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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1/262)

117화

레오의 지적을 받고 나서야 깨달은 건데, 혈족을 찾으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둔 게 전혀 없었다.

그저 만약 혈족이 존재한다면, 황제가 찾기 전에 어떻게든 내가 먼저 찾아서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그렇게 혈족에 대한 단서를 찾았고, 이제 남은 건 혈족으로 추정되는 소년을 데리고 와서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 소년이 진짜 레오폴드 공작가의 숨겨진 혈족이면 그땐 어떻게 하지?

역시 후환이 남지 않게 죽여야 하나?

“…….”

꼬리를 길게 물고 늘어지는 질문에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황제가 갑자기 돌변해서 날 죽이려고 한 건, 나를 대체할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황제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면 소년을 죽이는 게 맞지만…….

“그 소년을 죽일지 말지, 고민이 많이 되는 모양이군요.”

불쑥 치고 들어온 말에 레오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친 레오가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이래도 저래도 후회가 된다면 일단 저지르고 후회해라.”

하는 말은 개소리였지만.

“계속 쓸데없는 소리 할 거라면 당장 나가.”

“정말 나가도 괜찮겠습니까?”

또 무슨 개소리를 시전하려고 저렇게 물어보는 건지.

눈을 가자미처럼 얇게 뜨고 쳐다보자, 레오가 특유의 뻔뻔한 미소를 곁들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나토메 친위대.”

“…….”

순간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물어보려다, 그가 알도르 경에게 친위대에 대해 알려 줬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다른 걸 물었다.

“뭔가 아는 게 있어?”

“아는 거라면 많죠. 예를 들면 2황자의 호위 기사가 사실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아나토메 친위대라든가, 이틀 전, 두 사람이 갑자기 실종됐다든가.”

말꼬리를 흐린 레오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눈동자가 유난스럽게 반짝이는 걸 봐서 뭔가 아는 눈치였다.

그것도 지금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정보를 말이지.

“사라진 2황자의 호위 기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호오?”

그것 말곤 없다고 생각해서 물어봤더니, 레오가 묘한 탄성을 뱉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호위 기사의 행방만 물어보는 걸 보아하니, 2황자는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아차,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지적당하자, 나는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한 척 연기하며 물을 마셨다.

“혹시 2황자가 공작저의 비밀 지하실에 들어갔습니까?”

“쿨럭.”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쿨럭, 쿨럭.”

“이런.”

훅, 치고 들어온 말에 사레가 걸린 내가 계속 헛기침을 하자 레오가 등을 두들겨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너라면 괜찮겠냐.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내 손해라는 걸 알기에 참았다.

대신 빤히 쳐다보자 레오가 수줍은 듯 두 뺨을 감싸며 말했다.

“빤히 쳐다보시면, 부끄럽습니다. 아가씨.”

“……원래부터 그렇게 개소리를 잘하는 편이야?”

“허어. 진심으로 말한 건데 개소리라고 치부하시다니…….”

레오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 상처받았습니다. 상처받은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의 원래 성격을 잘 몰랐다면, 진짜 상처받았다고 생각했을 만큼 완벽한 연기력이었다.

“개소리는 그쯤하고.”

물론 다 아는 내겐 통하지 않았지만.

“그 호위 기사가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해.”

“맨입으로요?”

레오는 언제 상처받았냐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정보 값을 달라는 의미였다.

예상했던 요구였기에 군말 없이 책상 서랍에서 수표책을 꺼내 가져왔다.

그리고 백지 수표 한 장을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원하는 금액을 적어.”

“제가 터무니없는 금액을 적으면 어쩌려고, 백지 수표를 막 내미시는 겁니까?”

“네가 그만큼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곤 생각 안 해.”

만약 터무니없는 액수를 적는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거래는 끝날 테니, 레오도 생각이 있다면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륙의 모든 돈을 끌어모은다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니까. 웬만한 액수는 불평하지 않고 낼 테니, 원하는 금액이 있으면 적어.”

전에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돌려주자, 레오가 킥킥 웃으며 수표를 내 쪽으로 밀었다.

“돈은 됐고, 다른 걸 주시죠.”

“다른 것?”

“네.”

레오는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가씨의 시간이요.”

은근슬쩍 내 손을 잡는다.

