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해가 지고 달그림자가 걸린 밤하늘은 어두컴컴했지만, 기사 훈련장은 대낮처럼 밝았다.
알도르 경과 황실 기사의 결투를 위해 마법 조명을 켜 뒀기 때문이다.
“갑자기 웬 결투야?”
“그게 그 개자식이 대놓고…… 헉, 아가씨?”
“뭐, 아가씨라고? 어디…… 허억, 진짜 아가씨다.”
“페르데스 님도 오셨어.”
선을 그어서 임시로 만든 원형 경기장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떠들고 있던 공작가의 기사들은 나와 페르데스가 등장하자 깜짝 놀라며 우리를 쳐다봤다.
그건 황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이끄는 대장인 도미닉 경이 내 쪽으로 다가와 가슴에 손을 얹고 가볍게 묵례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레오폴드 영애.”
“알도르 경과 황실 기사가 결투를 벌인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죠?”
“저도 자세한 경위는 모릅니다만, 듣자 하니 알도르 경이 대뜸 어셔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어셔라면 그 햇병아리 황실 기사잖아.
그런데 알도르 경이 그한테 결투 신청을 했다고?
도대체 왜?
“대뜸이 아닙니다.”
뒤에 있던 공작가의 기사가 약간 발끈하며 말했다.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좀 더 상세하게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그 어셔라는 황실 기사가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시비라고?”
“네. 공작가의 기사 수준을 알 만하다던가, 단장이 없는 기사단은 오합지졸이라며, 곧 와해할 거라며 비웃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저도요!”
“부단장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셔서 그 황실 기사에게 결투 신청을 한 겁니다!”
“……그렇다는데,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죠, 도미닉 경?”
내가 목소리를 깔며 묻자, 도미닉 경이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레오폴드 공작가는 유서 깊은 기사 가문으로, 레오폴드 기사단은 공작가의 자랑이자 명예였다.
그런데 일개 황궁 기사 따위가 레오폴드 기사단을 모욕하다니.
이건 엄연히 레오폴드 공작가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알도르 경이 어셔 경에게 결투 신청을 한 것과 별개로, 그 기사에게 벌을 내려도 되겠지요?”
“그, 그건 좀…….”
“설마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인가요?”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왜죠? 혹시 도미닉 경을 포함해서 황실 기사단 전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아, 아닙니다!”
도미닉 경이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격하게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물론이고, 황실 기사 모두가 진심으로 레오폴드 기사단을 훌륭한 기사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는 아니죠. 어셔 경처럼 대놓고 제 가문의 기사단을 모욕하는 기사가 있으니까요.”
“그, 그건 그렇죠.”
당황했는지, 도미닉 경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다른 황실 기사들도 많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보아하니 이들은 이번 일과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어셔가 단독적으로 벌인 짓이라는 건데…… 무슨 생각이지?
뒷담화가 아닌 대놓고 비난을 했다는 건, 내 가문의 기사들을 도발할 의도였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도발해서 그가 얻는 게 뭘까?
결투? 그럼 결투로 얻는 건 뭔데?
냉철하고 이성적인 알도르 경이 먼저 어셔에게 결투 신청을 한 것도 조금 의아했다.
물론 속한 기사단을 대놓고 비난했으니, 보통이라면 결투 신청을 하는 게 맞지만 알도르 경은 그 보통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지난 생에서 레오폴드 기사단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자들이 종종 있었는데, 알도르 경은 단 한 번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아, 딱 한 번 있었구나.
그때 그가 나선 이유는 분명…….
휘이이익-
문득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그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어느덧 원형 경기장 안에 들어가 목검을 들고 마주 보고 서 있는 알도르 경과 어셔가 보였다.
내 옆에 있던 페르데스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다행히 진검승부는 아니네.”
다행이라는 말과 달리 아쉬운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그런데 영애, 저대로 내버려 둬도 돼?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자존심을 건 결투는 함부로 말리는 게 아닐뿐더러, 목검 승부면 크게 다치지는 않을 테니 내버려 두기로 했다.
기껏해야 뼈가 부러지는 정도겠지.
단지 조금 걱정되는 건 알도르 경이 결투에서 지는 거였다.
명색의 부단장인 그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햇병아리 기사에게 진다면, 레오폴드 기사단은 정말로 오합지졸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두고 씹으며, 레오폴드 기사단을 비웃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물론 알도르 경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이니, 햇병아리 기사에게 절대 질 리가 없었다.
