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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04/262)

110화

호위 기사가 아무리 날고 기는 실력자라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페르데스를 몰래 죽이는 건 힘든 일이었다.

들키는 순간, 황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게 들킬 테니 그는 무조건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정말로 페르데스를 죽이는 게 목적이라면, 잭이나 메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라고 예상하고 두 사람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

만약 그 호위 기사가 찾아오면 일단 맞장구치며 동조하고, 그 모든 내용을 내게 알려 달라고.

메이보다는 잭이 페르데스와 가까운 사이이니, 아마 그에게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게다가 페르데스가 아닌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려 달라고 말한 게 이상했다.

설마…… 그 호위 기사의 목표가 나인 건가?

황제가 날 죽이라고 보낸 거야?

세 번째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득 세 번째 생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머, 식은땀이……!”

메이가 깜짝 놀라며 손수건으로 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괜찮아.”

“하지만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주치의를 불러올까요?”

“아니, 됐어.”

내 안색이 안 좋은 건 기억에서 파생된 두려움 때문이었다.

병에 걸린 게 아니니 주치의가 와도 소용이 없었다.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이만 나가 줘, 메이.”

메이가 나가고, 나는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물을 마시려다 멈칫했다.

혹시 물에 독을 탄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지.”

이 물은 아침부터 계속 마셨던 거였다.

만약 독을 탔다면 진작 무슨 일이 일어났어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쉬이 마실 수가 없는 건, 세 번째 생에서 하필 독을 먹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믿었던 하녀의 배신으로 말이지.

“후우.”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앉았다.

눈이 섞인 차가운 바람을 맞으니 두려움이 가라앉으면서, 마냥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됐다.

정말로 황제가 호위 기사에게 날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거라면, 날 대신할 사람을 찾았다는 의미였다.

가령 숨겨진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이라던가.

‘아침에 레오를 만나서 물어봤어야 했는데.’

하필 레오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알도르 경은 쪽지를 남겨 놓고 왔으니 연락이 오는 대로 데리고 오겠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인지 기약이 없어 답답했다.

황제가 숨겨진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을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고.

일단 주치의에게 온갖 종류의 해독제를 만들어 오라고 해야지.

주치의만 믿을 수는 없으니 다른 의원들에게도 의뢰해야겠어.

그리고 또 뭘 해야 하지?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상해서 이것저것 대비책을 생각해 두었는데, 막상 그때가 되니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진짜 바보 같아.

나는 쓰게 웃으며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전쟁통처럼 복잡한 내 머릿속과 달리 새하얀 눈이 깔린 창밖의 풍경은 너무 평화로웠다.

* * *

잠시 그쳤던 눈은 오후가 되자 다시 펑펑 쏟아졌다.

오전 내내 눈을 치운 보람도 없이 길에 쌓이는 눈을 보며 어른들은 한숨을 쉬었고, 어린아이들은 마냥 좋아하며 눈을 가지고 놀았다.

아델과 페르데스의 합방 소식으로 한껏 들떠 있던 공작저에도 한숨이 떠돌아다녔다.

소복하게 쌓이는 눈이 아닌 체르노서 때문이었다.

체르노서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마차 운행이 힘드니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용인들은 하나 같이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아직은 눈이 그렇게 많이 쌓이지 않아서 마티나 영지까지는 마차 운행을 할 텐데, 왜 이곳에서 머무신다는 건지.”

“그러게나 말이야. 아가씨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면서 이곳에서 지내고 싶으신 걸까?”

“혹시 말이야. 우리 아가씨에게 미련이 남아서, 두 분의 관계를 방해하려고 남으신 게 아닐까?”

누군가 조심스럽게 낸 의견에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좌중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

“맞네, 맞아! 바로 그거야!”

“안 그래도 아가씨의 주변을 빙빙 맴돈다고 생각했는데, 그거였어!”

그것도 잠시, 봇물 터지듯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하여간 어울리지 않게 눈만 높아선, 우리 아가씨가 좋은 사람인 건 바로 알아보네.”

“아무리 아가씨께서 좋은 사람이라곤 해도 이미 페르데스 님이 곁에 있는데, 이러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지 않아?”

“누가 아니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생의 약혼녀인데, 저러고 싶을까?”

사용인들은 하나 같이 혀를 차며 체르노서를 비난했다.

