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26/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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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서의 일로 황궁 분위기 자체가 전반적으로 어두웠지만, 황후궁은 좀 더 어두웠다.

우울하고 음침한 기운이 안개처럼 황후궁을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서 와요, 레오폴드 영애.”

황후의 안색도 굉장히 어두웠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지, 눈 밑에 진한 화장으로도 가리지 못한 다크 서클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화려한 드레스나 액세서리를 하지 않아, 더욱 우울하게 보였다.

하긴 열 달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이 죽었는데, 그것도 그를 지키던 호위 기사에게 살해당했는데 상태가 멀쩡할 리가 없지.

지난 생에서 낙마한 황태자가 결국 죽었을 때도, 황후는 깊은 시름에 잠겨 곡기를 끊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들었었다.

황후의 맞은편에 앉자 시녀가 차 트레이를 끌고 와 테이블을 세팅했다.

테이블 세팅이 끝난 뒤에도 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얼른 볼일을 끝내고 황궁을 나가고 싶은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의미하게 시간만 보내니 답답했다.

페르데스가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무슨 일로 절 부르셨나요?”

황후가 언제 입을 열지 모르는데,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물었다.

그제야 황후는 무의미하게 만지작거리던 찻잔을 내려놓고 날 쳐다봤다.

슬픈 생각이라도 하는지 눈동자가 약간 젖어 있었다.

“영애가 폐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식사하면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려 줄 수 있나요?”

당연히 체르노서에 대해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 전혀 생뚱맞은 질문이 나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황제와 황후, 모두 예상하지 못한 질문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황후가 한층 더 불안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영애와 4황자의 결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나요?”

어쩐다.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네. 황제 폐하께서 2월 초에 저와 4황자 전하의 결혼식을 올리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을 두드려 본 결과,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내게 이득인 것 같아 그대로 말했다.

그러자 황후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군요.”

그녀는 그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보아하니 황제는 황후의 동의 없이 제멋대로 나와 페르데스의 결혼을 추진한 모양이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아무리 황후가 평소 체르노서를 탐탁지 않아 했다 하더라도, 친아들의 추모 기간이 끝나기 전에 황실 결혼식을 추진할 리가 없었으니까.

즉, 현재 황후는 황제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의미.

“그래서…… 결혼을 한다고 했나요?”

“그럴 리가요.”

이 부분을 이용하면 내게 큰 도움이 되겠어.

옛말에 적은 또 다른 적으로 제압하라는 말도 있었다.

“2황자 전하께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결혼식을 올리겠습니까?”

나는 속으로는 환하게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몹시 안타깝고 슬픈 척 연기하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마음 같아선 2황자 전하의 일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만……. 폐하께서 제 가문과 영지를 몹시 걱정하시니 적어도 2황자 전하의 추모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리고 거절했습니다.”

“레오폴드 영애…….”

내 말에 감동한 건지 황후가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날 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레오폴드 영애.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내 손을 꼭 붙잡으며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 제게 고맙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후 폐하.”

그런 황후의 행동이 부담스러워 그녀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며 만류했다.

그러자 왜인지 황후는 더 감동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날 바라봤다.

이것 참……. 일이 너무 술술 잘 풀려서 기분이 좋네.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수습하느라 혀를 몇 번이나 깨물어야 했다.

황후는 손수건으로 젖은 눈가를 닦고, 차를 마시는 등 흥분한 감정을 진정시킨 뒤, 내게 다시 물었다.

“듣자 하니 체르노서를 죽인 범인이 4황자를 죽이려고 시도했다가 그 자리에서 즉시 처형당했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 제가 직접 처형했습니다.”

“영애가 직접요?”

어라. 이건 모르는 건가.

앞부분은 아는데, 이건 모른다는 게 이상했다.

도미닉 경이 이 부분만 빼고 황제에게 보고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황제가 황후에게 말해 줄 때 이 부분을 쏙 빼놓고 말했거나.

아니면 황후가 황제에게 정식으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게 아닌 따로 알아본 거거나.

“체르노서가 실종된 이후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어느 쪽일지 궁금했는데, 뒤이은 황후의 부탁으로 후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제가 황후에게 뭔가 숨기고 있나 보네.

그게 뭘까.

황제가 이 사건의 진범이라는 걸 숨기려는 걸까?

“그러면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몇 시간이 걸려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해 주세요.”

당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난 전혀 안 괜찮은데.

“부탁할게요, 영애.”

한숨이 나왔지만, 황후가 황제와 싸우게 만들기 위해선 말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 * *

“망할 쌍둥이들.”

