 문 쪽을 돌아본 나는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페르데스 님……?”
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예의 없이 문을 벌컥 연 사람이 페르데스였다니.
당황스러우면서도 놀라웠다.
그건 황후와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페르데스를 보고 있었다.
페르데스의 뒤에는 안절부절못하는 궁인들이 있었고.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페르데스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날 돌아봤다.
“일찍 온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하도 안 오길래 직접 데리러 왔어.”
“아…….”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페르데스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포크에 닿았다.
그가 픽, 실소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혼자 맛있는 거 먹느라 안 오고 있었던 거야?”
뭐지.
분명 잘못한 건 페르데스인데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이 기분은.
이번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데, 페르데스가 성큼 다가왔다.
“……!”
그리고 내가 포크로 집은 케이크는 물론 내 앞접시에 있던 케이크도 홀라당 먹어 버렸다.
어찌나 빠르고 게걸스럽게 먹는지, 생크림과 빵 부스러기가 흘러나와 그의 옷과 카펫을 더럽혔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음식을 빨리 먹지 않는 게 예의였고, 귀족의 기본 소양이었다.
더구나 저렇게 흘리며 먹다니.
페르데스가 기본 소양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때도 보지 못했던 모습인지라 황당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이럴 사람이 아닌데…….
“이게 무슨 예의 없는 짓입니까, 4황자!”
이제야 정신을 차린 황후가 몹시 분노하며 소리쳤다.
“못 배워 먹은 티를 내도 정도가 있지, 이런 무례한 짓을 하다니……!”
페르데스가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닦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당연히 못 배운 티가 나겠죠. 실제로 못 배웠으니까요.”
“뭐, 뭐라고요?”
“고귀하신 황후 폐하께선 못 배워 먹은 놈과 오래 상종하고 싶지 않으실 테니, 전 약혼녀와 함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자.”
페르데스가 팔을 확, 잡아당기는 바람에 엉겁결에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건가?’
문득 걱정이 들었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이제 와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일단 잠자코 계속 그를 따라갔다.
일단 황후궁을 나가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황후궁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도르 경은 나와 페르데스가 함께 나오자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빠르게 따라붙었다.
“페르데스 님.”
잠자코 페르데스를 따라가던 나는 황후궁에서 조금 벗어났을 무렵,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
“대답 좀 해 보세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
돌연 페르데스의 몸이 중심을 잃고 크게 흔들리더니 옆으로 픽, 쓰러졌다.
“페르데스 님!”
나는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를 부축했다.
하지만 나보다 덩치가 큰 그를 혼자서 부축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뒤따라오던 알도르 경이 재빨리 붙어 줘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그와 함께 쓰러졌을 것이다.
나는 알도르 경의 도움을 받아 페르데스를 인근 나무 아래 앉혀 둔 뒤, 알도르 경에게 말했다.
“당장 황궁의를 이곳으로 불러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건…… 안 돼.”
알도르 경이 떠나려고 하자 페르데스가 만류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황궁을 나가자.”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시면서!”
“이건…… 아무튼 괜찮아!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거니까, 그냥 가면 돼!”
뒤에 아마도, 라는 단어를 생략한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인 걸까.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얼른 황궁을 나가자.”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까딱하지 못하면서 계속 괜찮다고 말하는 게 어처구니 없었지만, 그가 저토록 바라니 일단 원하는 대로 했다.
* * *
“그래, 실패했다고…….”
황제, 다이몬의 목소리가 넓은 방 안에 음침하게 울려 퍼졌다.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황태자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갑자기 페르데스가 나타나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 페르데스가 그렇게 나타나 방해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까득, 까득.
다이몬이 손에 쥐고 굴리는 호두 소리가 다소 소름 끼쳤다.
그는 뭔가 생각하는 듯 시선을 반쯤 내리깔고 호두만 굴리다가, 이내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해서 안심했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군.”
콰직-
다이몬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호두가 완전히 박살 났다.
그 소리를 들은 황태자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다이몬의 눈 밖에 벗어나면 자신 역시 저 호두처럼 박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확실히 박살 나겠지.
체르노서가 그랬던 것처럼.
