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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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라며 쳐다보자, 나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왜…….”

“왜긴 왜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페르데스가 혀를 차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손바닥에 피 나잖아.”

“아.”

그제야 나는 내 손바닥에 피가 나는 걸 발견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도 모르고,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저 기사 자식이 가문을 욕해서 화가 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자학은 하지 마.”

“자학한 거 아닌데…….”

“그럼 이건 뭔데?”

페르데스가 손바닥에 난 상처를 정확하게 가리키며 묻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흐리게 웃었다.

“다른 손도 보여 줘.”

“괜찮아요.”

“보여 줘.”

페르데스가 너무 강경하게 말하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손도 보여 주었다.

“뭐야. 여긴 상태가 더 심각하잖아.”

“괜찮…….”

“아무리 봐도 안 괜찮아 보이니까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마.”

입 안까지 차오른 말이 다시 쏙 들어갔다.

알도르 경과 어셔의 경기를 집중해서 봐야 하는데, 페르데스가 피를 닦는답시고 자꾸 내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니 신경 쓰여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주치의한테 가라고 하고 싶지만, 결투가 보고 싶을 테니 끝나면 꼭 주치의에게 가도록 해.”

“……잔소리하는 게 엄마 같아요.”

“뭐라고 했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진심에 아차 싶었는데, 다행히 듣지 못했는지 페르데스가 되물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닌데.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정말로…….”

“끝!”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심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결투가 끝났다니.

결과는? 누가 이겼지?

나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돌려 결투장을 쳐다봤다.

“…….”

“하아, 하아.”

알도르 경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 앞에 주저앉은 어셔는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알도르 경은 목검을 꼭 쥐고 있었지만, 어셔의 손에는 목검이 보이지 않았다.

즉, 어셔는 시합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의미.

“알도르 경이 이겼네.”

“……네.”

어셔가 두 번째 생에서 알도르 경의 목숨을 앗아 간 범인이라는 걸 깨달은 뒤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당연히 부단장님이 이기셔야지.”

“맞아. 맞아.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고.”

“저런 싸가지 없는 애송이는 좀 더 혼내 줘야 하는데, 경기가 너무 빨리 끝나서 오히려 아쉬워,”

반면 레오폴드 기사들은 알도르 경이 이긴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시시하네.”

페르데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오래 버텼네.”

“그러게. 난 5분도 채 안 돼서 끝날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신경전은 잘해 줬지만, 역시 실력 차이가 크게 나는군.”

황실 기사들도 어셔가 진 게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보통 결투가 끝나면 수고했다는 의미로 승자가 패자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게 예의였다.

“…….”

그런데 알도르 경은 어셔에게 악수를 청하지 않고, 곧바로 결투장을 나섰다.

레오폴드 기사들은 그럴 만하다고 알도르 경의 행동을 이해했지만, 황실 기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사면서 예의를 모른다며 대놓고 수군거렸다.

“이놈들이…….”

“그만.”

이에 발끈한 레오폴드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황궁 기사들에게 덤벼들 것처럼 굴자, 알도르 경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나서지 말라는 경고를 날린 뒤, 내게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추한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아가씨.”

“내 가문과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 싸운 건데, 뭐가 추한 모습이라는 거죠? 게다가 멋지게 승리까지 쟁취했으면서.”

기사가 눈치껏 수건을 내밀자, 나는 그걸 받아 직접 알도르 경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수고했어요, 알도르 경.”

“……감사합니다.”

“그래도 괜한 분란은 만들지 마세요.”

칭찬과 별개로 충고할 건 해야지.

“그런 일이 있으면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나한테 와서 말해요.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요.”

다른 기사단이었다면 좋을 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겠지만, 상대가 황실 기사단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괜히 트러블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황실에 책잡힐 수도 있으니, 되도록 부딪치지 않는 게 좋았다.

뭐, 이번 일은 명백하게 황실 기사인 어셔의 잘못이니, 황실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황제가 다른 꿍꿍이를 부리겠지.

나는 곁눈질로 도미닉 경을 비롯한 황실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잔소리를 듣고 있는 어셔를 쳐다봤다.

그가 무슨 꿍꿍이로 내 기사들을 도발한 건지 모르니 불안했다.

단순히 실력 확인을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아가씨,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도르 경이 말을 걸자, 다시 그를 쳐다봤다.

“말해요.”

“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는 의미였다.

그럼 나중에 따로 집무실로 오겠냐고 물어보려는데, 알도르 경이 상체를 숙이며 내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

그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확 가까워진 거리에 나는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저 황실 기사는 아나토메 친위대원이 맞습니다.”

그것도 잠시, 뜨거운 숨결과 나온 말에 나는 다른 의미로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알도르 경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지?

