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06/262)

112화

입을 맞춰도 되냐니.

난데없는 말에 나는 깜짝 놀라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곧 약간 어둡게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전에는 저 눈을 보면 황제가 떠올랐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나를 원하는 한 남자만 보일 뿐이었다.

……진심일 리가 없지만.

그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지니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 분명했다.

술이 깬 뒤, 지금 일을 떠올리면 무척 민망해하면서 이불을 걷어차겠지.

잠시 미쳤었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뜯을 수도 있었다.

페르데스가 덜 민망하게 만들려면 괜히 뜸을 들이지 말고, 확실하게 거절하는 게 맞다 생각해 그를 밀어내려는 그때.

“……!”

페르데스가 역으로 내 팔을 잡아당기며 세게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나는 아까보다 더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 세게 끌어안은 건 아니었다. 언제든지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는 순간, 느껴지는 무게와 체온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확 가까워진 거리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미안.”

어깨 위로 나지막하게 번지는 목소리도 그를 밀어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내가 술에 취해서 이상한 말을 하고 말았네. 정말 미안.”

그걸 알면 술에 취한 게 아닐 텐데…….

혹시 진심이었던 건 아닐까.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괜히 물었다가 여기서 더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게 도움이 됐는지, 페르데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비척비척 침대 쪽으로 가더니 쓰러지듯이 침대에 앉았다.

“이만 잘래.”

커다란 덩치와 달리 어린아이 같은 투정에 웃음이 나왔다.

“주무세요.”

“영애는?”

“저도 자야죠.”

내가 침대 쪽으로 걸어가자 페르데스가 뚫어지도록 날 쳐다봤다.

눈동자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랑 한 침대에서 자는 것 때문에 긴장한 건가.

생각해 보면 약혼식 첫날밤에도 그는 무척 긴장했었다.

역시 덩치만 컸지, 속은 어린애라니까.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내 베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소파로 돌아가 탁자 밑에 구비된 담요를 꺼내 들자 페르데스가 다가와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뭐 하긴요. 시간이 늦었으니 잘 준비를 하려는 거죠.”

“그러니까 왜 침대가 아니라 소파에서 자려는 건데.”

“그럼 같이 침대에서 잘까요?”

같이, 라는 부분을 강조하자 페르데스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싫어하면서 뭘 물어보는 건지.

어깨를 으쓱이곤 소파에 누우려는데 페르데스가 내 팔을 잡았다.

“내가 소파에서 잘게.”

“됐어요. 페르데스 님이 자기엔 소파가 좁아요.”

나는 두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지만, 키가 큰 페르데스가 누우면 발이 소파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그러니 제가 소파에서 잘 테니, 페르데스 님은 침대에서 주무세요.”

“영애가 소파에서 자는데 어떻게 나 혼자 편하게 침대에서 자.”

“이거 비싸고 좋은 소파라서 나름 편해요.”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잖아.”

“알아요. 하지만 저랑 같은 침대에서 주무시는 거, 싫으시잖아요.”

“……싫지 않아.”

부루퉁한 얼굴로 싫지 않다고 하면 누가 믿나.

“그럼 불편하신 거로 정정할게요.”

“불편한 것도 아니야.”

“그럼 왜 제가 침대에 다가갔을 때, 바짝 긴장하신 거예요?”

“그건…….”

할 말이 없는지 페르데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팔을 꼭 잡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어요. 이만 가서 주무세요.”

“……같이 자.”

“불편…….”

“한 거 아니니까 같이 자. 아니면 내가 소파에서 잘게.”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네. 나이를 먹어도 고집스러운 성격은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요, 같이 자요.”

보아하니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고, 그를 소파에서 재울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침대에 눕는 쪽을 선택했다.

황궁에서 나란히 누웠던 침대만큼은 아니지만, 여기 침대도 나름 컸다.

나와 그 사이엔 장정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남았다.

그러나 한 이불을 덮고 있는 터라 그 공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페르데스가 바짝 긴장한 게 얇은 이불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페르데스 쪽을 보려다, 그러면 그가 더 긴장할 것 같아 일부러 천장을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세요?”

반 박자 늦게 질문이 돌아왔다.

“……영애는 나랑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무렇지 않아?”

“네.”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건데?”

날 질책하는 듯한 말투에 그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페르데스도 날 보고 있었다.

촛불을 아른하게 비춘 금색 눈동자가 오묘하게 반짝거렸다.

……예쁘네.

정확히는 황제의 눈동자와 다른 색이 되어서 마음에 드는 거였다.

“대답해. 왜 아무렇지 않아?”

“이유가 필요한가요?”