페르데스는 작게 욕설을 읊조리며 옷에 묻은 나뭇잎들을 떼어 냈다.

지독스럽게 따라붙는 쌍둥이를 따돌리느라 정상적인 길이 아닌 수풀 등을 헤치고 다녔더니 온몸이 나뭇잎투성이였다.

페르데스가 쌍둥이들을 상대하지 않고 피해 다니는 건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닌, 상대하기 귀찮고 짜증 났기 때문이다.

괜히 부딪쳤다가 아델에게 피해가 갈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그래서 페르데스는 쌍둥이들을 피해 계속 도망 다녔다.

예전부터 그를 괴롭히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이복형제들의 눈을 피하고자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숨겨진 길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예전보다 덩치가 커져서 숨겨진 길로 다녀도 사람들의 눈에 잘 띈다는 게 문제였다.

예전에는 수풀에 가려진 개구멍으로 미꾸라지처럼 쏙쏙, 빠져나갔는데,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 보니 쌍둥이나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게 더 힘들었다.

갈 수 있는 길을 이용해서 최대한 피해 다니다 보니 봄의 궁에서 한참 떨어지게 됐다.

여긴 어디지.

페르데스는 나뭇잎을 떼어 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달빛을 녹여 놓은 것처럼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궁이 보였다.

황후궁이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어느새 이곳까지 오게 됐다.

황후궁은 황제궁 다음으로 경비가 삼엄한 곳이었다.

그런데 괜히 주변을 알짱거리는 걸, 그것도 정상적인 길이 아닌 숨어 다니는 걸 들켰다간 쌍둥이를 상대하는 것보다 일이 더 피곤해질 수 있었다.

그러니 더 가까이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는 그때.

“……효과는 확실하겠지?”

나뭇잎을 스치며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의 목소리였다.

페르데스는 곧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황태자를 발견했다.

황태자가 묻자 상대가 주변을 쓱,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약을 먹으면 수 분 내로 의식이 흐려지고 감각이 무뎌지는 등 효과가 나타날 겁니다.”

약이라고?

게다가 상대가 말하는 걸 들어 봤을 때, 평범한 약은 아닌 것 같았다.

마비약이나 아니면 비슷한 효과를 내는 독약인 것 같은데…….

‘또 이상한 꿍꿍이를 꾸미는 모양이네.’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이 있듯이 황태자는 나이를 먹어도 달라진 게 없었다.

페르데스는 저런 사람이 장차 제국을 이끌 차기 황제라는 걸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혀를 끌끌 찼다.

황태자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

그래.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돌아가려고 했는데, 황태자가 황후궁으로 향하는 걸 보고 그럴 수가 없었다.

현재 황후궁에는 아델이 있었다.

‘설마 그 약을 아델에게 쓰려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면서 소름이 끼쳤다.

부디 그건 아니길 바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델 말고 없었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황태자가 친모인 황후에게 독약을 먹일 리는 없을 테니까.

“젠장……!”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페르데스는 거칠게 머리를 헤집으며 황후궁으로 향했다.

* * *

“……입니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길어지긴 했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내 이야기를 듣는 동안 황후의 표정은 점점 무너져 내렸고, 이야기가 끝났을 땐 끝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지 마세요, 폐하.”

당신이 울지 않아야 내가 떠날 수 있잖아.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아니면 내 앞에서 우는 게 부끄러웠는지 황후는 금방 눈물을 그쳤다.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며 마음을 쓸어내리기 무섭게, 다른 문제가 생겼다.

“레오폴드 영애도 함께 있었군요.”

바로 황태자가 나타났다는 거였다.

모자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물러나려고 했는데.

“어마마마를 위해 모처럼 맛있는 차와 케이크를 가져왔으니, 영애도 조금 먹고 가는 게 어떻습니까?”

망할 황태자가 날 붙잡았다.

황후도 황태자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먹고 가라고 붙잡으니, 어쩔 수 없이 반쯤 뗐던 엉덩이를 다시 붙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체르노서와 친형제 아니랄까 봐, 도움이 안 되는 건 똑같다니까.

속으로 혀를 차며 떠넘겨 받은 케이크 조각을 내려다봤다.

진한 초콜릿 향을 풍기는 케이크는 보기만 해도 달아 보였다.

먹고 싶은 생각은 티끌 만큼도 없었지만, 먹기 전엔 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먹으려는 그때.

“……안 됩니다, 전하!”

“황자 전하!”

문득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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