“나중에 제가 원할 때, 하루만 시간을 내주세요.”

“글쎄.”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내 시간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러니 정보 값으로 아가씨의 하루를 달라는 겁니다. 특별한 정보인 만큼, 대가로 특별한 걸 받고 싶어서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길래 대가로 내 하루를 달라는 건지 궁금했다.

내 하루를 가져가서 뭘 하려는 건지도 궁금했고.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레오가 말했다.

“아가씨의 하루를 받아서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왜 내 하루를 달라는 거지?”

“음, 그냥요.”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믿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전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달라고 한 거였습니다.”

레오가 조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뭐, 정확히는 언젠가 아가씨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도움을 받으려고 그런 거지만요.”

“그런 거라면 내 하루를 달라는 것보다,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레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제 소원을 들어주실 겁니까?”

“이런, 내가 말실수를 했네. 아니. 네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내 잘못을 인정하며 딱 잘라 거절하자, 레오가 그것 보라며 부루퉁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럼 그냥 정보 값으로 아가씨의 하루를 주세요.”

“거절하지.”

레오는 순수한 마음에 내 하루를 원하는 거라며 주장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백지 수표를 다시 레오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냥 정보 값으로 돈을 받도록 해.”

레오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협상 실패네.”

내가 미련 따위 없다는 듯 백지 수표를 챙겨 들고 일어서자, 덩달아 일어선 레오가 약간 당황하며 내게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그 호위 기사의 위치를 알고 싶은 거 아니었나요?”

“내가 직접 찾으면 돼.”

레오에게 정보를 얻으면 더 빨리 찾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폭설로 인해 기차 운행이 멈추면서 그 호위 기사의 발이 마티나 영지에 묶였을 테니까.

기차가 다시 운행하려면 일주일 넘게 남았으니, 그 안에만 호위 기사를 찾으면 됐다.

내 대답을 들은 레오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틀 뒤에 수도행 기차가 다시 운행한다는데……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이틀 뒤에 수도행 기차가 운행한다고?

“그럴 리가 없어. 폭설 때문에 막힌 철로를 뚫으려면 최소 일주일은 더 걸릴 텐데…….”

“이런, 모르셨군요.”

레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국의 황제가 제국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철로에 쌓인 눈을 전부 치운다고 합니다.”

“……!”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생을 세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기도 했고.

그래서 레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좀 더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해서 나는 신문을 확인했다.

“허?”

레오가 말한 내용이 신문 1면에 떡하니 실려 있었다.

다른 신문사에서 발행한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레오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의미.

마법사를 고용하면 철로에 쌓인 눈을 빨리 치울 수 있긴 하지만, 대신 돈이 많이 들어갔다.

어림잡아도 황실 운영 1년 치 예산이 들어가니, 황제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래,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할 리가 없지.

어쩌면…… 체르노서가 공작저의 지하실에 들어온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 아닌 그가 두 번째 방까지 들어온 흔적이 남아 있던 것과 피 묻은 손자국 등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걸 알아내려면 역시…….

“정보 값으로 내 하루를 주면 된다고 했지? 좋아, 거래하겠어.”

문제의 호위 기사가 수도로 떠나기 전에 무조건 잡아야 했다.

* * *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마티나 영지까지는 마차를 타고 이틀 정도 걸렸다.

말을 타면 하루 정도 걸렸고.

즉, 지금 당장 출발해야 마티나 영지에 숨어 있는 호위 기사를 잡을 수 있다는 의미.

나는 레오에게 정보를 받자마자 출발하려고 했지만,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바로 폭설로 인해 소복하게 쌓인 눈이었다.

눈 때문에 마차는 물론 말을 타는 것도 힘들었다.

어찌 말을 타고 간다고 해도 이틀 내로 마티나 영지에 도착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호위 기사를 잡아야 하는데, 어떡하면 좋지?

고민하고 있던 와중, 해결 방법을 제시한 사람은 뜻밖에도 페르데스였다.

“네가 그 자식을 잡으러 마티나 영지까지 꼭 갈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말 그대로야. 네가 직접 가지 말고, 그 자식이 돌아오게 하자는 거지.”

“그러면 확실히 좋긴 한데…… 그게 가능할까요?”

“물론.”

페르데스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내가 말한 대로 한다면, 그 자식은 무조건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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