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09/262)

115화

“!”

나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 내려놓았던 책이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소리가 너무 가벼웠다.

잇따라 굴러가는 것같은 소리가 들리는 걸 봐선 반지 같이 작고 가벼운 물건인 것 같았다.

혹시 인장 반지가 떨어진 건 아니겠지?

황급히 손가락을 확인해 봤는데, 다행히 인장 반지는 그대로 있었다.

나는 안심하는 것과 동시에 긴장하면서 문제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소리가 들린 곳은 책장과 테이블 사이였는데, 주변 바닥을 살펴봐도 떨어진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내가 들었던 그 소리는 도대체 뭐지?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의아해하며 다른 곳까지 계속 살펴보던 와중, 이번엔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 중에서 유난히 튀어나와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책들과 달리 그 책은 제목이 없었다.

무슨 책이길래 제목이 없는 거지?

나는 책을 반으로 쪼개듯이 펼쳤다.

[제국 519년 12월 7일]

이건…… 일기장인가.

[올벤 경이 아델이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도 아버지의 일기장이었다. 내 이름이 언급된 것도 있지만, 글씨체를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일기장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의아하면서도 궁금했다.

마침 내가 펼쳤던 페이지가 올벤 경이 아버지에게 내 검술 재능에 대해 말했던 그때인지라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과연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는 건 나쁜 행동이지만, 이것만 확인하자고 생각하며 책장에 기대어 정독했다.

[올벤 경은 가문의 큰 경사라고 좋아했지만, 이건 경사가 아니라 저주다.]

저주. 그 단어가 눈에 박혔다.

자연스럽게 아까 봤던 저주와 관련된 책 더미가 떠올랐다.

설마 그 책들을 가져다 놓은 사람이 아버지인가?

[아델이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돼.]

글씨체가 점점 진해지는 걸 봤을 때 꾹꾹 눌러쓴 것 같았다.

[특히 그자에게 들키면 안 된다. 만약 들킨다면…….]

문장은 거기서 끝이었다. 페이지를 넘겨 봐도 뒤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곳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니 맥이 탁 풀렸다.

동시에 우울해지는 건 아버지가 내 재능을 경사가 아닌 저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가 검을 휘두르는 걸 싫어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주라고 지칭할 만큼 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소문이 퍼져 나가는 걸 막으려고 하셨던 거구나.

도대체 왜죠?

왜 그렇게 싫어하신 건가요, 아버지.

공작가의 기사들이 뛰어난 검술 실력을 보였을 땐,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으셨으면서 왜 저는…….

투툭-

“…….”

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소리가 아까보다는 둔탁했으며, 그곳은 내가 확인만 하고 스쳐 지나간 책장 사이였다.

무언가 떨어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 말인즉, 누군가 이곳에 있다는 의미.

설마 체르노서인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리니 설마,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덮어 품에 챙기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

그러자 책장에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피 묻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바닥에도 피 묻은 발자국이 보였다.

아까는 없었던 터라 더욱 섬뜩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지만, 왜 생겼는지 알아야 하니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다가갔다.

쨍그랑-

그러자 발에 가벼운 무언가 채였다.

아래를 확인해 보자 무언가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게 보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빛나는 무언가를 주웠다.

“이건…… 커프스단추?”

커프스단추에는 보통 자신이 속한 가문의 문양을 새겨 두는데, 내가 주운 단추에는 제국 황실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 * *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커프스단추가 그곳에 있었다는 건, 체르노서가 거기까지 들어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까지 확인하러 가긴 했지만, 진짜 체르노서의 흔적을 발견할 줄이야.

몹시 당황스러웠다.

체르노서가 찍어 둔 걸로 추정되는 피 묻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발견해서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도대체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 아닌 그가 어떻게 그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거지?

그 외에 체르노서가 지하실에 들어간 이유나.

정말로 사라진 건지, 그 핏자국은 그가 찍은 게 맞는지.

그리고 호위 기사는 어디 간 건지 등 온통 풀리지 않는 의문투성인지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지하실의 규칙에 예외가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지.

내가 알기로는 없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내가 모르는 어떤 방법이 있을지도.

그것들을 알아보려면 그 서고의 책들을 뒤져 봐야 했으나, 체르노서의 일을 마무리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커프스단추와 아버지의 일기장을 챙겨 들고 지하실을 나왔다.

햇빛 특유의 밝은 빛에 눈이 부셨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창을 만들었다.