똑같이 질문으로 되돌려 주자 페르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난 남자야.”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하, 아니,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페르데스는 혀를 쯧, 차더니 내게 등을 보이며 몸을 완전히 돌렸다.

누가 봐도 단단히 삐진 뒷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페르데스에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대답했지만, 사실 다 알고 있었다.

단지 그걸 내색하면 지금 관계가 어색해질 테니,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이었다.

덕분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뒤로 내 기분이 이상해졌다는 거였다.

머릿속에 그가 남자, 그것도 성인 남자라는 사실이 각인되면서 그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게 갑자기 신경이 쓰였다.

동시에 입을 맞춰도 되냐고 물어보며 날 바라봤던 눈빛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건 완벽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단순하게 성별을 따지는 게 아닌 욕망을 품은,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

……역시 소파에서 자는 게 낫겠어.

지금 일어나면 아까처럼 또 페르데스가 자신이 소파에서 자겠다고 우길 게 분명하니, 숨죽이고 그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바짝 굳어 있던 등이 이완되면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잠이 든 건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려는 그때.

“어디 가?”

페르데스가 물었다.

자는 게 아니었나. 낭패였다.

나는 냉큼 돌아누우며 아닌 척, 대답했다.

“그냥 돌아누운 거예요.”

“……그래.”

말투에서 마지못해 믿는 느낌이 풀풀 풍겼다.

하여간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다니까.

나는 다시 페르데스의 등을 바라보며 그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좀처럼 잠들지 않았다.

이러다 내가 자겠네.

밤이 깊어진 만큼 하품이 나왔다. 돌덩이라도 얹은 것처럼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아직 아나토메 친위대 일원인 그 남자가 내 저택에 있으니, 오늘 밤도 불안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이렇게 졸릴 때 조금이라도 자둬야 나중에 덜 피곤한데.

……그래, 그냥 자자. 어차피 같이 침대에서 자기로 했잖아.

소파에서 자는 걸 포기하고 몰려오는 수마를 받아들이려는 그때.

똑똑똑똑-

굉장히 빠른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물론 페르데스도 상체를 일으켰다.

페르데스가 침대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

“누구냐.”

“알도르입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생겨,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무례하게 노크를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페르데스 님.”

진짜 급한 일이라는 게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도대체 이 밤중에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설마 그 남자가 사고를 친 건가?

“들어와요.”

불안한 마음에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곧바로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알도르 경이 나와 페르데스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보고했다.

“조금 전 2황자 전하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 전한 사실입니다. 2황자 전하께서 실종되셨다고 합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체르노서가 실종됐다고?

생뚱맞은 이야기에 나는 당황하며 페르데스와 잠시 마주 봤다가 알도르 경에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아니, 지금 당장 그 하인을 불러와요.”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보다 당사자한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인을 찾았다.

잠시 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와 페르데스의 앞에 선 하인이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했다.

“저녁 8시쯤, 황자 전하께선 오늘 몸이 안 좋으니 일찍 자겠다고 침실로 들어가셨습니다.”

“…….”

“물론 잠자리는 제가 준비해 드렸고, 혹시 달리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 싶어 침실 앞에서 2시간 정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찾지 않으시니 당연히 주무신다고 생각하고 저도 침실로 돌아갔습니다.”

하인은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내다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속사포로 말했다.

“그 뒤로도 계속 잠잠했고, 자정 무렵에 슬슬 벽난로의 장작이 다 탔을 것 같아 침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장작만 넣으려고 했는데…… 침실이 휑하지 뭡니까.”

나는 하인의 말을 들으며 시계를 슬쩍 쳐다봤다.

현재 시각 새벽 2시 40분.

하인이 체르노서가 없어진 걸 발견한 뒤, 무려 2시간 40분이나 흘렀다.

페르데스도 시간을 확인하고 하인에게 물었다.

“왜 2황자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보고하지 않았지?”

“잠시 화장실에 가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30분이 지나도 돌아오시지 않자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황자 전하의 호위 기사가 만류했습니다.”

“그 호위 기사가?”

내가 묻자 하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밤 산책하러 가신 것 같다고, 금방 돌아오실 테니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군.”

또 한 번 하인의 고개가 위아래로 격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그 호위 기사는 지금 어디 있지?”

“황자 전하를 찾아보신다며 사라지셨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네, 네.”

나는 하인의 대답을 듣자마자 알도르 경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도르 경, 지금 당장 공작저는 물론 영지의 문을 폐쇄하고, 기사들을 풀어 2황자 전하와 호위 기사를 찾으세요.”

“네, 아가씨.”

그다음엔 자다가 뒤늦게 소란을 듣고 달려온 하네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을 전부 홀에 불러 모으도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