“이럴 게 아니라, 황자 전하께서 두 분을 방해하지 못하게 최선을 다해서 막아야지.”

“옳소. 아가씨는 물론 페르데스 님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방해할 거야.”

“나도, 나도!”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합심해서 이상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가운데,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형태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 드세요, 페르데스 님.”

바로 잭이었다.

마법진을 그리는 연습을 하고 있던 페르데스는 잭이 내려놓은 찻잔을 쳐다봤다.

옅은 노란색 찻물이 싱그러워 보였다.

“평소에 먹던 차가 아니네.”

“네. 조금 색다른 차를 준비해 봤어요.”

“그래?”

마침 목이 말랐던 터인지라 페르데스는 찻잔을 들었다.

코 가까이 가져가자 달콤한 꽃향기에 숨겨진 약초 냄새가 났다.

‘약차인가 보네.’

페르데스는 이제 철도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여전히 그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잭은 종종 약차를 가져왔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런 것일 거라고 생각하며 페르데스는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잭이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거 정력에 좋은 약차예요.”

“푸흡.”

난데없는 말에 페르데스가 먹던 차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이들이 흠뻑 젖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잭만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정력에 좋은 약차라고 했어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페르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남은 약차를 전부 꽃병 안에 부었다.

“으악!”

그걸 본 잭이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꽃병을 붙잡았다.

“아깝게 왜 버리시는 거예요!”

페르데스가 인상을 쓴 채 대답했다.

“아깝긴 뭐가 아까워. 그리고 누가 이딴 이상한 차 가지고 오래.”

“이상한 차라니요!”

잭이 지지 않고 반박했다.

“오늘 있을 거사에서 혹시 페르데스 님이 창피를 당할까 봐 걱정돼서 가지고 온 건데……!”

거사와 창피가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은 페르데스의 얼굴이 귓불까지 확 붉어졌다.

“누가 창피를 당한다고 그래!”

“주치의 박사님이요!”

“무, 뭐?”

“백치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그쪽도 약해서 걱정된다며, 페르데스 님이 아가씨에게 미움받는 걸 원치 않는다고 직접 가져다주신 거란 말이에요!”

설마 주치의까지 연관되어 있을 줄이야.

쏟아지는 진실에 당황한 페르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잭은 부루퉁한 얼굴로 페르데스가 꽃병에 쏟은 약차를 보며 투덜거렸다.

“이거 정말 귀한 거라고, 그만큼 효력이 확실하니 꼭 페르데스 님에게 드리라고 박사님이 당부하셨는데…….”

“시, 끄러워! 너 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페르데스는 잭을 쫓아내고, 다시 소파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찻물에 젖어 우그러진 종이를 아무렇게나 뭉쳐 벽난로 속에 넣은 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봤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불만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오늘 밤, 아델과 같은 침실을 쓰기로 했지만 무슨 일이, 특히 잭이나 공작가 사용인들이 생각하는 ‘거사’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같은 침실을 쓰자고 제안한 건, 단순히 체르노서와 혹시 있을지 모르는 감시역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으니까.

더 나아가 자신과 그녀의 사이가 여전히 좋다는 걸 널리 알리는 게 목적이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심장이 쿵쿵 뛰며, 자꾸만 신경 쓰이는 건, 아델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아니요. 오늘 밤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저와 같이 공동 침실에서 주무실 거예요.”

왜지?

그냥 단순히 눈속임하는 게 목표라면 돌아가도 상관이 없을 텐데 어째서 같이 공동 침실에서 자자고 한 걸까.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한데 그 이유가 뭔지 짐작 가지 않았다.

“…….”

그래서 더욱 생각이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튀었다.

잭이 정력에 좋은 약차를 가져오는 등 이상한 짓을 하는 바람에 망상이 더욱 활개를 쳤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이상한 말을 떠드는 걸 들은 것도 한몫했고.

그리고 이제 나도 성인이니까…….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 거야, 페르데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었다.

페르데스는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떠도는 망상들을 지웠다.

그리고 괜한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계속하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페르데스는 책을 펼쳤다.

[마법진은 마치 남녀 사이와 같아서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

그런데 하필 이런 문구가 눈에 박혀서 애써 다잡은 마음이 흐트러졌다.

머릿속에 온갖 망상들이 다시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페르데스는 책을 부술 것처럼 꽉 움켜쥐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를 식히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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