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방금 결혼이라고 하셨습니까, 폐하?”
황후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묻자 황제, 다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며칠 뒤에 레오폴드 영애와 4황자가 수도에 올 테니, 즉시 결혼할 수 있게 황후가 준비해 주시오.”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미 대부분 준비해 뒀으니, 그대로 진행만 시키면 될 거요.”
레이스와 보석이 치렁치렁하게 달린 소매 안에 숨긴 황후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건 진주 가루를 곱게 빻아 뿌린 속눈썹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에게 미리 초대장을 보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신년이라 대부분 수도에 올라와 있으니…….”
“……정말 너무하십니다.”
다이몬이 그의 말을 자르는 사람을 몹시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분한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짜증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다이몬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쏘아붙였다.
“체르노서가 죽었습니다. 수명을 다해서 죽은 것도 아닌, 그를 지키라고 보낸 호위 기사에게 살해당해서 죽었단 말입니다.”
비록 체르노서가 쥐뿔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주제에 사고뭉치였다고 해도, 황후의 입장에선 열 달 품고 낳은 소중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살해당했으니, 황후의 마음은 천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소식을 듣고 한동안은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런데 다이몬이 체르노서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전에, 아델과 페르데스의 결혼을 논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폐하께선 체르노서의 부친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2황자의 부친이기도 하지만 4황자의 부친이기도 하지. 그래서 아들의 결혼식을 챙기려는 거고.”
“폐하!”
“황후가 하기 싫다면, 1황비에게 준비하라고 하겠소.”
“……!”
결혼식 같은 황실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건 황후의 권한이었다.
그런데 그 권한을 1황비에게 주면서까지 결혼식을 진행하겠다고 하니, 황후는 몹시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 핏발이 잔뜩 선 눈을 부릅 떴다.
다이몬은 그런 황후가 귀찮다는 듯 혀를 한 번 내차고는 휙,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혼자 남은 황후는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꼭 밝혀낼 거야.”
까득, 손톱이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반드시, 반드시 그 시커먼 속내를 밝혀내고 말겠어.”
* * *
내일 바로 수도에 올라가려면 일정을 조정해야 하니, 하네스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문제점을 발견했다.
바로 페르데스와 약속했던 온천 여행을 갈 수 없다는 거였다.
황제에게 보고하자마자 다시 영지로 돌아온다면 가능했지만, 황제가 바로 보내 줄지가 의문이었다.
달리 수도에서 할 일이 있기도 했고.
계획한 걸 전부 실행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수도에 머물러야 했다.
어떡한다.
나는 펜촉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페르데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음에 가자고 말해야지.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깨지 않겠다고 거듭 맹세했던 만큼, 이런 말을 하는 게 껄끄러웠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내 계획은 며칠 미룰 수 있어도 황제가 부르는데 안 갈 수는 없으니, 저녁 식사 시간에 페르데스에게 슬쩍 온천에 못 갈 것 같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
그러자 페르데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죄송해요.”
나 때문에 약속을 깬 건 아니지만, 미안해서 거듭 사과했다.
“황제가 이렇게 갑자기 부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어쩔 수 없지.”
페르데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미디엄 레어로 구운 스테이크를 썰었다.
“황제가 부르는데 가야지. 그래. 가야지.”
……스테이크를 써는 게 아니라 난도질을 하고 있네.
그만큼 페르데스가 실망했다는 의미이니, 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 꼭 같이 가요.”
“언제?”
“음, 글쎄요. 다음 제 생일 때 같이 갈까요?”
아무 이유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했는데, 스테이크를 난도질하던 페르데스의 손이 멈췄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다음 영애 생일?”
“내년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길죠? 그럼 수도에 다녀와서 갈까요?”
잠깐만. 그때 시간이 되려나?
그건 그들이 ‘그걸’ 얼마나 빨리 알아채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터라, 지금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약속했다가, 또 안 된다고 하면 페르데스가 크게 실망할 테니 다른 날을 말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먼저 말했다.
“아니. 다음 영애 생일 때 가도록 하지.”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페르데스가 난도질한 고기를 포크로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온천 여행은 영애의 생일 선물이니까, 생일 때 가야 가장 의미가 있잖아. 그러니 다음 생일 때 가자.”
그렇긴 하나, 이번 생일 때 받은 선물이었다.
그걸 다음 생일 때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싶었지만, 약속을 깬 게 미안해서 군소리를 보태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 * *
다음 날.
예정했던 대로 황실 기사들과 함께 수도로 향했다.
