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달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두꺼운 유리창이 소리 없이 열렸다.
곧 몸에 딱 달라붙은 검은색 타이트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나비처럼 사뿐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퀘이드였다.
다이몬의 명령을 받아 다시 레오폴드 공작저로 돌아온 퀘이드는 체르노서에 대해 조사했다.
그가 정말 살아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돌아온 건지.
그리고 지금 어떤 상태이며 어디에 있는지 등등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체르노서를 지하실에서 다시 데리고 온 사람이 아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공작저의 핏줄이 아닌 자는 지하실에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더니, 역시 허풍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들이 거짓말을 했거나.
어느 쪽인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
다이몬이 공작저에 심어 둔 첩자가 몇몇 있긴 하지만, 그들을 믿을 수 없을뿐더러.
만약 정말 살아 있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죽여야 후환이 없을 테니, 퀘이드는 직접 체르노서가 있는 침실을 방문한 것이다.
퀘이드는 어두컴컴한 침실을 쭉 둘러봤다.
‘기척은 방 안에 둘, 밖에 넷인가.’
밖에 있는 자들은 신경 쓸 필요 없고.
방 안에 있는 나머지 한 명이 거슬렸다.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는, 체르노서로 추정되는 자 말고 또 다른 이가 침실에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분명 레오폴드 공작가의 기사 중 한 명이겠지.
“…….”
그리 생각하며 날카롭게 주변을 경계하던 퀘이드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하인을 발견하고 경계를 풀었다.
우선 체르노서부터 처리하고, 그다음에 저 하인도 죽여야지.
악의 같은 건 없었다.
모든 건 이곳에 있는 저 하인의 잘못이었다.
……그래, 그의 잘못이야.
퀘이드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소리 없이 심호흡한 뒤, 체르노서로 추정되는 자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화려한 금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역시 체르노서가 맞는 건가?
침대맡에 선 퀘이드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그때.
“……!”
이불 속에서 새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퀘이드가 뒤로 물러서자 이번엔 새카만 어둠을 가르며 날카로운 단도가 날아왔다.
퀘이드는 거의 날리다시피 몸을 굴려 단검을 피한 뒤, 단검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봤다.
“와우, 다람쥐처럼 재빠르네.”
그러자 단검으로 저글링하며 웃고 있는 하인이 보였다.
아니, 하인이라고 생각했던 자였다.
기사인가?
기사들은 보통 단검을 쓰지 않으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것보다 방금 침대에서 나왔던 새하얀 손은 누구 거지?
체르노서의 것은 아닌데?
“쓸데없이 나서지 말라고 했잖아, 레오.”
이 목소리는 설마…….
새하얀 손의 주인을 확인한 퀘이드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바로 아델 레오폴드였다.
그 뒤로 페르데스가 부스스한 금발을 정리하며 일어섰다.
그러니까 페르데스가 체르노서인 척 연기하고 있었던 건가.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아챈 퀘이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그 부분은 괜찮았다.
문제는 아델 레오폴드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거였다.
아델 레오폴드가 기사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했을 만큼,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 봤자 햇병아리라고 생각했다.
혹시 그녀와 붙게 되더라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척을 완벽하게 숨기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물론 겉으론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예리한 눈으로 아델과 페르데스, 그리고 레오를 주시했다.
아델은 퀘이드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치며 이불 속에 숨겨 두었던 검을 꺼냈다.
이전에 마티나 백작에게 받은 진검이었다.
아델이 검을 꺼내 들자, 퀘이드의 눈빛이 좀 더 날카롭게 변했다.
“영애가 직접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후회하실 텐데요.”
“글쎄.”
아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침실 문이 열리더니 알도르를 비롯한 레오폴드 공작가의 기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퀘이드를 둘러쌌다.
그 뒤에 선 아델은 인상을 팍 쓰고 있는 퀘이드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이제 누가 후회할 것 같지?”
* * *
흔히 소설이나 연극 속의 주인공들은 ‘혼자’서 악당을 멋지게 물리쳤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괜히 주인공이 되고 싶다며 까불었다가 오히려 호되게 당할 가능성이 크니 그러지 않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생을 통해 내 검술 실력이 아나토메 친위대를 확실하게 이길 만큼 강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했고.
확실하게 이길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쓰는 게 맞았다.
그러니 나는 미리 공작가 기사들을 대기시켜 두고, 신호를 보내면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기사들이라고 해 봤자 알도르 경을 비롯한 고작 3명이었다.
