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15/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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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르 경이 무려 나흘 동안 그 남자를 심문했지만,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에 알도르 경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 숙여 사과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애초에 그 남자가 쉽게 입을 열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아나토메 친위대는 검술 실력이 뛰어난 건 물론 입도 무거웠으니까.

지난 생에서 아나토메 친위대원들을 몇몇 붙잡아 심문해 봤지만, 입을 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의 입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는 자백제도 그들에겐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알도르 경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아쉽기는 하네.

다른 건 몰라도 체르노서가 공작저의 지하실에 들어간 이유와 어떻게 그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지 알아내고 싶었는데.

“황실 기사들이 공작령에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계속 심문해 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괜히 그랬다가 그 남자가 죽기라도 하면 더 골치 아파지니 그냥 둬요.”

특히 황제 측에서 내 책임을 묻거나, 어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런 게 아니냐며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할 수도 있으니 무조건 살아 있어야 했다.

알도르 경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그는 표정을 약간 굳히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상처를 치료해 주고, 죽지 않을 만큼 식사를 주도록 해요.”

“네, 아가씨.”

“그리고 전에 제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죠?”

“그거라면…….”

알도르 경의 보고를 들으며 집무실로 가고 있는데, 반대편 복도에서 페르데스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를 발견한 나는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덩달아 멈춰 선 알도르 경도 페르데스를 발견하고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마찬가지로 멈춰 선 페르데스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 와중에도 페르데스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나 역시 웃으며 인사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에게 그만하자고 말한 이후,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 게 껄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호흡이 저절로 멈추고, 몸이 망부석처럼 굳었다.

약간 긴장이 되면서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

페르데스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후우. 나는 그제야 바짝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을 풀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알도르 경이 의아해하며 내게 물었다.

“페르데스 님과 싸우셨습니까?”

“그렇게 보여요?”

알도르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게 싸우셨습니까?”

“싸운 건 아니에요. 제가 일방적으로 페르데스 님을 화나게 만든 거죠.”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만하자고 말했으니, 화가 날 만했다.

페르데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돼서 마음이 무겁고, 그가 몹시 신경이 쓰였다.

페르데스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알도르 경이 말했다.

“좋은 분입니다.”

다소 뜬금없는 말에 그를 돌아보자, 알도르 경이 조금 머쓱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건가요?”

“딱히 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방금 페르데스 님의 칭찬을 했잖아요.”

“대부분 사람들이 평가하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럼 알도르 경은 페르데스 님이 좋은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건가요?”

그건 아닌지 알도르 경이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긴.

나는 옅게 웃으며 다시 페르데스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봤다.

“페르데스 님이 좋은 분인 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욱 그가 신경이 쓰였고, 그가 위험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만약 황제가 보낸 암살자 손에 그가 죽기라도 한다면 나는…….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알도르 경은 내 상태가 이상하니 걱정돼서 말을 건 것일 테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얼굴을 보니, 그가 결국 암살자 손에 죽는 그때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가씨……!”

온몸에 중상을 입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내 걱정을 하던 그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알도르 경이 크게 당황하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걸로…….”

“알도르 경.”

나는 그 손을 꼭 붙잡고, 얼굴을 가져다 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치면 안 돼요. 절대, 절대 다치지 말아요.”

우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그런 건데, 오히려 내가 흘린 눈물이 그의 손등을 적셨다.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요.”

“…….”

“쓸데없는 정의감에 당신의 목숨을 걸지 말아 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알도르 경의 입장에선 다소 뜬금없고 황당한 이야기일 텐데도,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왜 이러는지 안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내 손을 역으로 감싸 쥐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 전하.”

백발이 무성한 머리가 꾸벅 숙여졌다.

본디 황족에겐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게 예의였다.

하지만 그는 페르데스의 마조사 스승이었기에, 특별히 고개만 숙여 인사해도 됐다.

아델의 일로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줄곧 표정이 어두웠던 페르데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오랜만이군, 그노시스. 한 달하고 사흘만인가?”

남자, 그노시스가 허허 웃었다.

