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정황상 체르노서와 그 호위 기사가 지하실에 들어간 것 같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이 아닐뿐더러 공작에게 허락받은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정말 지하실에 들어갔다면 이미 흔작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지하실에 들어가 본다고 해도 찾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가 보는 게 좋겠지.
“알도르 경을 불러와 줘.”
그 전에 확인해 보고 싶은 곳이 있어 알도르 경을 찾았다.
잠시 후, 알도르 경이 돌아오자 그에게 말했다.
“저택의 동쪽에 있는 후문을 지나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닌 오른쪽 수풀 사이로 5분 정도 걸어가면 화산으로 향하는 샛길이 있어요.”
거긴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몇십 년 동안 산 영지민들도 잘 모르는 숨겨진 샛길이었다.
길이 조금 험하긴 하지만, 그렇게 화산을 넘어가면 성문을 통하지 않아도 레오폴드 공작령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곳이라면 이미 조사해 봤습니다만, 누가 지나간 흔적은 없었습니다.”
분명 숨겨진 길인데…… 알도르 경이 어떻게 아는 거지?
지난 생의 알도르 경들은 그 길의 존재를 몰랐다.
두 번째 생에선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땐 나와 같이 아나토메 친위대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거였다.
지금은 모르고 있어야 정상이건만, 알고 있으니 약간 당황스러웠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 시선을 다른 쪽으로 곡해한 알도르 경이 말했다.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더 찾아보겠습니다.”
“……그래요.”
어떻게 알도르 경이 그 길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일단 그를 보냈다.
그리고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페르데스와 하네스가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집무실 책상 안쪽 서랍에 넣어 둔 지하실 열쇠를 챙기다가 그 옆에 있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보고 가져갈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 무거운 건 아니니 일단 가져가 볼까.
반지를 검지에 끼자 사이즈가 손가락에 맞게 줄어들었다.
마법 반지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진짜 레오폴드 공작이었다면 계속 이 사이즈로 있었겠지만, 아직은 아닌지라 빼면 다시 아버지의 검지 사이즈로 돌아갔다.
인장 반지까지 챙기고 집무실을 나와 지하실로 내려갔다.
두꺼운 철문에는 자물쇠가 굳건하게 잠겨 있었다.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다는 건 세 가지 경우였다.
첫 번째는 체르노서와 그 호위 기사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
두 번째는…….
“2황자나 그 호위 기사 중 한 명만 안에 들어갔나 보네.”
페르데스가 내가 생각한 걸 그대로 말했다.
“아니면 또 다른 조력자가 두 사람이 들어간 뒤, 다시 문을 잠갔거나.”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후자일 가능성은 없으니, 역시 전자겠지? 그럼 둘 중 한 명은 아직 공작저에…….”
“어째서 후자일 가능성은 없다고 확신하시는 거예요?”
아까부터 페르데스는 또 다른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을 계속 배제하고 있었다.
그것도 저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묻자 페르데스가 하네스를 흘끗 보곤 대답했다.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으니 나중에 말해 줄게.”
“…….”
“이상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설마 나 못 믿어?”
그건 아니지만, 완벽하게 믿는 것도 아닌데…….
그 말이 입 안에서 굴러다니다가 사라졌다.
페르데스의 말대로 지금은 체르노서를 찾는 게 우선이니, 나는 자물쇠를 열었다.
덜컥, 끼익-
묵직한 철문이 바닥을 긁으며 열렸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페르데스가 따라붙으려고 했다.
“따라오시면 안 돼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페르데스 님.”
나와 하네스가 동시에 페르데스를 만류했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어리둥절하며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지?”
“여기는 허락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장소니까요. 페르데스 님이 들어오시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실 겁니다.”
내 말이 이해가 안 됐는지 페르데스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 말은 체르노서나 그 호위 기사가 이 안에 들어갔어도 이미 사라졌다는 거네?”
“그렇죠.”
“근데 굳이 찾으러 갈 필요가 있어?”
“혹시 모르니 찾으러 가 보려고요. 그들이 이 안에 들어갔다는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고요.”
단서를 발견할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했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확인해 보는 게 맞았다.
“그러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확인하고 나올 테니까요.”
“……갑자기 잭의 마음이 어땠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아.”
“네?”
“아무것도 아니야.”
페르데스가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 다녀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다, 그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다면 막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페르데스와 하네스에게 문지기 역할을 부탁했다.
그다음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끼익, 내가 들어왔던 문이 닫히고 완벽한 어둠이 찾아오자, 촛대가 없는 벽에 불꽃이 피어오르며 길을 밝혔다.
