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 말허리를 자르며 돌연 대화에 끼어든 사람은 황궁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일개 황궁 기사 따위가 내 말을 자르다니.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기사를 쳐다보자, 나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그 기사를 다그쳤다.
“이게 무슨 예의 없는 짓이냐, 어셔.”
그러자 기사가 우물쭈물하매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는 그런 기사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영애. 어셔는 황궁 기사가 된 지 이제 반년밖에 안 된 햇병아리인지라, 의욕이 넘쳐서 가끔 도가 지나친 행동을 하곤 합니다.”
햇병아리인가.
나는 다시 기사, 어셔를 쳐다봤다.
확실히 어려 보이긴 했다.
많이 쳐 줘야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인다고나 할까.
“제가 잘 교육할 테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번만 봐주십시오.”
“경이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셔 경은 대단한 실력자인가 봐요?”
“네?”
내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남자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건지…….”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나는 어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었다.
“황족 시해범을 인도하는 중요한 일에 반년도 안 된 햇병아리 기사가 왔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실력자라는 거 아닌가요?”
“아, 네. 그렇죠. 맞습니다. 어셔는 뛰어난 기사입니다.”
남자가 다소 떨떠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남자가 인도할 인원을 정한 게 아닌 모양이네.
기사단장이거나, 그에 준하는 직급을 가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하긴 그 정도 직급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리가 없지.
“그러고 보니 바로 이곳으로 오느라 경의 이름을 아직 듣지 못했네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저는 도미닉 자하로프라고 합니다.”
아, 자하로프 백작의 둘째 아들이군.
자하로프 백작가는 나름 유명한 중앙 귀족 가문인지라, 직계 혈통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 이 자의 시신은 저희가 수습할 테니, 영애와 전하께선 올라가서 쉬십시오.”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애초에 그러려고 저희가 이곳에 온 거니까요. 그러니 두 분께선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안 됩니다, 대장님.”
어셔가 또 끼어들면서, 분위기가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미닉은 몹시 언짢아하며 어셔를 노려봤다.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이……번 사건에는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셔는 그런 도미닉이 두려운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4황자 전하께선 어째서 이곳에 혼자 계셨던 겁니까? 그것도 기사들을 다 물리고 혼자서 말이죠.”
그런 어셔를 성가신 눈으로 바라보던 도미닉의 시선이 페르데스에게 꽂혔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구태여 감옥 안에 들어가신 것도, 죄인의 재갈을 풀어준 것도 이해가 안 됩니다.”
“흐음.”
“다른 목적이 있으신 게 분명합니다. 그게 뭔지 알아내야 합니다, 대장님.”
어셔의 검술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관찰력과 추리력이 좋은 건 확실했다.
귀찮게 됐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가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게 윙크를 날렸다.
처음부터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누군가 태클을 걸고 들어올 걸 예상해서, 그에 맞는 대답도 다 준비해 뒀으니까.
단지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었는데, 이상한 놈이 끼어든 것 때문에 복잡해진 게 짜증 날 뿐이었다.
그리고 저 남자는…….
“괜한 오해의 소지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이 부분은 확실하게 말씀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자 전하.”
어셔가 페르데스를 향해 공손히 고개 숙이며 부탁했다.
이에 페르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 슬픈 표정으로 죽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형님이 잠들어 있는 장소를 알고 싶었네.”
“형님이라면…… 2황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고개를 끄덕인 페르데스의 표정이 좀 더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범인은 잡았지만, 아직 형님을 찾진 못했잖아.”
진한 황금색의 눈동자가 비를 맞은 것처럼 촉촉하게 젖었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형님이 차가운 땅에 파묻혀 계실 걸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파서…….”
결국 그의 고운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페르데스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한시라도 빨리 찾고 싶은 마음에 혹시 형님이 묻혀있는 곳을 말해 줄 생각이 없는지 이 남자한테 물어봤던 거야.”
“…….”
“남자도 대답해 줄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었고. 그래서 믿고 재갈을 풀어준 건데…….”
페르데스가 말을 채 잊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어깨가 가냘프게 떨렸다.
체르노서와 페르데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페르데스가 체르노서의 시신을 찾고 싶어, 위험을 감수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건, 그만큼 페르데스의 연기가 완벽했기 때문이다.