“그걸 일일이 세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큼 그대의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지.”

“이것 참, 너무 영광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전처럼 공작저에 머물면서 나한테 이것저것 알려 주는 건 어때?”

그노시스는 처음엔 공작저에 머물면서 페르데스에게 마조사의 기본 등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페르데스는 검술과 달리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빠르게 습득했고, 그렇게 석 달 만에 마조사 기본을 마스터했다.

“기본을 전부 마스터했다면, 앞으로 남은 건 배운 걸 응용해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찾아봬서 제대로 하고 계시는지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노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났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한 달에 한 번씩 레오폴드 공작저에 방문해서 페르데스의 실력을 확인해 주었다.

가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약속한 날짜에 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이 바로 그 경우였다.

그노시스의 개인 사정이 아닌, 폭설 때문이었다.

그나마 황제가 마법사들을 고용해서 철도에 쌓인 눈을 녹여 준 덕분에, 지금이라도 올 수 있게 된 것.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다른 사람의 집에 오래 머무는 건 민폐인지라 그럴 수가 없군요.”

“레오폴드 영애도 허락할 거야.”

“허락과 별개로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러니 부디 양해해 주시길.”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긴.

페르데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래서 이번엔 며칠이나 머물 생각이지?”

“이틀 정도입니다. 좀 더 오래 있고 싶지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시끄러운 곳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최근 체르노서의 일로 레오폴드 공작령이 발칵 뒤집힌 일을 말하는 거였다.

조만간 범인의 신병을 인도받으려 황실 기사단도 올 테니, 그노시스는 그 전에 떠나려는 것이다.

“그렇군.”

고작 이틀만 머물고 떠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가 시끄러운 걸 싫어한다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는 터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대신 아쉬운 마음을 듬뿍 담아 쳐다보자, 그노시스가 묘하게 웃으며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전하의 생신 선물입니다.”

페르데스가 약간 놀라며 그노시스를 쳐다봤다.

“그대가 내 생일을 챙겨 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하나뿐인 제자인데 당연히 챙겨야지요. 게다가 이번에 성년식까지 치르셨으니, 연회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 말이죠.”

“알고 있어.”

전혀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선물을 받는 순간 녹아내렸다.

과연 뭐가 들었을까.

그노시스의 안목은 제법 높은 편이니 몹시 기대됐다.

페르데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선물 상자를 열었다.

“…….”

그러나 선물을 확인하는 순간, 반짝이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실력 있는 마조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수식 71가지.”

무미건조한 목소리만큼이나 딱딱한 제목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두꺼운지, 순간 백과사전인 줄 착각했다.

페르데스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풀풀 내며 책을 바라봤지만, 그노시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전하의 실력이 하루라도 빨리 향상되길 바라는 마음에 드리는 것이니 부디 정독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참…….”

고마워……해야 하나.

무표정했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페르데스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노시스에게 말했다.

“선물 고마워.”

기대했던 선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물을 받았으니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 실력 향상에 확실히 도움 될 것 같아, 페르데스는 다소 떨떠름했던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럼 그동안 전하의 실력이 얼마나 향상됐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노시스가 오면 보여 주고 싶은 게 많았는데, 막상 확인받으려니 긴장됐다.

페르데스는 크게 심호흡한 뒤, 종이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조사들은 대부분 마나가 없어, 마법진을 그려도 발동하지 못했다.

그러면 마법진을 제대로 그렸는지 확인할 수가 없으니, 동료 마법사에게 부탁하거나 마나가 깃든 특수한 종이에 그려 발동했다.

그러나 종이에 깃든 마나의 양은 워낙 적어, 발동해도 원래 효력이 10분의 1도 나타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페르데스는 좀 더 확실하게 효력을 보여 주고 싶어 아델에게 선물 받은 마나 펜을 꺼냈다.

“호오.”

마나 펜을 본 그노시스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 마나 펜, 선물 받으신 겁니까?”

“맞아.”

“누구한테요?”

누구냐고? 그건…….

문득 아델을 떠올린 페르데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자, 그노시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소중한 연인에게 선물 받으신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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