다행히 기차 시간이 맞아서 마티나 백작에게 신세 지지 않고 바로 기차에 올라탔다.
나와 페르데스는 일등석에 탔고, 호위로 따라온 알도르 경과 에런 경, 그리고 황실 기사들은 이등석에 탔다.
두 사람도 일등석을 잡아 주고 싶었으나, 급하게 표를 구하다 보니 자리가 없었다.
지금 앉은 자리도 웃돈을 주고 어렵게 잡은 거였다.
“그런데 영애.”
맞은편에 앉은 페르데스가 턱 끝으로 의자 옆에 둔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야? 짐 가방 아니야?”
“맞아요.”
“그런데 왜 짐칸에 안 넣고, 그것만 따로 가지고 탔어?”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어서, 혹시 잃어버리면 큰일이니 그런 거예요.”
“중요한 물건? 뭐가 들어 있는데?”
아직은 말해 줄 수 없는 터라 나는 말없이 웃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영애는…….”
“비밀이 많다고요?”
정답이었는지 페르데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옅게 웃으며 장난을 약간 섞어서 말했다.
“자고로 여자는 적당히 비밀을 가지고 있어야 신비롭고 매력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인데.”
“네? 무슨 말씀하셨어요?”
“아니, 아무것도.”
휙, 고개를 돌리면서 언뜻 드러난 페르데스의 귓불은 왜인지 약간 붉었다.
기차 여행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모처럼의 평화와 여유를 즐기다 보니 어느덧 수도에 도착했다.
내가 줄곧 내 시선이 닿는 곳에 두었던 가방을 챙겨 들자 페르데스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내가 들어 줄게.”
“괜찮아요. 별로 안 무거우니 제가 들게요.”
뒤이어 온 알도르 경과 에런 경도 페르데스와 마찬가지로 짐을 들어 주려고 했으나, 전부 거절했다.
무겁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손이 약간 떨릴 정도로 무거웠지만, 괜히 넘겨줬다가 그들이 안에 든 물건을 알아채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끝까지 내가 들었다.
그렇게 기차에서 내리는데, 누군가 우렁차게 소리치며 날 끌어안았다.
“어서 와요, 달링!”
바로 레오였다.
그의 등장에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내며 인상을 팍 썼고, 에런 경은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오가 날 달링이라고 부르며 끌어안아서가 아닌,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란 거였다.
레오가 이번 계획을 도와주면 한결 수월할 것 같아 그에게 도와 달라고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나보다 먼저 수도에 도착했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나보다 먼저 온 거야?”
의아해서 묻자 레오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야 달링이 보고 싶어서 빨리 왔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정말인데. 정말로 달링이 보고 싶어서 빨리 온 거예요.”
하여간 성격 한번 능청스럽다니까.
이러면 밉상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레오의 능력이자 매력이기도 했다.
“마침 잘 왔어. 이것 좀 들어 줘.”
다른 사람들에겐 가방의 내용물을 들키면 안 되지만, 레오는 괜찮았다.
내 계획을 도와줄 사람이었으니까.
“……!”
내가 레오에게 가방을 넘겨주자,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이 몹시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왜들 그래요?”
의아해서 묻자 페르데스가 꽉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저 남자한테는 가방을 넘겨주는 건데?”
“그야 달링은 날 신뢰하니까.”
대답을 한 건 레오였다.
그는 씩,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믿고 맡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
명백하게 놀리는 말에 페르데스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알도르 경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면 레오는 이 상황이 몹시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었다.
“사람 그만 놀리고.”
나는 그런 그의 등을 가볍게 때리며 만류했다.
그리고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을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에게 설명을 하려는데, 도미닉 경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설명은 나중에 해야겠네.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도미닉 경을 쳐다봤다.
그는 내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말했다.
“역 앞에 황궁으로 가는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늦었는데, 바로 황제 폐하를 뵙는 건가요?”
“아닙니다. 황제 폐하를 뵙는 건 내일 아침입니다. 지금은 황궁에 가셔서 푹 쉬시면 됩니다.”
이번에도 황궁에서 머무는 건가.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새삼스럽지 않았다.
동시에 레오가 와 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가시지요, 레오폴드 영애.”
“잠깐만요.”
나는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레오의 귓가에 그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시킨 대로 하면 돼.”
레오는 알아들었다는 듯 내게 윙크를 날리더니, 그를 뚫어지도록 쳐다보고 있는 두 남자를 향해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이래서 사랑받는 남자는 피곤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