문득 체르노서의 일을 떠올린 황태자는 식은땀이 차오르는 손을 꽉 마주 쥐었다.
다이몬은 쓰던 체스 말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매정한 성격이었다.
피를 나눈 형제나 자식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페르데스를 제거할까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이몬의 눈밖에 벗어나면 안 돼.
……적어도 그의 이빨이 빠질 때까진 말이지.
황태자의 질문에 다이몬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내버려 두지.”
“진심이십니까?”
다이몬은 지금까지 그를 배신한 자를 살려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즉시 죽였다.
그러니 페르데스도 바로 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버려 둔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아 되물었더니, 서늘한 한기를 품은 황금색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
“송구합니다, 폐하.”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은 황태자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의 공손한 사과에 마음이 풀린 건지, 다이몬이 한결 풀린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그 녀석 말고 다른 말이 없기도 하고, 어차피 내가 원했던 건 그 녀석의 충성심 따위가 아니니까 일단 지켜보는 거다. 괜히 떼어 냈다가 다른 녀석이 그 자리를 탐내면 큰일이기도 하고.”
“그런 큰 뜻을 알아채지 못했다니……. 전 역시 아직 멀었나 봅니다.”
누가 봐도 아부성이 짙은 말이었지만, 싫지 않은지 다이몬은 입술 끝에 잔잔한 미소를 그리며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나저나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쉽군.”
손바닥을 펼치자, 박혀 있던 호두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페르데스가 그 약을 먹었다면, 이 기회에 그 녀석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 * *
나와 페르데스는 곧바로 마차를 타고 수도의 레오폴드 공작저로 향했다.
수도의 레오폴드 공작저는 황궁에서 마차를 타고 20분 정도 떨어진 화이트 리브가에 있었다.
수도의 공작저에 오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지금 생만 따지면 약 4년 정도 됐지만, 거듭 반복한 지난 생까지 다 계산해 봤을 때, 대략 20년 정도 됐다.
오랜만에 수도의 공작저에 왔으니, 느긋하게 둘러보면서 추억에 젖을 생각이었는데.
“당장 병원에 연락해서 의원을 불러라!”
페르데스가 난데없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레오폴드 영지의 공작저에는 상주한 주치의가 있었지만, 이곳에는 없었다.
그건 이 근방에 사는 다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도의 저택은 볼일이 있을 때 가끔 들르는 장소이니, 굳이 주치의가 상주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의원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런 귀족들을 위해 수도에는 병원이라는 특수한 기관이 있었다.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들을 주로 상대하는 의료 기관이자 실력 있는 의원들이 공부하는 기관이었다.
내 가문의 주치의도 이 병원 출신이었다.
“혹시 모르니 공작령에도 연락을 넣어서, 박사한테 즉시 수도로 오라고 해.”
“네, 아가씨.”
명령을 받은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갑자기 나타나서 정신없이 명령을 내리는 게 조금 미안했지만, 그보다 페르데스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사이 페르데스의 상태는 더 나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건 물론 말도 거의 하지 못했다.
입술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의식도 없는지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했다.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에서 팔을 꼬집는 등 여러 자극을 줬지만 느끼지 못하는지 통나무처럼 가만히 있었다.
페르데스가 싫다고 해도 황궁의한테 보여 줄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를 하며 방 안을 서성거리는데, 에런 경이 의원을 데리고 왔다.
병원 출신이라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새하얀 가운을 걸친 의원은 꼼꼼하게 페르데스의 상태를 살폈다.
나는 그동안 뒤에 서서 진찰하는 걸 지켜봤다.
의원을 따라온 조수가 진료가 끝나면 알려 줄 테니, 쉬고 있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끝까지 지켜봤다.
그건 알도르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긁을 무렵, 마침내 진찰이 끝난 건지 의원이 입을 뗐다.
“혹시 이런 상태가 되시기 전에 황자 전하께서 드신 것이 있으십니까?”
이전에 페르데스가 먹은 것?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황후의 위로 선물이라며 가지고 왔던, 그리고 내가 먹으려고 했던 케이크가 떠올랐다.
설마 그 속에…….
“그 말은 페르데스 님이 저렇게 되신 게 독 때문이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