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페르데스의 말대로 상자 안에 든 건 마법 오르골이었다.
“이게 마법 오르골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본 거예요?”
뚜껑을 열면 안쪽에 붉은 퓌라가 박혀 있는 게 보이니 마법 오르골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겉보기엔 보통 오르골과 똑같이 생겼다.
전문가의 눈에는 다를 수 있겠지만, 내 눈에는 똑같이 보였다.
그런데 단번에 마법 오르골인 걸 알아본 게 의아해서 물어보자, 페르데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마나가 조금 느껴졌어.”
……전에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 것 같은데?
조금 의아했지만, 페르데스가 더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훽 돌리기도 했고.
꼬치꼬치 캐물을 만큼 궁금한 것도 아닌지라,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달빛을 부숴 놓은 것처럼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오르골의 외관과 아름다운 선율도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내 마음에 든 건 오르골 안쪽에 박혀 있는 금색 장식이었다.
‘A’.
필로스 왕자와 나만 아는 암호로, 내가 부탁한 게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드디어 다음 계획을 실행할 때가 왔구나.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오르골을 쓰다듬었다.
그 무엇보다 기쁘고 마음에 드는 생일 선물이었다.
* * *
쿵쾅거리며 방으로 돌아온 페르데스의 얼굴에는 불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잭은 페르데스가 훌훌 벗어 던진 옷을 주워 들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델 아가씨와 무슨 일이 있으셨나 보군.’
처음에는 크게 싸운 건가 싶어 안절부절못했었는데, 이젠 익숙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페르데스가 왜 저렇게 불만인지 알 것 같았다.
어느 왕국의 왕자가 아델의 생일 선물로 커다란 조각상과 더불어 마법 오르골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조각상도 걸렸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마법 오르골이었다.
보통 마법 오르골은 연인 사이나, 이에 준하는 관계에 있는 남녀 간에 주는 선물이었다.
단순히 친구 사이에 줄 만한 선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델이 그 마법 오르골을 보고 무척 좋아하며 환하게 웃었다고 하니, 페르데스의 반응이 저런 것도 당연했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페르데스 님. 페르데스 님은 아가씨의 생일 선물로 더 좋은 걸 드리면 되잖아요.”
“하.”
잭은 나름 페르데스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특히 생일 선물로 더 좋은 걸 드리면 된다는 말이 그의 속을 박박 긁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역시 아델의 생일 선물로 마법 오르골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마법 오르골은 아니었다.
오르골 디자인은 물론이고 마법진까지 그가 직접 그린 특별한 마법 오르골이었다.
그래도 웬 놈팡이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페르데스는 베개가 마치 필로스 왕자라도 되는 양 세게 내려치며 분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처음이어야 했는데……!”
두 번째로 선물을 줘도 아델은 좋아하겠지만, 그래도 처음이었으면 했다.
모름지기 처음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이었으니까.
생일 선물뿐만 아니라 아델의 모든 일에 처음이 되고 싶었다.
필로스 왕자가 노골적으로 아델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델이 그가 보낸 선물을 받고 환하게 웃는 것도 싫었고.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어.”
“페르데스 님은 정말 질투가 많으시네요.”
잭이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하자 페르데스는 훽,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내가 질투가 많다고?”
“네. 지금도 아가씨에게 선물을 보낸 왕자 전하를 질투하고 계시잖아요.”
“이건 질투가 아니라……!”
페르데스는 아니라고 부정하려 했으나, 질투 말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잭이 그 모습을 보며 히죽 웃었다.
“역시 질투 맞죠?”
“……시끄러우니까 나가.”
페르데스는 우선 거슬리는 잭을 쫓아낸 뒤,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마땅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도 질투 말고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정말로 내가 필로스 왕자를 질투하는 건가?
그렇다는 건 내가 아델 레오폴드 영애를 사…….
“……말도 안 돼.”
페르데스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을 애써 부정하며, 침실을 나왔다.
짜증이 나서 잠시 정신이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서 밖으로 나온 건데, 하필 하네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델이 보였다.
지금 아델을 만나면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감정이 더 요동칠 테니, 돌아가자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페르데스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아델을 바라봤다.
아델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것도, 눈에 띄는 액세서리를 하거나 화사한 화장을 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예뻤다.
원래 미인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페르데스 님?”
하네스와 이야기를 나누다, 페르데스의 시선을 느낀 건지 아델이 그를 돌아봤다.
