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14/262)

120

비밀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비밀 유지가 쉽게 되는 법.

그러니 페르데스가 체르노서인 척 연기하는 건, 아델과 알도르 경, 그리고 레오를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극비였다.

당연히 페르데스의 전속 하인인 잭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잭을 비롯한 대부분은 페르데스가 직접 체르노서를 시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떠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범인인 퀘이드가 잡혔지만, 페르데스는 여전히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다.

머리 색이 여전히 금색이었기 때문이다.

마법 약의 효력은 대략 사흘에서 일주일 정도 지속됐다.

해독제 같은 건 없으니, 효력이 끝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반나절 정도 지나자 머리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소 큰 소란이 있었던 후, 이른 아침.

“어서 오세요, 페르데스 님.”

잭은 오랜만에 보는 페르데스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정작 그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잭이 그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

“목소리가 안 좋으신데요.”

잭이 아픈 곳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계속 치근거리자, 페르데스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괜찮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볼일 봐.”

“하지만…….”

“괜찮다고 말했지.”

페르데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자, 잭은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페르데스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아델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에 대해 생각했다.

“약속한 대로 자유를 드릴 테니 여기까지 해요, 페르데스 님.”

“여기까지 하긴, 누구 마음대로 여기까지 해?”

페르데스는 씩씩거리면서도, 정작 아델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건, 그들의 계약은 사실상 페르데스가 성년식을 치른 그날,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델이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해도 자신은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이런 것에 화가 나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기도 했고.

아델과의 계약이 종료되면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더는 골치 아픈 업무 같은 걸 보지 않아도 되는 건 물론, 황제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계약을 끝내고 떠나는 게 더 좋건만, 왜 그러기 싫은 걸까?

‘모르겠어.’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머리가 더 아팠다.

페르데스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저, 페르데스 님…….”

어느덧 다시 곁으로 다가온 잭이 그를 불렀다.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또 부르는 건지.

짜증이 난 페르데스가 눈을 치켜들며 쳐다보자, 놀란 잭이 딸꾹질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페르데스의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딸꾹, 주머니가, 딸꾹, 붉게 빛나요. 딸꾹.”

“뭐?”

그 말에 페르데스는 주머니를 확인했다.

잭의 말대로 주머니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주머니 안에 넣어 둔 마법 통신 반지가 빛나는 거였다.

잭이 황제에게 보고할 때 쓰는 통신 반지였다.

이전에 잭과 마음을 터놓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 받은 것으로.

그 이후로 잭은 황제에게 보고할 땐, 항상 페르데스에게 반지를 받아 그가 보는 앞에서 보고했다.

황제가 잭에게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그래도 불편한 건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먼저 연락했다고?

‘그 남자가 소식이 없으니, 연락한 거겠지.’

황제 전속 암살 기사단인 아나토메 친위대 소속이라던 그 남자.

페르데스가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딸꾹질을 멈춘 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락을 안 받아도 될까요?”

“……받아야지.”

안 받으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데다가, 짐작한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페르데스가 반지를 넘겨주자, 잭은 크게 심호흡한 뒤 연락을 받았다.

“네, 폐하.”

잭은 마치 황제의 얼굴이 보이는 것처럼 허리를 숙이고 굽신거렸다.

잭의 입장에선 황제가 굉장히 어렵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페르데스는 팔짱을 끼고 삐딱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혼자인가.]

“네. 지금 혼자 있습니다.”

[그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겠지?]

마치 그의 상황을 훤히 내다보는 듯한 말투에 잭은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를 바라봤다.

페르데스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잭은 페르데스의 행동을 따라 하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무, 물론입니다!”

바보같이 말은 왜 더듬는 건지.

페르데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군.]

황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냥 넘어갔다.

[2황자가 습격당한 일을 알고 있겠지?]

“네, 네. 알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의식이 없을 정도로 중상이라고 하던데…… 지금 2황자의 상태는 어떻지?]

“어, 그게…….”

잭이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어물쩍대자, 페르데스가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글로 적어 주는 게 더 안전했지만, 잭이 글을 모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함정이었다고 말해.”

