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0/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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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한 대로 황실 기사단이 보는 앞에서 그 남자를 죽였다.

아무 이유 없이 막 죽였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황자인 페르데스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죽인 거니, 황실 기사단은 물론 황제도 트집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걸로 당장 눈앞의 문제는 해결했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저 산들을 다 넘으려니 무척 막막했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끝내 황제에게 물려 죽게 될 테니까.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하고자 나는 페르데스와 함께 머리를 싸매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체르노서의 죽음에 대해 조사한답시고 공작령에 남은 황실 기사단들도 눈엣가시였다.

내가 체르노서를 죽인 게 아니니 그 부분에 대해선 떳떳했으나, 나만 떳떳하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이상하게 얽혀 괜한 누명을 쓸 수도 있었다.

특히 체르노서가 공작저의 지하 감옥에 들어가서 실종된 게 밝혀진다면, 일이 복잡해질 테니 나는 그 부분을 철저하게 숨겼다.

다행히 그 사실을 아는 건 나와 페르데스, 알도르 경, 그리고 하네스 뿐이니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 한 명 더 있네.’

황제, 다이몬.

장담컨대 체르노서를 공작저의 지하실로 밀어 넣은 사람은 황제일 것이다.

그 남자를 심문해서 황제의 목적이 뭔지 알아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몹시 아쉬웠다.

‘기회는 또 올 거야.’

황제는 한번 목표한 건 반드시 손에 넣으려는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러니 필시 목표한 걸 얻고자 다시 사람을 보낼 것이다.

……같은 이유로 페르데스를 죽일 암살자도 또 보내겠지.

나는 그 암살자가 어셔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관찰력과 추리력이 좋다고 해도 반년도 채 되지 않은 햇병아리가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임무를 수행하고 나면 명예 훈장 같은 걸 받을 수 있어서 고위 귀족이 제 아들을 찔러넣었다면 모를까, 그조차도 아니니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어셔가 이 임무에 가담한 건, 다른 목적이 있다고 판단한 나는 어셔에 대해 조사했다.

그러나 죽은 그 남자와 달리 어셔는 아무리 파헤쳐도 수상한 부분이 나오지 않았다.

올해 20살이며, 작년 여름에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차석으로 졸업한 인재.

안드리아 자작가의 자랑스러운 아들.

교우 관계도 깨끗했고, 수상쩍은 과거를 가지고 있거나 사건 사고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게다가 고향에는 다가오는 봄에 결혼할 예쁜 약혼녀까지 있다고 했다.

황제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약점이 될 게 많은 사람을 암살자로 보내지는 않았을 터.

“그럼 내가 착각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놓치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뭔지 몰라 답답했다.

어셔에 대해 조사한 자료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던 중,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보던 자료들을 서랍에 넣으며 대답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하네스와 사라였다.

두 사람이 함께 날 찾아오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기도 하고.

그만큼 큰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에 나는 걱정스럽게 두 사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곧 있을 아가씨의 생신 준비 때문에 논의하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내 생일?

아, 그러고 보니 열흘 뒤가 내 생일이구나.

연말부터 새해 초까지 여러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바람에 너무 정신이 없어 그 사실을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어차피 연회는 안 여니까, 적당히 준비하도록 해.”

“예? 이번에도 연회를 열지 않으시는 건가요?”

사라가 당황하며 묻자, 나 역시 당황하며 사라를 쳐다봤다.

내 생일은 신년제가 있는 1월로, 이 시기에 귀족들은 대부분 수도에 머물며 황실 신년 연회나 다른 신년 파티에 참석했다.

즉,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열리는 내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힘들다는 의미.

물론 레오폴드 공작가와 친분을 쌓기 위해 꾸역꾸역 오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문제는 1월은 가장 눈이 많이 오는 시기였기에, 내 생일 때 기차 운행이 중단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거였다.

그런데 대대적으로 생일 축하 연회를 열면 다른 귀족들에게 부담이 될 테니, 오래전부터 연회는 열지 않았다.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모여 선물을 주고받고,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게 전부였다.

어머니는 근사한 생일 연회를 열어주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했지만, 난 오히려 환호했다.

어울리지 않는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하하호호 웃는 것보다 가족들끼리 보내는 게 열 배, 아니 백 배는 더 좋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연회 같은 건 열지 않고, 조용히 넘길 생각이었는데 사라와 하네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모처럼 기차 운행이 재개됐으니 이번에는 연회를 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가씨.”

“맞아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 아가씨.”

분명 내 생일 때, 기차 운행하는 건 흔치 않은 기회지만…….