그래도 분위기가 음침하고 소름이 끼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길의 끝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싸늘한 한기가 감돌아 더 으스스했다.
게다가 묘하게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지하실이라 한기가 드는 건 이해하겠는데, 피 냄새는 왜 나는 거지?
나는 닭살이 돋은 팔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건 온통 벽뿐이었다.
피 냄새가 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으, 추워.”
뱉은 숨이 새하얗게 허공에 퍼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두꺼운 외투를 입고 오는 건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싶었지만, 여기까지 들어온 게 아까웠다.
그렇게 체감상 약 이십여 분 정도 걸었을 무렵, 나는 또 다른 문 앞에 도착했다.
문에는 큼지막한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까지가 혈족이 아니지만, 레오폴드 공작의 허락을 받은 특별한 자들이 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문 너머의 장소는 오로지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족만 들어갈 수 있었다.
애초에 혈족이 아닌 자는 이 문을 열 수도 없었다.
그러니 체르노서나 그 호위 기사가 안쪽으로 들어갔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나 역시 이 문 너머의 장소에 가는 건 이번이 세 번째인지라 조금 긴장됐다.
처음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왔었고.
두 번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체르노서에게 붙잡혀서 왔었다.
두 번째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으니, 일찌감치 머릿속에서 지우고.
나는 처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왔을 때를 떠올리며 문을 살짝 밀었다.
지하실 입구의 철문과 달리 이 문은 약간만 힘을 줘도 쉽게 밀렸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이번에도 촛대가 없는 벽에 화르륵, 불꽃이 타올랐다.
퀴퀴하고 메마른 종이 냄새 위로 옅은 피 냄새가 느껴졌다.
여기서도 피 냄새가 나네.
예전에도 피 냄새가 났었던가?
나는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워낙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세 번째 방문, 제정신 상태로 온 건 두 번째인지라 나는 잠시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둘러봤다.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않고 방치됐던 방인데도 불구하고,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책더미를 손으로 쓸어 봤지만, 쌓인 먼지는 없었다.
그런데도 괜히 손을 툭툭, 털어 내며 다시 방을 둘러봤다.
레오폴드 공작가의 지하실은 베일에 싸여 있는 공간인 만큼 다들 궁금해했다.
진심 반, 농담 반으로 그곳엔 황실 보물 창고보다 더 진귀한 보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거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이곳에 있는 건 온통 책뿐이었다.
도서관처럼 책장이 5열 횡대로 나열되어 있었으며, 책장마다 빈틈없이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푹신한 소파와 크고 네모난 테이블이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도 책과 오래된 양피지들이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책을 들어 제목을 읽어 봤다.
“레드 드래곤의 비밀.”
[드래곤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드래곤의 신화]
등등등.
테이블에 쌓인 다른 책의 제목도 비슷비슷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드래곤과 레오폴드 공작가에 내려오는 신화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편이었다.
드래곤에 관한 책이나 고문서가 있으면, 거금을 주고서라도 반드시 사들였다.
그것들이 이 테이블에 모여 있는 거였다.
아버지는 관심이 있으셨어도, 나는 아닌지라 무심하게 넘기며 천천히 방 안을 살펴봤다.
무의미하게 걸려 있는 커튼 너머와 소파 밑 등, 전부 샅샅이 살펴봤지만, 체르노서와 그 호위 기사는 없었다.
역시 이곳에 들어왔을 리가 없지.
확신하건대 그들은 입구에서 이곳까지 이어진 길을 절반도 걸어오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괜히 헛걸음했네.”
크게 숨을 뱉으며 다시 나가려는데, 방 한쪽에 켜켜이 쌓여 있는 책들이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가장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축복과 저주는 한 끗 차이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했다. 딱히 관심이 없는 분야인데도 시선을 확 끌었다.
[저주를 푸는 방법.]
[저주의 미학.]
[세상에 풀지 못하는 저주는 없다.]
등등, 다른 책들의 제목도 의미심장해서 더욱 눈길이 갔다.
게다가 이곳은 역대 레오폴드 공작들이 레오폴드 공작가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아버지처럼 가끔 본인의 취미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찌 됐건 간에 아버지의 취미도 레오폴드 공작가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저주는 아닌지라, 누가 이 책들을 가져다 둔 건지 궁금했다.
안을 확인해 보면 뭔가 있으려나.
처음에 집어 들었던 책을 펼치려는 순간.
툭, 데구르르르-
갑자기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