곧 눈이 마주친 그녀의 싱그러운 눈동자가 예쁘게 접혔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갔다.
눈부셔.
너무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미소가.
그 위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은 좀 나아지셨어요?”
자신을 걱정해 주는 다정한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그 바람에 가슴 깊숙이 묻어 두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어서 꼭꼭 숨겨 두고 애써 외면했던 감정이 선명하게 깨어났다.
“……응.”
계속 부정했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진 것 같아.”
아델 레오폴드를 한 여자로서 사랑한다는 사실을.
* * *
알도르 경이 어셔와의 결투에서 멋지게 승리를 거두며, 그를 혼쭐내 주면서 기사단의 자존심을 세웠으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나 역시 그에게 벌을 주는 게 맞기도 했고.
어셔가 단순한 햇병아리 황실 기사가 아닌 아나토메 친위대원이라는 게 확실해졌으니, 그를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내 결정을 들은 도미닉 경은 무척 난감해하며 날 설득하려고 했으나, 나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감히 내 가문과 기사단을 모욕한 어셔가 괘씸하기도 하고.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불순한 자를 내 영지에 계속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알겠습니다. 영애의 뜻대로 하죠.”
어셔의 죄가 확실하다 보니, 도미닉 경은 어쩔 수 없이 내 결정을 따랐다.
그렇게 어셔는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쫓겨나고, 황실 기사단은 예정보다 사흘 정도 공작령에 더 머물기로 했다.
2황자, 체르노서의 시신을 찾는 등 그의 실종에 관해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조사해도 내가 말해 준 것 말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텐데 다들 헛수고를 하네.
이쯤 되니 페르데스의 말대로 그 호위 기사를 죽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체르노서가 공작저의 지하실에 들어간 뒤, 실종됐다는 걸 말했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지면 나 역시 책임을 피할 수가 없었다.
관리 소홀이라든가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붙이며 날 귀찮게 할 수도 있었다.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공작저의 지하실을 조사해 보겠다며 설칠 수도 있었고.
황실 기사뿐만 아니라 나 역시 체르노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정확히는 체르노서가 왜 공작저의 지하실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까지 갈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노력한 거였다.
아버지의 일기장이나, 그 외에 다른 것도 알아보려고 했으나 시간이 부족했다.
한 번 지하실에 들어가면, 시간이 뒤틀려 잠깐 있어도 바깥 세계는 몇 시간씩 흘러 버리니 진득하게 조사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할 일이 많으니,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천천히 알아봐야겠어.
“이곳에 가면 한 남자가 상자를 줄 거예요.”
그리 생각하며 알도르 경에게 장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 상자를 받아서 내게 가져다주면 돼요. 절대 열어 보지는 말고요.”
“네, 아가씨.”
알도르 경이 나가자마자, 나는 곧바로 상단과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를 불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레오폴드 영애.”
그런데 부르지 않은 도미닉 경이 날 찾아왔다.
그 직후, 내가 부른 관리들이 도착하자 나는 그들에게 잠깐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내일 레오폴드 공작령을 떠나니, 그것 때문에 온 건가?
혹시 더 머물겠다는 건 아니겠지?
“황제 폐하께서 영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거네.
“주세요.”
황제의 편지는 항상 우선순위였기에, 바로 확인했다.
고급스러운 편지지에는 장황하게 적혀 있었지만, 요점은 하나였다.
나한테 체르노서의 일을 직접 보고 받고 싶으니, 수도로 올라오라는 것.
더불어 오랜만에 아들도 보고 싶으니, 페르데스도 같이 오라고 적혀 있었다.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오라고 하지, 뭣 하러 황실 기사들을 보낸 거지.
게다가 죽이려고 했던 아들을 보고 싶다며 찾는 게 웃겼다.
어처구니가 없어 편지를 빤히 바라보자, 도미닉 경이 다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이미 두 차례, 황제 폐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만,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특히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편지를 내려놓았다.
도미닉 경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도에 가실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 부르셨는데, 당연히 가야죠.”
“그렇죠. 당연한 일이죠.”
도미닉 경은 그제야 안심했는지, 크게 안도의 숨을 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가기 싫다고 행패라도 부릴 줄 알았나 보네.
가기 싫은 건 맞았지만, 그건 수도에 가기 싫다기보다 황제의 부름에 응하기 싫은 거였다.
그리고 어차피 다음 계획을 실행하려면 수도에 가야 했기에 나는 흔쾌히 황제의 초대에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