전부 연기라는 걸 아는 나조차도 순간 진짜가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2황자 전하와 4황자 전하께선 무척 사이가 안 좋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연기가 아무리 완벽해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다.
“그런데 전하께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2황자 전하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하셨다는 건…….”
“이름이 어셔라고 했던가요?”
나는 말허리를 자르며 어셔에게 물었다.
어셔는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셔 안드리아라고 합니다. 레오폴드 영애.”
“좋은 이름이군요.”
“감사…….”
“그런데 생각하는 건 왜 그따위인지 궁금하군요.”
“……!”
내가 대놓고 비난하자 어셔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어셔 경이 말한 대로 페르데스 님과 2황자 전하께선 사이가 돈독하진 못하시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나는 그런 어셔를 노려보며 말했다.
“핏줄에게 문제가 생겨서 걱정하고 찾겠다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네요. 혹시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나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묻고자 주변을 둘러봤건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시선을 피했다.
“이런. 아무도 모르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어셔 경이 직접 대답해 줘야겠네요.”
“…….”
“자, 말해 봐요. 당신은 무슨 이유로 페르데스 님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거죠?”
친히 멍석을 깔아줬는데도 불구하고 어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지금 그가 생각하는 이유는 자칫 황족 모독죄로 몰릴 수도 있는 이유일 테니까.
“어째서 말할 기회를 줬는데도 조용한 거죠?”
“그만.”
그래서 더 듣고 싶은 마음에 몰아붙였는데, 뜻밖에도 페르데스가 날 말렸다.
“난 괜찮으니까, 그만해도 돼.”
“맞습니다.”
눈치를 보던 도미닉이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저 무례한 자식은 제가 혼쭐을 내줄 테니, 이만 화를 푸시고 올라가 보십시오, 영애.”
“……그래요.”
이대로 물러나기 아쉬웠으나 두 사람이 이렇게 만류하는데, 계속 추궁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일단 물러났다.
그렇게 페르데스와 함께 지하 감옥을 나와 저택으로 돌아오자 사용인들이 깜짝 놀라며 날 쳐다봤다.
정확히는 내 몸에 묻은 피를 보고 놀란 거였다.
“다치신 겁니까, 아가씨?
“아니. 다른 사람의 피야.”
나는 하인에게 피가 묻은 검을 넘겨준 뒤, 손과 옷에 묻은 피를 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러나 워낙 피가 많이 튀어서 수건으로 닦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씻어야겠네.”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부탁할게.”
하녀가 떠나고, 페르데스에게 할 말이 있어 그를 돌아봤다.
그 역시 나를 보고 있던 터라 시선이 바로 마주쳤다.
“조금 이따가 봐요.”
“조금 이따가 보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나온 말에 웃음이 나왔다.
페르데스도 웃겼는지 옅게 웃으며 갑자기 내 얼굴을 쓱, 만졌다.
무슨……?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피가 묻은 손끝을 보여주었다.
“피가 묻어 있어서.”
아, 얼굴까지 피가 튄 건가.
그런 줄도 모르고 놀랐던 내가 바보 같으면서도, 왜 놀랐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볼을 긁적였다.
* * *
아델이 먼저 떠나고, 페르데스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침실로 돌아왔다.
아델만큼은 아니더라도 페르데스의 몸에도 피가 조금 튀었었다.
단지 그는 어두운 계열의 옷을 입고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피가 튄 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특유의 비릿한 피 냄새는 짙게 났다.
그새 몸에 밴 건지, 옷을 벗어도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델을 만나기 전에 씻는 게 좋을 것 같아, 페르데스는 잭을 불러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했다.
“아가씨께서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돌아오셨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잭이 목욕물을 준비하며 물었다.
“응.”
이미 소문이 쫙 퍼진 데다가, 목격한 사람도 많으니 숨길 필요가 없어 페르데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잭이 무척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사실이었군요. 정말 아가씨께서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히 놀랍죠. 조금 무서운 일이기도 하고요.”
“무섭다고? 왜?”
페르데스가 의아해하며 묻자, 잭은 오히려 그런 페르데스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되물었다.
“페르데스 님은 아가씨께서 피를 뒤집어쓴 모습을 직접 보셨는데도 전혀 무섭지 않으세요?”
“응.”
무섭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멋지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