“드디어 나왔네.”

페르데스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역광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다소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도 안 나오길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렇게 오래 있었나. 나는 페르데스의 뒤에 있는 창밖을 내다봤다.

해가 높이 떠 있는 걸 봐서 늦은 오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동이 트기 직전, 지하실에 들어갔으니 못해도 6시간 이상은 있었다는 의미였다.

금방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렇게 오래 있었으니 페르데스가 화가 날 만했다.

기꺼이 사과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믿기지 않는 말을 했다.

“도대체 지하실에서 이틀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이틀……이요?”

6시간인 줄 알았는데, 이틀이나 지났다고?

“말도 안 돼. 장난치지 마세요.”

페르데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섰다.

“진짜인데. 내가 왜 이런 걸로 장난을 치겠어?”

그건 그렇지만…….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

그만큼 페르데스에 대한 신뢰가 없는 건 아니니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정말 이틀이 지났단 말이지.

현실감이라곤 조금도 없는 시간의 흐름에 당혹스러워하던 와중 뒤늦게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델, 그곳은 현실과 동떨어진 또 다른 세계란다. 그래서 그곳에 있으면 현실보다 시간이 느리게 가기도 하고, 빨리 가기도 하니 되도록 그곳엔 오래 머물지 말렴.”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비로소 이해가 됐다.

“그것보다 체르노서의 단서는 찾았어?”

“네.”

나는 가지고 온 커프스단추를 페르데스에게 보여 주었다.

페르데스는 단추에 새겨진 황실 문양을 확인하더니 헛바람을 찼다.

“진짜 그 자식이 이곳에 들어갔구나.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 외에 철저하게 금지된 장소에 겁도 없이…….”

말하는 걸 들어 봤을 때, 내가 없는 사이 하네스나 다른 사람에게 지하실의 비밀에 대해 들은 모양이다.

“그런데 허락받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하더니, 이렇게 흔적이 남았네?”

페르데스가 단추를 내게 돌려주며 물었다.

나 역시 그 부분이 의아했던 터라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려고요.”

“알아볼 방법은 있어?”

“그것도 해 봐야 알아요.”

나는 혹여 단추를 잃어버리지 않게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그러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공작 인장 반지가 걸리적거려 쳐다봤다.

예전에 아버지에게 레오폴드 공작이 그 서고에 들어가면 남들은 볼 수 없는 제3의 문을 발견할 수 있다고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혹시 반지를 끼고 가면, 그 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품었는데, 헛된 기대였다.

단순히 공작 인장 반지를 끼는 것만으론 안 되는 모양이지.

나는 설핏 웃으며 반지도 빼서 속이 깊은 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페르데스의 시선이 문득 내가 안고 있는 아버지의 일기장에 닿았다.

“혹시 그 책이 단서인가?”

나는 일기장을 더욱 품으로 끌어당기며 대답했다.

“아니요.”

더 이상 일기장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표현이기도 했다.

눈치 빠른 페르데스는 바로 그 의미를 알아듣고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영애가 없는 동안 공작가는 물론 공작령까지 전부 샅샅이 뒤져 봤지만, 체르노서의 호위 기사는 찾지 못했어.”

나는 침실로 돌아가며 대답했다.

“저도 안에서 그 호위 기사의 흔적은 찾지 못했어요.”

“그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치는 데 성공한 걸까?”

그런 내 뒤를 계속 따라오던 페르데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가?”

“글쎄요. 어느 쪽인지는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되겠죠.”

“어떻게 확인하려고?”

“마티나 기차역에 사람을 풀 거예요.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수도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기차를 타는 거니까요.”

강이 얼어 배를 타는 건 불가능했고, 말을 타고 가면 최소 2주는 허비해야 했다.

그러니 만약 그 호위 기사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수도행 기차를 타려고 할 것이다.

페르데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티나 백작에겐 체르노서의 흔적을 찾은 걸 비밀로 하고, 그를 찾는 걸 도와달라고 하는 편이 좋겠네.”

“그렇죠.”

“만약 그 호위 기사를 찾는다면 그때, 레오폴드 공작령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 그 단추를 떨어뜨려 놓고 모르쇠 하는 게 좋겠군.”

하나를 알려 줬는데, 더 많은 걸 내다보고 깨우치니 든든했다.

그가 같은 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하며 침실로 향하는 복도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였다.

다다다다닥!

무언가 빠르게 달음박질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드디어 왔구나, 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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