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25/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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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봄의 궁에 머물렀다.

쓰던 침실도 그대로 배정받았지만,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대며 같은 침실을 쓰는 걸로 바꿨다.

황궁에는 황제의 수족들이 득실거리는데, 페르데스를 혼자 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잠자리 준비를 끝내고, 이만 자려는데 황제의 시종이 찾아왔다.

“내일 아침, 황제 폐하께서 두 분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싶으시다며 뜻을 전하셨습니다.”

내일 황제를 만나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황제와 얼굴을 마주 보고 밥을 먹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왔다.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막느라 입술 끝에 힘을 세게 줘야 했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주세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을뿐더러, 어차피 마주해야 한다면 후딱 해치우는 편이 낫기에 받아들였다.

* * *

아침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들이 들이닥쳤다.

황제와의 아침 식사를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황제를 보러 갈 땐, 격식을 차린답시고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2황자인 체르노서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추모의 뜻으로 당분간 화려한 치장은 피하는 게 예의였다.

덕분에 코르셋으로 허리를 바짝 조이지 않는 건 물론 쓸데없이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액세서리를 하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황족이 죽으면 3개월 동안 결혼식 같은 요란한 행사는 자제하는 편이니, 자연스럽게 나와 페르데스의 결혼도 미뤄질 것이다.

“다음 달 초에 두 사람의 결혼식을 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당연히 미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제가 저딴 소리를 하니 황당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친아들이 죽었는데,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하면서.

한편으로는 황제니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황제가 바로 체르노서를 죽인 장본인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불편했던 아침 식사 자리가 더욱 불편해졌다.

“…….”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물을 마시며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페르데스 역시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에게 말했다.

“송구하오나 부황 폐하. 형님께서 불미스러운 사고로 신의 곁에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결혼식을 올리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짐 역시 그 부분을 무척 고민했었다.”

황제가 서글픈 얼굴로 대답했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을 체르노서를 생각하면 충분히 추모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체르노서를 죽인 장본인이 저딴 소리를 하니 몹시 웃겼다.

“하나 그러자니 레오폴드 공작의 자리가 3년째 비어 있는 게 마음에 걸리더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제 겨우 3년인가.

회귀하면서 같은 생을 반복해서 그런지, 조금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레오폴드 공작은 단순한 공작이 아닌 제국의 검이자 기둥이다. 나 역시 살아생전 레오폴드 공작에게 의지를 참 많이 했었지.”

황제가 아버지에게 의지를 많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부른 건 사실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특히 공작가의 가신들과 공작령의 영지민들은 하루라도 빨리 공작이 정해지길 바랄 거다. 우두머리가 없는 무리는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와해하기 마련이니까.”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가신들이 공작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가주가 있는 편이 더 안정적일 텐데?”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규율과 관습을 무시하고 무작정 밀고 나가는 건 오히려 사람들의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레오폴드 영애와 같은 생각입니다.”

페르데스가 내 의견에 동의하자 황제가 눈을 치켜뜨며 그를 노려봤다.

“안 그래도 초반에 백치병 때문에 가신들과 영지민들에게 불신을 받다가, 이제 겨우 신뢰를 얻었습니다.”

살벌한 시선에도 페르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의견을 말했다.

“그런데 관습과 규율을 무시하고 결혼식을 강행하면 기껏 쌓은 신뢰가 무너질 겁니다. 사람들은 절 공작의 자리에 눈이 먼 자라고 손가락질하겠지요.”

“…….”

“그렇게 공작이 되면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오래 걸릴 겁니다. 그러니 추모 기간이 끝날 때까진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페르데스가 이야기하는 내내 황제는 인상만 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구구절절 맞는 말인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지.

“황자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최대한 잡음이 없는 편이 좋기도 하고 지금은 날이 추워 결혼식을 올리기 적합하지 않으니, 5월에 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습니다.”

나와 페르데스가 합심해서 지금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계속 말하니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너희들의 뜻이 정 그렇다고 하니 결혼식은 5월 첫 번째 주말에 하도록 하겠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내게 직접 체르노서의 일을 듣고 싶다고 하더니, 황제는 아침 식사가 거의 끝날 때까지 체르노서의 ‘체’도 꺼내지 않았다.

