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17/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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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지만 한 기다란 유리병에는 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하필 황제가 그에게 주었던 정체 모를 약과 상태가 비슷해서 그런지, 페르데스는 약을 보자마자 인상을 팍 쓰며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이게 뭐지?”

“마시면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가 되는 마법 약이에요.”

“가사 상태? 죽은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는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의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그러니까 나보고 이걸 마시고 죽은 척 연기하라는 거네.”

“네, 맞아요.”

똑똑한 페르데스라면 바로 눈치챌 줄 알았는데, 역시나.

“한번 먹으면 일주일 정도 가사 상태에 빠진다고 하니, 장례식까지 무사히 치를 수 있어요.”

즉, 제국의 4황자, 페르데스 드 빈센트 아타나시우스는 완벽하게 죽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

“그러면 황제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죠.”

“그렇겠지. 황제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죽은 사람을 찾아서 또 죽이려곤 하지 않을 테니까.”

페르데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 찡그린 눈에서도 불만이 묻어나왔다.

왜 저러는 거지?

“혹시 깨어난 뒤의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신분을 준비해 뒀으니까요.”

페르데스의 눈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다른 신분?”

“네. 페르데스 님은 4황자의 신분과 이름을 잃는 대신 아르티나 왕국의 기사 가문인 에로티아 가문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될 겁니다.”

필로스 왕자를 밀어주면서, 얻은 대가 중 하나였다.

로고스 경에게도 이미 허락을 받아두었다.

“가문의 일원이라고 해도 먼 친척이니, 일원으로서의 직무나 책임 같은 건 없어요.

“…….” 

“그러니 자유롭게 대륙을 여행하시거나 하고 싶은 걸 하며 사시면 돼요.”

그 외에 여행에 필요한 돈을 지원한다던가,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전적으로 도와주겠다는 등 이것저것 말했지만, 페르데스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왜지?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나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갑자기 그만하자고 말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설마?

“저, 혹시 황자의 신분을 잃는 게 싫으신 건가요?”

그런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페르데스가 몹시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영애는 내가 황자의 자리에 집착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네.”

“그게 아니라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드린다는 데 안색이 안 좋으시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거예요.”

내 대답을 들은 페르데스는 말없이 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영애는 정말로 내가 떠났으면 좋겠어?”

다소 뜬금없는 질문인지라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페르데스가 그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이제 더 이상 내 도움 같은 건, 필요 없는 모양이지?”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니에요.”

“그런데 왜 날 보내려는 거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페르데스 님이 저 때문에 괜히 위험해지실까 봐…….”

“나도 말했을 텐데. 영애가 지켜주면 된다고.”

이야기가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조금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데, 페르데스가 불쑥 내 손을 잡았다.

갑자기 무슨?

나는 약간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떠나고 싶지 않아.”

페르데스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평생 떠나지 않겠다는 건 아니야. 지금은 아니, 적어도 영애가 날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떠나고 싶지 않아.”

“왜 그런…….”

“왜긴 왜야. 말했잖아. 영애가 날 필요로 하니까 떠나지 않는 거라고.”

즉, 날 도와주고 싶어서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남겠다는 의미.

그 사실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비롯한 온갖 복합적인 감정들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그에게 잡힌 손을 살짝 뒤로 뺐다.

“위험할 거예요.”

“괜찮아. 영애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이 정도는 각오했으니까.”

머리 위에서 다부진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만큼 개입했는데,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건 역시 내키지 않아.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가고 싶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한 황제가 몰락하는 꼴을 내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고.”

페르데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절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사실에 한숨이 나오기보다 기쁜 마음이 먼저 드는 건…… 앞으로도 그의 도움을 계속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모르겠어.’

알도르 경이 충성까지 하며 내 곁에 남겠다고 했을 땐, 든든하고 기쁘기보다 안타까웠다.

두 번째 생처럼 알도르 경이 황제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불안하기도 했고.

