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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103/262)

109화

잠이 들면 무방비해지는 건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어떤 상황인지 설명하고 침실에 호위 기사를 들이는 걸 허락받는 것도 고민해 봤지만, 그건 그거대로 위험했다.

기사 중에 리네 같은 배신자가 나올 수 있으니까.

호위는 기본적으로 2인 1조가 원칙이니, 둘 중 한 명이 배신한다고 해도 다른 한 명이 막고, 그사이에 페르데스는 도망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잘 때는 그럴 수 없으니, 침실에 함부로 사람을 들이는 것도 위험했다.

실력이 있으면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곁을 지켜 준다면 괜찮았지만, 문제는 그런 사람이 알도르 경, 딱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는 나와 페르데스 중 누굴 지킬 거냐고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날 선택할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가 직접 페르데스를 지키기로 했다.

그러면 알도르 경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뿐만 아니라, 공작저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같은 침실을 쓰면 주변 경비도 강화됐다.

그뿐인가. 황제에게 우리 사이가 여전히 좋다는 걸 보여 줄 수 있으니, 그와 같은 침실을 쓰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

그런 내 마음을 알 턱이 없는 페르데스와 잭은 깜짝 놀라며 날 쳐다봤다.

“아가씨!”

알도르 경은 복도가 떠날 정도로 크게 소리치며 날 불렀고.

내가 페르데스와 같은 침실을 쓰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뭘 이렇게 놀라는 건지.

게다가 알도르 경은 어떤 상황인지 다 알면서도 놀란다는 게 조금 의아했다.

그라면 내가 왜 페르데스에게 같은 침실을 쓰자고 말했는지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네.

“잠깐만 이리로 와 봐.”

당황해서 멍하니 있던 페르데스는 돌연 내 팔을 잡고 다시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게 은밀하면서도 긴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군말 없이 따라갔다.

자연스럽게 알도르 경과 잭이 따라 들어오려고 하자 페르데스가 단호하게 막아섰다.

“두 사람은 거기 있어.”

쾅, 문 닫는 소리가 요란했다.

페르데스는 닫힌 문을 곁눈질로 흘겨보곤 내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황제가 새로운 감시역을 붙였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새로운 감시역은 붙었죠.”

페르데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누구?”

“2황자요.”

“아.”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체르노서는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체르노서를 감시역으로 쓰기엔 지랄 같은 성격부터 여러모로 문제가 많긴 하지.

“그 자식이라면 당장 수도로 꺼지라고 하면 되잖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제 신분상 그럴 수가 없네요.”

아무리 재수 없고 짜증 난다고 해도 그는 황족이었으니까.

빌어먹을 황가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나는 체르노서에게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할게.”

“2황자가 페르데스 님의 말을 들을까요?”

“…….”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지 페르데스가 입을 다물었다.

“물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어요. 어제처럼 2황자의 화를 돋워서 제 발로 나가게 할 생각이에요.”

“그럼 굳이 같은 침실을 쓸 필요가 없지 않나?”

“만약 2황자가 오늘 안에 나간다면 그렇겠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어제 그렇게 말했는데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걸 봐서 이 계획이 실패할 가능성은 매우 컸다.

“숨어 있는 다른 감시역이 있을 수도 있고요.”

예를 들면 호위 기사처럼 신분을 숨긴 누군가라던가.

리네처럼 배신자가 나올 수도 있고.

“그리고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우리 사이가 여전히 좋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하루 정도는 같은 침실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나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것 같은데,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는지 페르데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싫으시더라도 이번엔 제 말을 따라 주세요.”

“싫은 건 아니야. 그저…….”

“그저?”

페르데스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알도르 경도 그렇고, 페르데스도 그렇고, 사람 궁금하게 왜 다들 말을 하다가 마는 건지.

“그럼 전에 썼던 공동 침실을 쓰면 되겠네. 비밀 통로를 통해서 내 침실로 돌아오면 되니까.”

“아니요. 오늘 밤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저와 같이 공동 침실에서 주무실 거예요.”

“……!”

* * *

“그 이야기 들었어? 아가씨와 페르데스 님이 오늘 밤, 같은 침실을 쓰신대!”

“응, 응! 들었어!”

아델과 페르데스 사이에 있었던 일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공작저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용인들은 틈만 나면 그 일에 대해 떠들어 댔다.