너무 소란을 피우면 소문이 퍼질 수도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들로만 선별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상대는 한 명이니 이 정도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큭!”
거봐, 제압하잖아.
나는 자결하지 못하게 입에 재갈을 물고 바닥에 엎어져 있는 남자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남자는 반항심과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마주하며 물었다.
“아나토메 친위대, 맞지?”
“…….”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틀리면 좌우로 저어.”
당연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나토메 친위대인 걸 인정하면 황제가 이번 일과 연관 있다는 걸 같이 인정하는 꼴이 되니, 부정하는 것이다.
“흐음, 언제까지 부정할 수 있으려나.”
귀신같이 내가 원하는 걸 안 알도르 경이 말했다.
“제가 직접 이 자를 심문하겠습니다.”
“그래요.”
원래는 내가 직접 하려고 했지만, 나보단 알도르 경이 이런 쪽에 전문가이니 그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 참고로 목숨은 살려 둬야 해요.”
“알겠습니다.”
알도르 경과 기사들이 남자를 끌고 갔다.
나는 그들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페르데스는 비로소 안심한 듯 크게 숨을 토하며 소파에 앉았다.
레오는 흘끗,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내게 다가오더니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남자…… 우악.”
“떨어져.”
페르데스가 뒤에서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레오는 하려던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페르데스는 단순히 떼어 놓는 걸로 그치지 않고, 그를 침실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차게 닫은 뒤, 날 돌아봤다.
“저 자식 뭐야?”
부릅뜬 눈이 조금 무서웠다.
“달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저 자식 뭔데 영애한테 자꾸 친한 척하는 거야? 설마 진짜 애인은 아니지?”
“애인이요?”
“그래. 저 남자가 영애의 숨겨 둔 애인이라고 공작저 내에 소문이 쫙 퍼졌어.”
벌써 소문이 퍼진 건가.
쓸데없이 빠르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페르데스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일렁거렸다.
“설마 진짜 애인인 건 아니지?”
“설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조금 사정이 있어서 애인인 척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무슨 사정?”
그 부분에 대해선 말해 줄 수가 없어 대답 대신 웃었다.
“…….”
눈치 빠른 페르데스는 바로 알아차리고 더 묻지 않았지만, 대신 얼굴에 불만이 덕지덕지 붙었다.
진짜 덩치만 컸지, 생각하는 거나 표현하는 건 여전히 어린애라니까.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나는 옅게 웃으며 페르데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주었다.
“페르데스 님이 조언해 주신 덕분에 저 남자를 쉽게 잡을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더니, 페르데스의 얼굴에 붙어 있던 불만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뭘 이런 걸 가지고. 다음에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감사해요.”
평화로운 분위기.
그동안 긴장하고 경계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분위기는 온화했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아나토메 친위대, 그 남자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 남자는 도망치지 않은 거지?
목표가 체르노서가 아닌 페르데스라는 걸 확인했을 때나 기사들이 들어오는 걸 본 즉시 도망쳤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맞서 싸운 걸까.
‘설마 황제가 지시한 목표에 페르데스도 속한 건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황제가 페르데스를 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였다.
아니면 페르데스가 그를 배신한 걸 알고 있거나.
전자든 후자든 큰일 난 건 마찬가지였다.
집요한 사냥꾼 성질을 타고 난 황제는 한 번 선택한 먹잇감을 잡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제는 어떻게든 페르데스를 죽이려고 하겠지.
날 죽이려고 한 것처럼 말이야.
“표정이 어둡네.”
페르데스가 내 표정을 요목조목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또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앞으로가 걱정돼서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면 페르데스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적당한 핑곗거리를 댔다.
“황제가 필시 이번 일을 물고 늘어질 텐데,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긴. 전에 말한 것처럼 그 남자한테 모든 죄를 떠넘겨야지.”
페르데스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했다.
“떠넘기는 것도 아니지. 전부 그 남자가 저지른 일이니까. 우린 그대로 말하는 것뿐이잖아. 그리고…….”
페르데스는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지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날 위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감정이 차오르고 목이 멨다.
역시 당신과의 인연은…….
“이렇게 하면 제아무리 잘난 황제도…….”
“여기서 끝낼까요?”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던 페르데스가 뚝, 말을 멈췄다.
나는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한 대로 자유를 드릴 테니 여기까지 해요, 페르데스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