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나를 달링이라고 부르며 껴안은 사람은 다름 아닌 레오였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는지 그의 품에 얼굴이 파묻혀 숨이 막혔다.
“이것 좀…….”
놓으라고 말하려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레오의 멱살을 잡고 쭉 잡아당겼다.
“적당히 해.”
알도르 경이었다.
멱살이 잡힌 데다가 알도르 경이 살벌하게 노려봤는데도, 레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참 뻔뻔한 생각이야.
그리 생각하며 구겨진 옷깃을 툭툭, 펴는데 문득 옆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
돌아보자 금방이라도 레오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어찌나 살벌하게 노려보는지 시선으로 누군가를 찌를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찔렀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뭐가 불만이길래 이러는 걸까.
내가 페르데스를 신경 쓰는 사이, 알도르 경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레오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어. 하긴 애지중지하는 아가씨가 나 같은 놈과 가까이 지내는 게 싫긴 하겠지.”
알도르 경이 인상을 팍 쓰며 레오의 손을 뿌리쳤다.
“알면 입 다물어.”
“어휴, 무서워라.”
레오는 뱉은 말과 다르게 전혀 무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소중한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데, 아가씨가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네.”
그 말에 알도르 경은 물론 페르데스도 날 쳐다봤다.
한순간 쏟아지는 강렬한 시선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쓸데없는 소리는 거기까지 하고 따라와.”
레오를 더 풀어 뒀다간 망언을 계속 쏟아 낼 것 같아,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레오가 눈을 묘하게 반짝이며 알도르 경과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
“…….”
그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의 표정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됐고.
나는 그들이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무시했다.
체르노서의 일부터 시작해서 아나토메 친위대, 아버지의 일기장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레오가 어떤 걸 알아 왔을지 궁금해서, 그만 데리고 곧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찾았어?”
다급한 마음에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물어보자, 레오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쿵. 귓가에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내가 모르는 혈족이 존재했을 줄이야.
호흡이 약간 가빠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자, 나는 비틀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괜찮아.”
“괜찮긴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레오가 탁자 위에 있는 물 주전자를 기울여 컵을 채운 뒤, 내게 내밀었다.
“고마워.”
물을 마시며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는데, 레오가 말했다.
“고작 단서만 찾았는데, 이렇게 충격을 받으시다니. 진짜 혈족을 찾아서 데리고 왔을 땐 기절하실까 봐 걱정되네요.”
“……단서만 찾았다고?”
“네. 그것도 확실한 건 아닙니다.”
레오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가씨께 보고하러 오기 전에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했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혹시 황제가 이미 그자를 데리고 갔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발밑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말씀드리기 전에 대륙 지도를 보고 싶은데, 혹시 가지고 계십니까?”
갑자기 대륙 지도는 왜 보고 싶다는 거지?
의아했지만, 원하는 대로 대륙 지도를 탁자에 펼쳐 보여 주었다.
레오는 턱을 쓰다듬으며 한참 동안 대륙 지도를 보다가 말했다.
“역시 없군요.”
“뭐가 없다는 거지?”
“글로아 섬이요.”
글로아 섬이라.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나도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봤지만, 지도 그 어디에도 글로아 섬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존재하는 섬 맞아?”
“맞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레오가 제국에서 제법 떨어진, 망망대해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듣기로는 이쯤에 글로아 섬이 있다고 합니다.”
“지도에는 아무것도 표시가 안 되어 있는데.”
“15가구밖에 살지 않는 데다가 제대로 된 선박장도 없는 아주 작은 섬인지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대부분의 대륙 지도에는 표시가 안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을 용케 만났네.”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나온 남자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내 쪽으로 상체를 숙인 레오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 남자가 말하길 자기 섬에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년이 있다고 합니다.”
시선이 저절로 길게 늘어진 내 붉은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레오도 내 머리카락을 흘끗 보고 말을 이었다.
“4년 전에 죽은 소년의 모친 머리 색도 붉었다고 말하는 걸 보니 모계 혈통인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다른 특이점은?”
