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황제가 제국민들을 위해 마법사를 고용한 일로 제국 전역이 들썩거렸지만, 레오폴드 공작령을 비롯한 인근 영지는 다른 소식으로 들썩거렸다.
“그 이야기 들었어? 지난주에 2황자 전하께서 습격을 당하셨대!”
바로 체르노서의 습격 소식이었다.
“아, 들었어. 다행히 아직 살아 계시지만, 부상이 심해서 혼수상태라고 하던데.”
“맞아.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라고 들었어.”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떠들었고, 그 탓에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황족을 습격한 거야? 잡히면 삼대가 멸족할 텐데.”
“듣자 하니 황자 전하를 지키던 호위 기사라고 하던데.”
“뭐? 진짜?”
“응. 이것 봐.”
술집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을 마시던 남자 중 한 명이 누런 종이를 내밀었다.
현상 수배지였다.
범인의 몽타주는 없었지만, 대략적인 생김새와 인적 사항, 그리고 저지른 죄명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맞네, 맞아. 2황자 전하의 호위 기사가 습격한 게 맞아!”
“세상에. 주군을 지켜야 하는 기사가 오히려 검을 들이대다니. 말세군, 말세야.”
사람들은 범인이 2황자를 습격했다는 것보다 ‘기사’가 주군을 공격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욕했다.
다른 테이블도 상황이 비슷했다.
대부분 체르노서 습격 사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는 가운데,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인영이 조용히 술집을 빠져나왔다.
인영이 향한 곳은 인기척이 드문 어느 골목이었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꼼꼼하게 확인한 뒤, 품에서 붉은 퓨라가 박힌 반지를 꺼냈다.
퓨라를 만지작거리자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그래. 무슨 일이지, 퀘이드?]
곧 반지에서 황제, 다이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영, 퀘이드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본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폐하.”
[문제?]
“네. 2황자 전하께서…….”
퀘이드는 마티나 영지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그대로 다이몬에게 보고했다.
[……체르노서가 살아 있단 말이지.]
모든 보고를 들은 다이몬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거짓 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2황자 전하께선 분명 그곳으로 들어가셨으니까요.”
그뿐인가. 체르노서가 혹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돌아오지 못하게 문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런데 체르노서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그럴 리가 없다.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지. 그래서 체르노서가 ‘그걸’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거였고.]
그건 그렇지. 퀘이드는 속으로 공감하며 반지를 끼지 않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는 작은 유리병과 편지 봉투가 있었다.
유리병은 바로 체르노서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얻은 물건이었다.
문득 체르노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 퀘이드의 눈동자가 약간 어두워졌다.
“반드시 가져와서 부황 폐하께 인정받을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죽게 될 자신의 미래를 모른 채,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지하실로 들어가던 그 뒷모습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퀘이드는 아나토메 친위대에 들어간 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를 손에 묻혔다.
그가 죽인 사람 중에는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갓난아기도 있었다.
그러나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들은 감히 황제의 뜻에 반하는 불순한 자들이니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체르노서는 불순한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다이몬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를 사지로 밀어 넣었으려니, 찝찝했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
퀘이드는 아나토메 친위대가 된 후,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체르노서가 제 모친인 황후에게 쓴 편지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왔다.
편지 봉투가 실링 왁스로 밀봉되어 있어 내용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퀘이드는 이번 업무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을 거라고 직감했다.
만약 그렇다면 다이몬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 편지를 버려야 하는데, 난 왜 버리지 못하는 건지.
퀘이드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정말 살아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군.]
반지에서 한층 낮아진 다이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퀘이드, 네가 직접 레오폴드 공작저에 진상을 확인하러 가거라.]
퀘이드는 머릿속에 부유하는 잡생각을 지우고 주군의 말에 집중했다.
[만약 체르노서가 살아 있다면 후환이 남지 않도록 죽여.]
아무리 체르노서가 사고뭉치에 바보 같다고 해도 친아들인데, 다이몬은 죽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혹시 체르노서가 친아들이 아닌 걸까?
[거짓 소문이라면 그땐 페르데스를 죽여라.]
문득 의심했던 퀘이드는 덧붙인 말에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다이몬이 친아들도 체스 말로 쓸 만큼 냉혈한이라서 그렇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다이몬이 냉혈한이면 어떤가.