불과 몇 시간 전, 내게 보고하러 왔을 때만 해도 어셔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던 그인지라 더욱 의아했다.

만약 그 뒤에 조사해서 알아낸 거라면, 그 소식을 바로 나한테 전해 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말한다는 건 설마…… 나처럼 어셔의 검술을 보고 알아본 건가?

그 말인즉, 어셔와 검을 부딪쳤던 두 번째 생을 기억한다는 의미.

“알도르 경, 혹시…….”

“축하 파티합시다!”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확실하게 물어보려는데 난데없이 기사가 끼어들면서 말허리가 뚝, 끊겼다.

나는 황당해하며 끼어든 기사를 바라봤다.

내가 쳐다보는 걸 느끼지 못했는지, 기사는 환하게 웃으며 알도르 경을 바라봤다.

“이렇게 기쁜 날에는 간단하게라도 축하 파티를 해야지요, 부단장님!”

“맞습니다! 재수 없는 놈의 콧대를 아주 납작하게 눌러 준 기념 파티를 해야 합니다!”

사실이긴 한데, 이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는 건가.

또 싸우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나는 황실 기사 쪽을 쳐다봤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미 떠나고 자리에 없었다.

“파티해요, 파티!”

“시끄럽다. 축하 파티 핑계로 맥주를 마시려는 네놈들의 속을 모를 것 같으냐.”

“에이, 아시면 한 번쯤은 그냥 넘어가 주시죠.”

“옳소!”

“시끄럽다고 했을 텐데?”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타이밍이 아닌 것 같네.

“손바닥 치료받으러 가자.”

페르데스까지 어서 가자고 재촉하니, 다음을 기약하며 일단 물러났다.

* * *

생각해 보면 알도르 경은 공작저 후문 쪽의 숨겨진 비밀 길도 알고 있었다.

그 외에 한 번씩 반응이 이상했던 것도 그렇고, 어셔를 바로 알아본 것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알도르 경이 두 번째 생을 기억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럼 첫 번째 생과 세 번째 생도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두 번째 생만 기억하는 건가?

몹시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다음 날 바로, 알도르 경을 찾아가 물었다.

“혹시 이전 생을 기억하세요, 알도르 경?”

라고 대놓고 물어보자, 알도르 경은 약간 당혹스럽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이전 생을 기억한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아가씨?”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혹시 후자인가 싶어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알도르 경은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 내가 착각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가씨, 생신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긴가민가하던 와중, 뜻밖의 생일 선물이 도착했다.

필로스 왕자가 보낸 생일 선물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내 생일을 챙겨 주었다.

그러니 내 생일 선물을 보낸 건 새삼스럽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게 뭐야.”

필로스 왕자가 보낸 선물이 동상이라는 거였다.

그것도 아카데미 시절, 교복을 입고 있던 내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보냈다.

그것만 해도 황당한데, 더 당황스러운 건 동상을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거였다.

그뿐인가. 눈동자나 액세서리 장식, 단추 같은 곳에는 보석을 박아 넣었다.

황제도 받아 본 적 없을 것 같은 화려하고 비싼 선물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핑 돌았다.

되도록 눈에 띄는 짓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건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황금 조각상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

“난 신전에서 딱 한 번 봤어.”

사용인들은 신기해하면서도 약간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와 필로스 왕자가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단순한 친구 사이에 이렇게 비싼 조각상을 생일 선물로 줄 리는 없으니 당연했다.

“뭐야, 이게.”

소문을 듣고 밖으로 나온 페르데스도 몹시 황당한 눈으로 황금 조각상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곧 내게 꽂혔다.

“아카데미에서 친하게 지냈던 왕자 전하가 제 생일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보낸 선물입니다.”

나는 페르데스가 괜한 오해를 할까 봐 바로 설명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더 미심쩍다는 듯 날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그 왕자랑 단순히 친한 사이 맞아?”

“맞아요.”

단순히 친한 사이인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페르데스와 사용인들이 오해하는 이상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니 괜한 오해하지 마세요.”

“글쎄.”

페르데스가 다시 조각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오해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선물인데.”

그건 그렇지. 할 말이 없어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각상을 가지고 온 심부름꾼을 쳐다봤다.

아카데미에서도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필로스 왕자의 시종이었다.

선물은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 테니 다시 가져가라고 말하려는데 시종이 웬 상자를 내밀었다.

“이 역시 왕자 전하께서 영애에게 보내는 생일 축하 선물입니다.”

“……또 선물이 있단 말입니까.”

“네. 어서 보시지요.”

무려 왕자가 보낸 선물인데 보지도 않고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어 일단 상자를 열었다.

그런 내 옆으로 다가온 페르데스는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보고 인상을 팍 썼다.

“……마법 오르골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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