예전에도 아델과 페르데스는 같은 침실을 썼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우선 아델과 페르데스가 같은 침실을 썼을 때, 페르데스의 나이는 고작 16살이었다.

그의 외형은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고.

남자보단 귀여운 동생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거기다 당시 페르데스는 백치였으니,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같은 침실을 쓴다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물론 페르데스가 쑥쑥 성장하면서 남자다운 면모를 보이긴 했지만, 첫인상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계속 그를 어린 동생처럼 생각했다.

그랬던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바뀐 건, 아델이 떠나고 페르데스가 그녀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게 된 이후였다.

거기다 공식으로 성년식을 치르는 모습까지 봤으니, 사람들의 머릿속에 페르데스는 더 이상 어린 동생이 아니었다.

한 명의 어엿한 남자였고, 성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은 침실을 쓴다고 하니 사람들은 흐뭇하게 웃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하녀가 가슴께에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소녀처럼 눈을 반짝였다.

“모름지기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니, 두 분이 오늘을 절대 잊지 못하게 완벽한 첫날밤을 준비해 드려야지.”

“첫날 밤은 아니지 않아? 내가 알기로 약혼식 때 두 분, 이미 첫날밤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동료 하녀의 질문에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하녀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니?”

동료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아니라는 거야?”

“당연히 아니지. 페르데스 님이 공작저에 처음 오셨을 때의 모습을 떠올려 봐.”

그때의 모습을 떠올린 동료 하녀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설령 그때 첫날밤을 보내셨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첫날밤은 아니었을 거야.”

“아, 그렇겠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해?”

“!”

갑자기 메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녀들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메이가 팔짱을 끼고 하녀들을 보고 있었다.

“깔깔 웃는 걸 보니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나도 같이 듣자.”

메이의 말에 하녀들이 흠칫한 건, 그녀가 아침부터 이곳저곳 쏘다니며 사람들의 대화를 훔쳐 듣는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갑자기 나타나 아델의 총애를 받는 게 못마땅했는데, 그런 짓까지 하고 다닌다니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메이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지?”

“맞아. 그냥 잡담하고 있었어. 별것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하하.”

“하, 하하하.”

하녀들은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사라졌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메이는 인기척이 드문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 메이의 어깨를 잡았다.

“……!”

메이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체르노서의 호위 기사가 있었다.

호위 기사는 주변을 쓱 살펴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누지.”

* * *

체르노서를 화나게 만들려고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워 뒀는데, 전부 소용없었다.

당사자인 체르노서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나오게 만들려고 온갖 술수를 부려 봤지만, 체르노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과 여유가 많다면 모를까, 그조차도 아니니 마음이 급해졌다.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얼른 내보내야 하는데.

오늘 내보내지 못하면, 폭설 때문에 약 일주일 넘게 계속 데리고 있어야 했다.

‘그건 절대 안 돼.’

체르노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호위 기사와 일주일 넘게 같은 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어떻게든 막고 싶은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아가씨, 오늘 밤에 좋은 일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방법을 생각하면서 보고서를 확인하던 와중, 넌지시 들어온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관리를 쳐다봤다.

관리의 눈매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 있었다. 실룩거리는 입술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좋은 일은 제가 아니라 남작님에게 있는 것 같은데요.”

“어휴, 저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제가 페르데스 님과 같은 침실을 쓰는 게 남작님에게 좋은 일인가요?”

“물론이죠. 이제 곧 페르데스 님이 공작위를 계승하실 텐데, 두 분의 사이가 돈독해야지…….”

페르데스 님이 공작위를 계승한다.

그 말 이후로 관리가 하는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페르데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일을 잘해 준 덕분에,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내가 공작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사람들의 대부분도 페르데스가 공작이 돼도 상관없다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건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대로 괜찮겠냐는 등의 우려와 걱정,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게 의견을 물어보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답을 보냈냐면…….

똑똑-

불현듯 파고드는 노크 소리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문을 쳐다봤다.

관리가 날 대신 물었다.

“누구지?”

“메이입니다.”

드디어 왔네.

오래 기다렸던 만큼 나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관리에게 말했다.

“보고서는 나중에 가져다줄 테니, 이만 물러가도 좋아요.”

“네, 아가씨.”

관리가 나가고 메이가 들어왔다.

메이는 문이 꼭 닫혀 있는지 확인한 뒤, 책상 너머 내가 앉아 있는 의자까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남자가 제게 접근해서,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 달라고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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