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16/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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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페르데스는 순간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대외적으로 자신과 아델이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는 걸 깨닫고 말을 삼켰다.

잭은 자신의 곁에 오래 있으면서 눈치챈 게 있으니,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었지만, 그노시스는 아니니 말을 조심해야 했다.

그렇다고 인정하기엔 왜인지 내키지 않아, 페르데스는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마나 펜을 바라보는 전하의 표정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이었으니까요.”

그랬었나. 페르데스는 마른 뺨을 쓸어내렸다.

그노시스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거울을 보지 않는 이상 자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노시스가 마나 펜을 보며 감탄했다.

“한 번뿐인 성년식 선물이라지만 마나 펜을, 그것도 최상급 펜을 선물하다니. 레오폴드 공작가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것 같군요.”

“이 펜이 최상급인가?”

“네. 저 같은 가난한 마조사는 평생 돈을 모아도 꿈을 꿀 수 없을 만큼 굉장히 비싸고 좋은 마나 펜입니다.”

마나 펜이 비싸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노시스가 이렇게 감탄할 정도로 좋은 물건일 줄은 몰랐다.

그럼 도대체 이 마나 펜의 가격은 얼마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가격을 아는 순간 절대 이 마나 펜을 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마나 펜이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마음의 무게였다.

아무리 평생의 단 한 번뿐인 성년식 선물이었다고 해도 이렇게 비싸고 좋은 물건을 선물 받았으니, 그녀의 생일 때도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해 주는 게 맞았다.

‘문제는 그럴 돈이 없다는 거지.’

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페르데스는 매달 황실에서 보내 주는 품위 유지비를 이용해서 작은 사업을 벌였고.

지난 2년간, 그 사업은 꾸준히 성장해서 그의 자산을 두둑하게 채워 주었다.

그러나 레오폴드 공작가의 재력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였다.

아델의 개인 자산과도 감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어떤 생일 선물을 주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이런 사실까지 알게 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페르데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자, 그노시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페르데스는 고개를 저으며, 마나 펜을 다시 보관함에 넣었다.

“왜 마나 펜을 다시 보관함에 넣으시는 겁니까? 그걸로 마법진을 그리면 효력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텐데요?”

“비싼 물건인데, 단순히 테스트용으로 쓰는 건 조금 아까워서.”

“아, 하긴. 그건 그렇죠.”

그노시스가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무 묵혀 두면 마나 펜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지니, 나중에 꼭 사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야지.”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다고, 페르데스가 눈빛으로 말하자 그노시스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추천하는 첫 개시는 약혼녀의 생신 선물입니다.”

“……영애의 생신 선물?”

“네. 1서클 정도의 간단한 마법진은 그 마나 펜으로 그려도 발동될 테니 아가씨만을 위한 특별한 마법 도구를 만들어서 선물 드리면 의미가 참 깊을 것 같군요.”

그노시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페르데스가 계속 고개를 끄덕인 건, 그 역시 특별한 마법 도구를 만들어 아델에게 선물해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단지 자신이 받은 선물에 비해 너무 초라한 것 같아 고민됐다.

어떤 마법 도구를 만들어 줘야 아델이 좋아할지도 모르겠고.

“혹시 아직 선물을 정하지 못했다면, 이 늙은이가 감히 추천을 드려도 될까요?”

페르데스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그노시스는 속으로 웃었다.

평소 페르데스는 표정 관리를 잘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힘들었지만, 아델의 이야기를 할 때는 달랐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표정이 훤히 읽혔다.

그만큼 페르데스가 아델을 좋아한다는 의미.

손자 같은 어린 제자의 풋풋한 연애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고나 할까.

“노래를 부르는 마법 종달새나 마법 알람 시계는 어떻습니까? 현재 수도에서 귀족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물건입니다.”

페르데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도대체 왜 그런 게 인기가 있는 거지?”

“그야 사랑하는 연인의 목소리를 녹음해 둔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불러 주는 달콤한 노래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는 건 뭇 연인들의 로망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페르데스는 이해가 안 됐지만, 그노시스가 그렇다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법 종달새나 마법 알람 시계가 인기가 있다는 건, 그 역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였다.

그러니 그노시스가 그걸 추천해 준 건 이해됐지만, 문제는 아델에게 줄 수 없는 선물이라는 거였다.

그녀와 자신은 진짜 연인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계약 관계였으니까…….

“…….”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가슴에 새겼을 뿐인데, 쓴 약초라도 씹은 것처럼 입 안이 썼다.