……그래, 상대가 진짜 햇병아리 기사라면 그렇지.
나는 어셔를 유심히 바라봤다.
목검을 쥔 자세는 약간 불안정했으며,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보면 햇병아리 기사가 맞는 것 같은데, 과연 진실은 어떨까. 몹시 궁금했다.
‘그래도 알도르 경이 이기겠지.’
과거, 아나토메 친위대에게 알도르 경이 패배했던 건, 비겁하게 기습을 하거나 단체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정정당당한 승부에서 알도르 경이 질 리가 없었다.
심판은 공정하게 황실 기사와 레오폴드 기사, 두 사람이 같이 보기로 했다.
두 기사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공정하게 심판을 보기로 맹세한 뒤, 알도르 경과 어셔에게 말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한쪽이 항복을 외치거나 결투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그 즉시 다른 쪽의 승리가 됩니다.”
“장외로 나가는 경우도 실격 처리가 되니, 주의해 주십시오.”
아주 기본적인 규칙이었다.
알도르 경과 어셔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심판들은 결투장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결투 시작을 외쳤다.
“…….”
“…….”
그러나 알도르 경은 물론이고 어셔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가만히 서서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검술이나 이런 쪽에 무지한 사람이 보면 쓸데없이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이건 고도의 심리전이자 탐색전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반격당하는 등 공격이 실패하면 타격이 크니, 상대가 틈을 보이길 기다렸다가, 그 부분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갈 생각인 것이다.
알도르 경은 당연히 빈틈을 보이지 않았고, 그건 어셔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벽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햇병아리 기사 맞아?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저 모습만 보면 실전 경험이 상당히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어셔를 본 레오폴드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당연히 어셔가 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반쯤 포기하고 있던 황실 기사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특히 도미닉 경이 가장 좋아했다.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심리전을 할 땐,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상당히 소모돼서 장기전으로 갈수록 두 가지 모두 단련된 사람이 유리했다.
그리고 알도르 경은 심리전에 강하다고 기사들 사이에서 평가가 자자했다.
그러니 장기전으로 가기 전에 어셔가 먼저 선제공격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알도르 경이 먼저 어셔를 공격했다.
결투가 시작된 지 고작 10분째 됐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어셔가 틈을 보였다면, 알도르 경이 먼저 공격한 게 이해됐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어셔는 여전히 빈틈이 없었고, 그건 알도르 경이 돌발 선제공격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타아악-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어셔가 침착하게 알도르 경의 공격을 막아 내자 레오폴드 기사단 쪽에선 침음이. 황실 기사단 쪽에선 환호성이 나왔다.
“방금 알도르 경의 공격, 조금 이상하지 않아?”
페르데스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며 두 사람, 정확히는 알도르 경을 쳐다봤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도르 경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해 보였다.
두 사람의 공방전은 계속됐다.
대부분 알도르 경이 공격하고, 어셔는 방어하다가 한 번씩 찔러 넣었다.
그 공격은 겉으로 보기엔 상당히 허술해 보였지만, 아니었다.
급소를 정확하게 노리는 맹공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 기사가 구사할 만한 기술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허술한 것처럼 위장해서 상대를 방심시킨 뒤, 급소를 정확하게 치고 들어가는 저 공격 기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
[끝이다.]
문득 낯선 듯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쳐 지나가면서, 눈앞에 어떤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어두컴컴한 숲속.
적을 피해 도망치다가 결국 지쳐 쓰러진 여자와 그런 여자를 지키기 위해 다친 몸으로 검을 든 남자.
그리고 두 남녀를 둘러싼 검은 복면을 입은 남자들.
내 두 번째 생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숲에서 나와 알도르 경은 황제가 보낸 아나토메 친위대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결국 죽었다.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기사라고 하더니, 별것 없군.]
그때, 알도르 경을 비웃으며 그의 목숨을 앗아 간 남자가 바로…… 어셔구나.
지금까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어셔의 검술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검술은 기사에게 있어 또 다른 얼굴이자 명함이었으니까.
확실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지옥 같은 기억들이 오버랩되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면서, 재수 없는 어셔의 표정과 목소리가 선명하게 각인됐다.
“……애?”
당장이라도 어셔를 붙잡아 내 앞에 꿇어 앉히고, 그때 나와 알도르 경이 당했던 것 이상의 복수를 해 주고 싶었다.
“영애!”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와중, 페르데스가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