역시 날 수도로 부르기 위해 핑계를 댄 거구나.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식사가 마무리되기 직전, 말을 꺼냈다.

“거처를 수도의 레오폴드 공작저로 옮길까 합니다.”

내 말에 막 찻잔을 잡은 황제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눈썹을 약간 치켜들며 날 쳐다봤다.

“왜 갑자기 거처를 옮긴다는 거지? 황궁에서 지내는 게 불편한 건가?”

당연히 불편하지.

어젯밤에도 황제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줄곧 수도의 저택을 비워 뒀으니, 관리할 겸 오랜만에 가 보려는 겁니다.”

“…….”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슬쩍 말을 덧붙이자 황제의 눈빛이 변했다.

아까보다 더 예리해진 눈동자가 탐색하듯 날 주시했다.

내가 알아보고 싶다는 게 공작저의 지하실과 관련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거겠지.

내가 말을 덧붙인 것도 일부러 황제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거처를 옮겨도 될까요, 폐하?”

그래야 황제가 우리를 보내 줄 테니까.

“그래.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볼일이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거봐. 순순히 보내 주잖아.

황제의 허락을 받았으니, 더는 황궁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아침 식사를 끝내고 봄의 궁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짐을 챙겼다.

“일단 5월까지 시간을 벌긴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먼저 짐을 다 챙긴 페르데스가 내게 물었다.

“하는 걸 보아하니 5월에는 무조건 결혼식을 올려야 할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때도 못 할 테니까요.”

“응? 그걸 영애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미래를 경험해 봤으니 알지.

4월 마지막 주, 주말.

황후의 가문에서 봄맞이 사냥 대회를 개최하는데, 황태자는 1등 할 거라고 설치다가 낙마해서 사경을 헤맬 정도로 크게 다친다.

황태자를 살리기 위해 황궁의를 비롯한 신관 등 여러 사람들이 달라붙었지만, 황태자는 끝내 눈을 뜨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아버지가 기껏 목숨을 바쳐 구해 줬건만, 어처구니없이 날려 버린 것이다.

‘잠깐만.’

체르노서가 죽는 바람에 4월에 사냥 대회가 개최되지 않을 테니, 이번 생에는 황태자가 안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5월이 되면 황제는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정신이 없을 테니까.

우리의 결혼식을 신경 쓸 겨를은 없을 것이다.

황제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우왕좌왕할 걸 생각하니 몹시 웃겼다.

“뭐야. 무슨 재미있는 생각을 하길래 웃는 건데?”

이런. 나도 모르게 웃었던 모양이네.

“그냥 갑자기 웃긴 생각이 떠올라서요.”

지금 생각하는 계획을 페르데스에게 말해 줄 수 없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저희가 결혼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 말에 페르데스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눈동자의 색이 어둑하게 가라앉는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여전히 표정이 안 좋은데.

혹시 황제가 한 말 중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 걸까?

페르데스는 내가 놓친 걸 잘 잡아내는 편이니, 그럴 가능성이 커서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찾아온 사람은 황후궁의 시녀였다.

“황후 폐하께서 레오폴드 영애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체르노서의 일 때문에 날 찾는 모양이네.

이 역시 예상했던 터라 나는 놀라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가죠.”

* * *

아델이 황후를 만나러 떠나자, 페르데스는 소파에 앉아 마른세수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아델이 한 말이 메아리처럼 요동쳤다.

절대 자신과 결혼할 일이 없을 거라는 그 말이.

예전에도 아델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 거슬렸는데.

그녀를 향한 제 마음을 깨닫고 나니 거슬리다 못해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그러나 아델을 원망하거나, 탓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서로의 이득을 위해 시작된 관계였으니까.

제게 화를 낼 자격 같은 건 없었다.

탓하려면 바보같이 그녀에게 마음을 줘 버린 걸 탓해야지.

“진짜 멍청하네, 나.”

새삼 제 모습이 너무 우습고, 어리석게 느껴져 페르데스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벌써 아델이 돌아왔을 리는 없고.

그럼 누가 예의 없이 문을 막 여는 거지?

페르데스는 인상을 팍 쓰며 문 쪽을 노려봤다.

“뭐야. 진짜 멀쩡해 보이네.”

“그러게. 백치병이 고쳐졌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봐.”

그러자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서 있는 쌍둥이 남매, 3황녀와 5황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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