“전하?”

“……영애의 생일 선물은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 중요한 거니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을 억지로 삼킨 페르데스는 쓰게 웃으며 보통 펜을 집어 들었다.

“테스트나 계속하지.”

* * *

페르데스에게 여기서 그만하자고 말한 뒤로, 그와 나는 이렇다 할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쳐도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정확히는 나만 피한 거였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정도로 나는 페르데스를 최대한 피해 다녔다.

그러나 피치 못하게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입니다.”

주간 회의가 바로 그 경우였다.

내가 돌아왔으니 페르데스는 더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지난 2년 넘게 영지를 다스린 사람은 바로 그였기에 당분간은 계속 참석하기로 했다.

그러는 편이 관리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고.

“내성은 폭설의 피해가 거의 없습니다만, 외성은…….”

그가 신경이 쓰여서 도저히 회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필 오늘 알도르 경이 부탁한 물건을 가져다줘서 더욱이 그에게 눈길이 갔다.

오늘만큼은 참석하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야. 어떻게 그래.

“……아가씨?”

그럼 그가 더 섭섭해할…….

“영애.”

“!”

서류를 잡은 손 위로 차갑고 커다란 손이 올라오자 나는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반면 페르데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회의에 집중해야지.”

“아, 죄송해요.”

나는 페르데스가 잡고 있는 손을 황급히 빼며, 발언권을 가진 관리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했었죠?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말해 줘요.”

“아닙니다. 지금…….”

회의에 집중하자, 아델 레오폴드.

사적인 일로 업무를 그르치면 안 되지.

나는 자꾸만 옆으로 굴러가는 눈동자를 애써 정면에 고정하며 회의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노력한 건 효과가 있었고, 덕분에 무사히 회의를 끝낼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이만 회의실을 나가려는데, 페르데스가 내 팔을 잡았다.

“잠깐만.”

나는 아까보다 더 놀라며 페르데스를 돌아봤다.

“할 말이 있어.”

“나중에…….”

“내일 오는 황실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야.”

급한 게 아니라면 나중에 말하자고 하려 했는데, 급한 일이었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데스는 누가 들어오지 못하게 회의실 문을 잠근 뒤,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가까이라고 해 봤자, 회의할 때 앉아 있었던 딱, 그 거리였다.

“황제한테 체르노서에 대해서 전부 보고한 거, 들었지?”

“네. 잭에게 들었어요.”

“혹시 다른 말은 안 했어?”

다른 말?

“안 했나 보네. 하긴 잭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럴 만하지.”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남자 때문이지?”

“네?”

내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또 다른 질문이 돌아오자 나 역시 반문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약간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남자, 아니, 황제가 날 죽이려고 해서 여기서 그만하자고 말한 거지?”

“……!”

페르데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건,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부정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놀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정곡이었나 보네.”

“……어떻게 그걸 안 거죠?”

이제 와서 부정해 봤자 통하지 않을 테니, 대신 궁금한 걸 물었다.

“잭이 황제한테 호위 기사가 붙잡혔다고 말하니까, 그 자식이 이런 말을 했어.”

페르데스가 입술 끝을 올렸다.

“그럼 4황자도 멀쩡하겠군, 이라고.”

“아……!”

황제가 페르데스를 노린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이었다.

그랬는데, 페르데스의 이야기를 듣고 짐작이 아닌 확신으로 바뀌었다.

황제는 정말로 페르데스를 죽이려고 했구나.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그것 때문에 날 내보내려고 했던 거 아닌가?”

“……맞아요.”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으니 나는 순순히 다 털어놓았다.

“그래서 페르데스 님을 보내려고 한 거예요. 제 옆에 있다간 페르데스 님도 잘못될 테니까요.”

“그 말은 나 말고 영애의 곁에 있다가 잘못된 사람이 있다는 거네.”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그리고 어째서 내가 잘못될 거라고 확신하는 거지? 영애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켜 주면 되는 거잖아.”

“이게 지켜 드리는 거예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황제가 날 죽일 생각이라면, 영애의 곁을 떠나도 위험한 건 똑같은 거 아니야? 오히려 더 위험해질 것 같은데.”

“그냥 떠난다면 그렇겠죠.”

“무슨 의미지?”

황실 기사들이 다녀가면 그때 말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이왕 이야기가 나온 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주머니에서 알도르 경에게 부탁한 물건을 꺼내 페르데스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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