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오늘 안에 레오를 만나기를 바랐건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알도르 경이 중간에 몇 번이나 그가 머무는 여관에 사람을 보냈으나, 그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하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어디 간 건지.
“후우.”
나는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그러자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피던 메이의 얼굴이 확 펴졌다.
“아가씨, 이만 주무시러 가시는 건가요?”
“응? 아니. 아직 봐야 할 서류가 많아서 오늘도 늦게 잘 것 같은데.”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한 탓에 일 진행 속도가 현저하게 느렸다.
겨우 목표했던 분량의 절반 정도 끝냈을 뿐이었다.
못해도 80퍼센트는 끝내고 자야지.
그게 아니더라도 아직 자기는 이른 시간이었다.
이제 고작 저녁 8시였으니까.
정말 피곤한 날이 아니고서야 내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통상 자정 무렵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계속 내 시중을 들던 메이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뿐더러.
아까부터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게 이상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당연히 있죠! 오늘 아가씨의 첫날밤이잖아요!”
첫날밤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페르데스와 같은 침실을 쓰기로 했구나.
그게 사용인들 사이엔 첫날밤을 보내는 거라고 소문이 났었고.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메이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목욕물이랑 잠옷이 전부 다 준비되어 있어요, 아가씨.”
나는 그런 거 준비할 필요 없다고 타박하려다 관두었다.
황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페르데스의 사이가 여전히 좋다는 걸 알리기 위해선 이런 소문이 도는 편이 좋았으니까.
“페르데스 님은 진작 준비를 끝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준비라…….
문득 페르데스가 사용인들의 되지도 않는 오해에 당황해서 푸드덕거리는 모습이 떠올라 나는 픽 웃었다.
그런 내 웃음을 좋은 쪽으로 받아들인 건지 메이도 웃으며 은근히 날 재촉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도 어서 준비하시고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약혼자를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죠.”
“……그건 그렇지.”
이대로 페르데스를 계속 기다리게 만든다면, 그의 체면이 구겨지게 된다.
그러면 앞으로 계획에 문제가 생기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서류들을 챙겨 서랍에 넣어 놓고 일어섰다.
다행히 급한 건 다 끝낸 터라, 남은 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도 상관은 없었다.
“가자.”
내 말에 메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이쪽이에요, 아가씨!”
그리도 좋을까. 나는 웃으며 메이를 따라 침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가면서 만난 사용인들은 하나 같이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웃고 있었다.
그들은 좋은 밤 보내라고 평상시와 똑같은 인사를 했지만, 그 안에 든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메이가 호들갑을 떨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야릇한 의미를 담아 좋은 밤을 보내라고 말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꼭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
장미 꽃잎이 둥둥 떠 있는 욕조를 봤을 땐, 진짜 첫날밤을 준비하는 신부가 된 것 같았다.
“어서 들어가세요, 아가씨.”
“……그래.”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정신 차리자, 아델.
나는 가볍게 뺨을 두드린 뒤,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 시중은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이런 날에는 꼭 해야 한다며 메이는 나가지 않았다.
“제대로 목욕 시중을 들지 않으면 제가 하녀장님에게 혼날 거예요.”
저렇게 말하니 강제로 내쫓지도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
메이가 뒤에서 등을 씻겨 주는 동안 나는 욕조 위에 둥둥 떠다니는 장미 꽃잎을 쳐다봤다.
어릴 때는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종종 꽃잎을 넣어 목욕했지만, 두 번째 생부턴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알도르 경과 결혼하고 난 뒤, 첫날밤을 보냈을 때도 그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체르노서와 보냈던 첫날밤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자비하고 난폭했던, 나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그 악몽 같은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서 꽃잎 목욕을 꺼렸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메이는 첫날밤이라는 이름 아래 꽃잎 목욕을 준비해 뒀다.
처음에는 나 역시 정신이 없어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체르노서와 보냈던 끔찍한 첫날밤의 악몽이 슬금슬금 떠올랐다.
참자. 조금만 참으면 목욕이 끝날 거야.
그러니 참……지 못하겠어.
내가 벌떡 일어서자 덩달아 일어선 메이가 약간 놀라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그냥. 목욕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서.”
“네? 하지만 아직 반도 안 했는데…….”
나는 메이가 뭐라고 하든 말든 샤워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욕실 앞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알도르 경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언뜻 드러난 그의 귓불이 새빨갰다. 알도르 경은 내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전…… 나가 있겠습니다.”
알도르 경이 나가자마자 메이가 커다란 타올을 들고 날 쫓아왔다.
“아가씨, 그냥 나가시면 어떡해요! 물기 닦으셔야죠!”
메이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투덜거리면서 꼼꼼하게 물기를 닦아 주었다.
머리까지 말린 뒤, 메이가 미리 준비해 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첫날밤이라면서 야릇하고 이상한 잠옷을 준비해 뒀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했다.