“2황자 전하께서 살해당하시는 바람에 황실에서 열리는 신년 연회도 취소됐는데, 어떻게 내 생일 연회를 열겠어?”

“아, 그러고 보니…….”

“그건 그렇군요.”

하네스와 사라는 내 말에 수긍하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나를 생각해준다는 의미이니 나는 웃으며 그들을 다독였다.

“언제가 또 기회가 올 테니 그때 연회를 여는 걸로 하고,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자.”

* * *

“어떻게 됐나요, 집사님?”

하네스와 사라가 돌아오자 사용인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이에 사라와 하네스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델에게 생일 연회를 여는 걸 허락받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역시 안 되는 건가.”

“하긴 2황자 전하의 일이 있었으니…….”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체르노서의 일 때문에 허락받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구태여 물어본 건, 그만큼 아델의 생일 연회를 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레오폴드 공작이 세상을 뜨면서 이번 생일 때, 아델을 축하해 줄 가족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연회를 열어 떠들썩하게 보내게 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래도 마티나 백작님이나 주변 영지의 영주님들을 불러서 작은 생일 축하 연회라도 열면 안 되나요?”

“아서라. 그러다 괜히 황실의 눈총을 살 수 있을뿐더러, 아가씨도 원하시지 않으니 그건 안 돼.”

“하지만 이대로 생일을 혼자 보내시게 하는 건 좀…….”

“혼자는 아니지. 페르데스 님이 계시니까.”

“그건 그렇지만…….”

사용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쑥덕이는 가운데, 한 하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기분 전환도 할 겸, 페르데스 님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시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그거 괜찮다.”

“나쁘지 않네.”

대부분 동의하는 가운데, 부정적인 의견이 불쑥 나왔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이 시기에 여행을 가시려고 할까요?”

그 한 마디에 약간 고조됐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사용인들이 부정적인 의견에 한 표씩 던지는 가운데, 또 다른 의견이 나왔다.

“페르데스 님이 직접 아가씨를 설득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거 괜찮다.”

“좋다. 아가씨께선 페르데스 님의 이야기는 나름 잘 들으시니까…….”

갈대처럼 흔들리던 의견은 결국 아델과 페르데스를 여행 보내는 쪽으로 굳어졌다.

물론 아델을 설득하는 건 페르데스의 역할이 되었다.

페르데스를 설득하는 건 하네스의 역할이 되었고.

사용인들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임무를 맡은 하네스는 페르데스를 찾아가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페르데스는 진지하게 하네스의 이야기를 들은 뒤, 그의 의견을 말했다.

“레오폴드 영애를 생각하는 자네들의 생각과 마음은 잘 알겠지만, 거기엔 한 가지 오류가 있어.”

“무슨 오류가 있다는 말씀이신지…….”

“레오폴드 영애의 생일을 축하해 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거야.”

그게 오류라고?

이해하지 못한 하네스가 눈만 껌뻑이자, 페르데스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자네들도 있잖아.”

“……!”

“자네들도 레오폴드 공작가의 가솔이니, 레오폴드 영애의 생일을 축하해 줄 자격이 있어.”

“페르데스 님…….”

그 말에 감동한 하네스가 눈물을 약간 글썽이며 쳐다보자, 괜히 부끄러워진 페르데스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영애한테 휴가를 주기 위해 여행을 보내자는 건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니, 한번 말을 꺼내 보도록 하지.”

* * *

“……그래서 영애의 생일 때 이틀 정도 근처 온천 별장에 다녀왔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페르데스의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포크로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았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까, 머리를 식힐 겸 잠시 다녀오자는 거야.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하루거리에 있는 온천 별장이니 시간도 많이 안 걸릴 거야.”

그 외 이런저런 장점들을 늘어놓으며, 페르데스는 어떻게든 날 설득하려고 했다.

온천 여행이라.

썩 내키지는 않지만, 페르데스와 사용인들의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녀오도록 해요.”

“정말이지? 약속했다.”

페르데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나중에 아무래도 바빠서 안 될 것 같다던가, 그런 이유로 무르면 안 돼.”

“네. 절대 무르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 안심하고 얼른 식사하세요.”

페르데스를 달래며 저녁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서는데.

“아,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하인이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부단장님께서 황실 기사와 결투를 벌이신다고 합니다!” 

부단장이라면 알도르 경을 말했다.

그런데 그가 황실 기사와 결투를 한다고?

밤중에 날벼락 같은 소식에 나와 페르데스는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투가 벌어진다는 훈련장으로 다급히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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