함정? 영문 모를 말에 잭이 의아해하며 쳐다봤지만, 페르데스는 어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눈짓만 보냈다.

“사실 함정이었습니다.”

[함정?]

“레오폴드 영애가 감히 2황자를 시해한 호위 기사를 붙잡기 위해 함정을 파 둔 거라고 말해.”

“레, 레오폴드 영애가…….”

그런 거였어?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잭은 무척 놀랐지만, 그 와중에도 앵무새처럼 페르데스의 말을 황제에게 전했다.

페르데스는 문제의 호위 기사를 붙잡은 것까지 전부 황제에게 말했다.

어차피 다 말하려고 했던 터라 이래도 상관이 없었다.

“……입니다.”

황제는 잭이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그의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자 툭, 말을 던졌다.

[그럼 4황자도 멀쩡하겠군.]

갑자기 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지?

잭은 물론 페르데스도 당황하며 붉게 반짝거리는 반지를 쳐다봤다.

곧 정신을 차린 페르데스가 잭에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라고 시키려는데, 황제가 또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반지의 빛이 사라지면서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

잭이 페르데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황제 폐하께 다시 연락해 볼까요?”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하지만, 괜히 연락했다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의문이 남더라도 보고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맞았다.

잭에게 마법 통신 반지를 돌려받은 페르데스는 침대맡에 앉아 잭과 황제가 나눈 대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잭이 일방적으로 보고한 거라 사실 대화라고 할 건 없었다.

그러나 단 한마디, 그럼 4황자도 멀쩡하겠다는 그 말이 크게 와닿았다.

‘설마 황제가 그 남자에게 나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황제가 툭 던진 말이 이해됐다.

……아델이 갑자기 끝내자고 한 이유 역시.

그녀는 진작 이 사실을 눈치채고, 그가 걱정돼서 여기서 그만두자고 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 그런 게 틀림없어.

의문이 마침표를 찍자, 페르데스의 입술이 풀어졌다.

조금 전만 해도 아델을 떠올리면 왈칵, 짜증이 났는데 이젠 아니었다. 무척 기분이 좋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던 페르데스가 갑자기 풀어진 입술을 실룩이며 웃자, 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페르데스 님.”

“별로.”

“에이, 무척 좋아 보이시는데요.”

잭은 페르데스의 표정을 요목조목 살펴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마치 막 사랑에 빠진 소년 같으세요.”

“……뭐?”

툭, 던진 말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페르데스가 몹시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그 말은 내가 레오폴드 영애를 좋아한다는 거야?”

“네?”

돌아온 질문에 이번엔 잭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전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니라, 그런 것 같다고 묘사한 것뿐이에요.”

“그게 그거잖아.”

“달라요. 그리고 페르데스 님은 원래 아가씨를 좋아하시잖아요.”

“레오폴드 영애를 좋아하는 건 맞아.”

자신을 지옥 같은 황궁에서 꺼내 주고,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나름 사이가 좋기도 했고.

“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니야. 나랑 레오폴드 영애는 친구 같은 사이라고.”

잭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부부 사이를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런 게 아니라…… 됐다. 말을 말자.”

잭은 페르데스와 아델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모르는 데다가, 두 사람이 결혼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 봤자 의문만 만들어 줄 테니 페르데스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피곤해서 푹 쉬고 싶으니까, 이만 나가 봐.”

잭이 나가자 페르데스는 침대에 누웠다.

잠시 모든 걸 잊고, 휴식하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 탓이었다.

그 호위 기사와 황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 페르데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사랑이라는 말이었다.

“사랑…….”

소설 속에서나 봤던, 평생 자신과는 연관이 없을 것 같았던 단어를 마주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 단어를 아델과 연관 지으면 기분이 생경해졌다.

페르데스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단어를 입 밖으로 뱉었다.

“내가 아델 레오폴드 영애를 좋아한다.”

단순히 생각하던 걸 입 밖으로 뱉으니, 좀 더 묵직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아까처럼 마냥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 스스로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계속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정말로 내가 그 여자를…….

아델 레오폴드를 사…….

울컥,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솟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꺼내면 안 될 것 같아 페르데스는 억지로 삼키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도망쳐 어서 잠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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