그런데 페르데스는 정반대이니 의아하면서도 그 부분이 불안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페르데스가 곁에 남아주겠다고 해서 기쁘다는 거였다.

고맙기도 했고.

“그리고.”

지금까지와 달리 약간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가 눈매를 초승달처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그래야만 영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영애를 지켜줄 수 있잖아.”

소년과 청년의 모습을 모두 가진 그의 웃음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면서도 서큐버스처럼 매혹적이었다.

심장이 뛰고,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부담스럽고 괜히 긴장돼서 시선을 피하며 괜히 목을 만지작거렸다.

“아까는 저보고 지켜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정정하지. 서로가 지키는 걸로.”

“전 저보다 약한 사람에게 보호받는 취미는 없어요.”

“내가 영애보다 검술은 못 해도, 약하지는 않을걸?”

페르데스는 그리 말하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팔에 적당히 자리 잡은 근육들이 보였다.

얼굴을 보려면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만큼 키도 많이 컸고, 어깨도 떡 벌어졌다.

전부 그동안 훈련을 열심히 받은 결과였다.

처음 봤을 땐, 수프 한 그릇도 얻어먹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삐쩍 곯은 아이였는데, 언제 이렇게 큰 걸까.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너무 뚫어지게 보는데.”

“그럼 안 볼게요.”

내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페르데스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니야! 안 보는 것보다 보는 게 열 배, 아니 백 배는 나으니까 그냥 봐.”

“…….”

“진짜야. 진짜니까 그냥 봐. 잘 볼 수 있게 허리도 숙여줄까?”

“푸흡.”

그의 장난에 맞춰 나 역시 약간 장난을 친 건데, 페르데스가 너무 진지하게 나오니 웃겼다.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페르데스의 표정은 세 단계로 변화했다.

첫 번째 단계는 어리둥절.

두 번째 단계는 황당함.

세 번째 단계는 안도감.

“뭐야, 장난친 거였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는 크게 안도의 숨을 뱉으며 쓰러지듯이 의자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다.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영애가 그대로 날 내보내려는 건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렇게 떠나기 싫으세요?”

“응. 영애랑 함께 있고 싶어.”

페르데스는 본인이 말하고 흠칫 놀라더니, 허둥지둥 말을 덧붙었다.

“내가 함께 있고 싶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러니까 영애를 도와주고 싶다는, 뭐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상한 오해 같은 건 안 했어요.”

내 대답에 페르데스가 가슴 깊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그런 의미는 어떤 의미였는데요?”

이번에도 장난기가 발동해서 슬쩍 말을 덧붙이자, 페르데스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반응을 보아하니 없던 궁금증도 생겼다.

“어떤 의미였어요?”

대답을 꼭 듣고 싶어 집요하게 물어보자, 이번엔 페르데스가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지,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있잖아.”

“더 중요하게 할 말이요?”

“그래. 내일 오는 황실 기사단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단순히 말을 돌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그런 말을 했었지.

다른 이야기로 정신이 없어 깜빡 잊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 뭐죠?”

페르데스의 표정이 한순간 진지해지면서 서로 장난치면서 가벼워졌던 분위기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뒤로 줄곧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황제한테 그 호위 기사 자식을 순순히 넘겨주면 안 될 것 같아.”

“전에는 순순히 넘겨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범인이 사라지면 황제가 괜한 트집을 잡을 수 있으니까.”

페르데스가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범인을 넘겨줘도 황제는 충분히 트집을 잡을 수 있어. 거짓 증언 같은 걸 빌미로 삼아서 말이지.”

“……!”

어째서 난 그 남자가 진실만을 말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걸까.

되레 거짓말로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거라는 걸 간과했던 걸까.

그런 내가 바보 같아 한숨이 나오면서, 페르데스가 그 부분을 짚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며 내 곁에 남아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럼 어떡하죠? 순순히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거대로 말이 나올 텐데요.”

둘 중 리스크가 적은 쪽을 선택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죽이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그 남자를 황실 기사단이 보는 앞에서 죽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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