조금 얇긴 하지만, 잠자리 날개처럼 속이 훤히 비치는 그런 이상한 분류의 잠옷은 아니었다.
“이것 보세요, 아가씨! 여기 가슴께 끈을 풀면 잠옷이 쉽게 벗겨져요!”
……아닌 줄 알았는데, 맞았구나.
“잭이 페르데스 님에게 미리 이 사실을 알려 뒀다고 하니, 알아서 해 주실 거예요.”
알아서 하긴 뭘 해!
그리고 페르데스에게 이런 걸 가르쳐 줬다니.
황당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입 안에서 들끓다가 사라졌다.
나는 메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가슴께 끈을 쉽게 풀지 못하게 꽉 동여맸다.
* * *
이상한 잠옷을 입어서 그런가.
아니면 공동 침실로 오는 동안에도 눈을 요상하게 휘며 웃고 있는 사용인들을 만나서 그런가.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공동 침실 앞에 도착했을 땐,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심장이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쿵쿵 뛰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 상태로 페르데스를 만났다면 놀라 비명을 질렀을 텐데, 다행히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진작 준비를 끝마쳤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메이를 쳐다보자 그녀도 페르데스가 없는 것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는 거네.
악의가 없다고 해도 거짓말을 했다면 바로 내쳤을 텐데, 그게 아니니 넘어갔다.
공동 침실은 첫날밤이라는 분위기에 맞게 은밀하고 야릇하게 꾸며져 있었다.
은은하게 방을 비추는 홍등 때문에 더욱 그런 분위기가 났다.
소파 테이블에는 와인과 치즈, 케이크 등이 세팅되어 있었고.
침대 이불 위에는 장미 꽃잎이 하트 모양으로 깔려 있었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짓을 정성스럽게 해 뒀네.
혀를 차며 꽃잎들을 치우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와, 왔네.”
페르데스였다.
그 역시 조금 얇아 보이는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허벅지 사이로 늘어진 끈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설마 저 바지도 끈을 풀면 한 번에 벗겨지는 건 아니겠지?
“왜 그렇게 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에게 이런 상상을 한 걸 말할 수 없으니 대충 얼버무리고 소파에 앉았다.
깊게 파고들었다면 곤란했을 텐데, 다행히 페르데스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미묘한 눈으로 뚫어지도록 날 쳐다봤다.
안 그래도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 심장이 울렁거리는데, 그가 저렇게 쳐다보니 더욱 울렁거렸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얼굴에 열이 몰렸다.
이런 걸 티 내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 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내 착각이겠지?
페르데스는 성큼 걸어와 내 맞은편에 앉더니 와인과 오프너를 집어 들었다.
“와인 드시려고요?”
“응. 조금 목이 말라서.”
“그럼 물을 마시는 게 어때요? 페르데스 님은 아직 어리셔서 술은 좀…….”
“내가 영애보다 어린 건 맞는데.”
퐁, 능숙하게 코르크 마개를 딴 페르데스가 깨끗한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술은 마실 수 있어. 이제 성인이니까.”
아, 그렇지. 이제 성인이지.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가 픽, 웃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성인이 된 걸 잊고 있었나 보네. 성년식을 치르는 걸 봤으면서.”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조금 정신이 없어서 그래요. 페르데스 님을 어릴 때부터 보기도 했고.”
“어릴 때라고 해 봤자 16살이잖아. 고작 2년밖에 안 됐다고.”
“2년씩이나 된 거죠.”
“그런가.”
페르데스는 별 감흥 없다는 듯 대답하며 내 앞에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마셔.”
“전 괜찮아요.”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호위 기사의 목표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누가 준비한 건지 알 수 없는 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페르데스는 더 권하지 않고 와인을 맥주처럼 한 번에 들이켰다.
와인을 신이 내린 술이라고 칭하며 음미하는 귀족들이 보면 기함할 장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거 맛있네.”
……그래도 슬슬 말리긴 해야겠네.
“그만 드세요.”
페르데스가 혼자서 와인 한 병을 비우고, 새 와인을 따려고 하자 오프너를 빼앗았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돌려줘.”
“그만 드세요.”
“한 잔만 더 먹을게.”
“그 한 잔에 취해서 쓰러질 수도 있어요.”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공방이 벌어졌다.
그에게 오프너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피하다 보니 발이 꼬여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탁-
다행히 페르데스가 팔을 붙잡아 준 덕분에 꼴사납게 넘어지지는 않았다.
“고마…….”
고맙다고 인사하려다 그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술 때문인지 팔을 잡은 손이 굉장히 뜨거웠다.
그의 눈동자에는 그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담겨 있었다.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자세도 미묘하고, 기분도 이상해져서 슬슬 놓아 달라고 말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물었다.
“입…… 맞춰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