레오폴드 공작가 사람들의 특징이 붉은색 머리카락이긴 하나, 그 머리 색을 가진 사람이 전부 레오폴드 공작가 혈족인 건 아니었다.
그러니 머리 색이 붉다고 무조건 레오폴드 공작가 혈족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다른 특징도 있어야 했다.
가령 보통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우월하다던가.
“그 소년의 나이가 올해 17살인데,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힘이 세다고 합니다. 그건 소년의 모친도 마찬가지인지라, 섬 내에서 힘쓰는 일은 두 모자가 다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
단순히 힘이 센 것만으론 신체 능력이 우월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 볼 필요성은 있었다.
“그 소년을 여기로 데리고 올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선 직접 가고 싶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리고 진짜인지 확인해 보려면 소년이 직접 공작저에 와야 하니 레오에게 물었다.
그러자 레오가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음,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그 소년을 데리고 오려면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아, 맞아. 그런 말을 했었지.
“무슨 문제들이 있지?”
“우선 거리가 너무 멉니다.”
레오가 레오폴드 공작령부터 시작해서 글로아 섬까지 손으로 쭉 그었다.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글로아 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계산해 봤을 때 대략 한 달 반 정도입니다.”
“왕복하면 석 달이라는 거네.”
“그렇죠. 물론 날씨가 도와준다는 전제하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아무리 마법 동력을 쓰는 범선이라고 해도 항해할 땐 날씨에 많이 좌지우지되니까요.”
그건 그렇지. 나는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글로아 섬까지 가는 배편을 찾는 것도 무척 힘듭니다. 정기 배편이 없을뿐더러, 섬에 선박장도 없으니까요.”
“전에 네가 만났다는 글로아 섬 사람은 어떻게 대륙에 온 거지?”
“여기.”
레오가 인근에 있는 큰 섬을 가리켰다. 루미아, 라고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이곳까지 작은 배를 타고 간 뒤, 그곳에서 범선을 타고 대륙까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작은 배는 마법 동력 장치가 없는 거지?”
“네.”
그 말인즉, 날씨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의미.
“그래도 근처 큰 섬까지 가는 범선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긴 한데, 한 달에 한 번만 운항하는 데다가 겨울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운항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게다가 폭설이 내려 기차 운행을 중단한 곳이 많으니 배를 타러 가는 것도 힘듭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끙,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려 인상을 쓰며 미간을 짚었다.
“어떻게 해도 봄까지는 글로아 섬에 가지 못한다는 거구나.”
“그렇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글로아 섬에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아봐. 정 안 되면 범선을 통째로 빌리면 되니까, 그것도 알아보고.”
레오가 휘파람을 불었다.
“와우, 그런 생각까지 하신다니. 역시 대륙의 돈을 끌어다 모은다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다우십니다.”
“실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타박했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레오는 계속 싱글벙글 웃었다.
“이것도 진행되는 대로 나한테 보고하도록 해. 문제가 생기면 즉시 말하고.”
“물론이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가씨의 애인으로 위장해서 찾아오겠습니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아카데미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레오 보고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더니, 방문객 명단에 나와의 관계를 애인이라고 떡하니 적어 두었다.
떡하니 약혼자가 있는데, 애인이라니. 황당했다.
더 당황스러운 건, 다들 레오가 내 애인이라는 걸 믿는다는 거였다.
정확히는 남창으로 생각하는 거지만, 그건 각설하고.
하여간 그 덕분에 레오를 만나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니, 계속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그래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도록 해.”
아카데미보다 레오폴드 공작령이 신경 써야 할 눈이 더 많으니, 레오의 진짜 정체가 탄로 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자 레오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렇게 해도 됩니까?”
“왜? 공작저 사람들이 널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싫어?”
“아니요. 어차피 저랑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그건 괜찮은데…….”
“괜찮은데?”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꼬리를 늘이며 고민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특유의 쾌활한 얼굴로 웃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아니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휴,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지극히 제 개인적인 문제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정말일까. 믿기지 않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레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물었다.
“아가씨,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
“그 소년에 관한 겁니다.”
내가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는 헛기침을 한 뒤 말문을 열었다.
“혹시 그 소년을 찾으면,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