중요한 건, 그가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라는 거였다.
주군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알겠습니다.”
퀘이드는 그 문장을 가슴에 새기며 우직하게 대답했다.
* * *
내가 직접 마티나 영지에 가는 건 어려웠지만, 말을 전하는 건 아주 간단하고 쉬웠다.
마법 통신구를 통해 말하면 됐으니까.
2황자를 시해한 범인이 마티나 영지에 숨어든 것 같으니 수색을 도와달라고 말하자, 마티나 영지 관리는 냉큼 승낙했다.
거절했다가 자칫 공범으로 몰릴 수 있으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마티나 영지 말고 인근 다른 영지에도 도움을 요청했고, 현상 수배지도 만들었다.
덕분에 기차 운행이 다시 시작하기 전에 인근 영지에 체르노서가 호위 기사에게 습격당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릴 수 있었다.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지.’
내가 들어가기 전, 지하실 문은 밖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 호위 기사가 체르노서를 밀어 넣고 일부러 잠근 게 분명했다.
즉, 호위 기사는 체르노서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의미.
직접 칼을 들이대서 죽인 건 아니지만, 사지로 밀어 넣은 것만 해도 그 호위 기사가 체르노서를 죽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확히는 다이몬이 그런 거겠지만.
다이몬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러다 수틀린다는 이유로 페르데스까지 죽이려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가장 먼저 눈이 부실 듯이 화려한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체르노서인 척 연기하기 위해 물들인 거였다.
하지만 얼굴은 바꿀 수 없으니, 페르데스는 계획을 실행한 날부터 지금까지 손님용 침실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소문은 신빙성을 더하며 날개 달린 것처럼 퍼져 나갔다.
종일 방에 혼자 있으면 심심할 테니,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그와 함께 있었다.
……비단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저 금발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네.
“어차피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테니, 머리를 금발로 염색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
책을 보고 있던 페르데스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봤다.
“왜? 내 머리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
“음.”
“표정을 보아하니 정곡이네.”
페르데스가 픽, 웃으며 책을 덮었다.
책 겉면에는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마법진 31가지]라고 적혀 있었다.
“나도 내 머리 색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자식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미리 바꿔 둬야지.”
그 자식이라면 2황자의 호위 기사를 말하는 것일 터.
“암살자답게 모두가 잠든 밤에 몰래 날 죽이러 오겠지?”
페르데스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죽이러 오는지 직접 경험한 터라 더욱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영애.”
“……!”
잔인한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가 어깨를 크게 흔드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페르데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안색이 안 좋은데.”
페르데스가 내 이마를 짚었다.
따뜻하네.
“이마가 뜨거워.”
그의 손이 따뜻한 줄 알았는데, 내 이마가 뜨거운 거였나.
“감기 걸린 것 같은데, 당장 주치의에게 가서 약 처방 받고, 푹 쉬어.”
“괜찮아요.”
“괜찮긴. 얼른 가서 쉬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페르데스의 말대로 언제 그 호위 기사가 그를 죽이러 올지 모르는데,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내가 옆에 있어야 해.
내가 그를 지켜야 해.
지난 생처럼 그들의 손에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는 없어.
반드시, 반드시…….
“지켜 드릴게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말하자, 놀랐는지 페르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도 잠시,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역으로 내 손을 잡았다.
“이런 몸 상태로 누굴 지키겠다는 거야?”
“지킬 수 있어요.”
“못 믿어. 그러니까 얼른 가서 쉬어.”
페르데스가 잡아당긴 탓에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서게 됐다.
“제가 없는 사이에 그 호위 기사가 오면 어떡해요?”
“마티나 영지에 숨어 있던 그 자식이 벌써 이곳에 왔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걱정되는데…….
“그럼 약만 받아서 다시 올게요. 잠은 여기서 자면 되니까요.”
페르데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여기서?”
“네. 혹시 싫으세요?”
“아니, 싫다기보다…….”
페르데스는 말꼬리를 흐리며 우물쭈물하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종종 생각하는 거지만, 영애는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없는 것 같아.”
“네?”
“아니, 아무것도.”
페르데스는 또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등을 밀었다.
“여기서 자든, 영애의 침실에서 자든 상관없으니 얼른 다녀와.”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귓불은 왜인지 사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