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누구랑 결혼할 것 같냐니.
조금 황당한 질문이었다.
왜 이런 걸 궁금해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가 말없이 빤히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헛기침을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보통 귀족 가문의 영애들은 스무 살이 넘기 전에 결혼하는데 영애는 아직 안 했잖아. 너무 늦으면 혼기를 놓칠 수도 있으니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모든 게 정리가 되면 그때 적당한 남자를 골라서 하려고요.”
결혼을 아예 하지 않는 방향도 생각하고 있지만, 하긴 할 것 같았다.
그래야 후계자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기껏 공작가와 공작령을 지켰는데, 내 대에서 혈통이 끊기는 건 원하지 않았다.
물론 숨겨진 또 다른 핏줄을 찾는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글쎄. 유능한 정보원이 2년 동안 찾지 못한 핏줄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그렇구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페르데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하네스였다.
“마티나 백작이 긴급히 아가씨를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지금 나가지.”
그냥 만나고 싶다고 했으면 아침 식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겠지만, 긴급하다고 하니 일어섰다.
페르데스도 덩달아 일어섰다.
“저만 가도 되니 페르데스 님은 좀 더 드세요.”
“아니야. 다 먹었어.”
다 먹었긴. 수프는 손도 대지 않았고, 빵만 몇 번 뜯어먹었으면서.
내가 그가 남긴 음식들을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머쓱하게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마티나 백작이 기다리잖아. 어서 나가 봐.”
등 떠밀듯이 식당을 나오자, 입구에 서성거리는 마니타 백작이 보였다.
“영애.”
꽤 다급하고 중요한 일인지 마티나 백작이 반색하며 날 반겼다.
그러다 뒤따라 나온 페르데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페르데스는 고개를 까딱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뒤, 반대편 복도로 사라졌다.
나는 아까 그가 말을 하려다 말았던 것과 식사를 다 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티나 백작이 몹시 다급하게 말했다.
“급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리 왔습니다, 영애.”
“일단 응접실로 가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간에 복도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응접실로 향했다.
그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하고 마티나 백작이 내게 물었다.
“혹시 2황자 전하와 다툼이 있으셨습니까?”
순간 그걸 왜 물어보냐고 되물어보려다 그가 체르노서의 보좌관 역으로 따라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대답했다.
“싸우지는 않았어요.”
체르노서가 바보같이 제 발등을 찍은 것에 화가 나서 나간 거지, 싸운 건 아니었다.
내 대답을 들은 마티나 백작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황자 전하께서 왜 그리 화가 나셔서 절 찾아오셨을까요?”
“기분 나쁜 일이 있으셨나 보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랑 다툼이 있으셨던 건 절대 아닙니다.”
“그렇군요.”
떨떠름한 대답이나 날 쳐다보는 시선으로 짐작하건대 마티나 백작은 내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믿지 않는다고 달라질 건 없었지만.
“제게 급히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건 그건가요?”
“아니요. 신년제에 관한 일입니다. 듣자 하니 이번 신년제에 초대를 받으셨다고요.”
“네.”
“그럼 저희와 함께 수도로 가겠군요.”
저희라고?
“2황자 전하께서 저희와 함께 수도로 돌아갈 거라고 백작님에게 말씀하셨나요?”
“네. 그러니 그때까지 이곳에 있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누구 마음대로.
나는 속으로 헛바람을 찼다.
이틀 뒤부터 폭설이 내려 기차뿐만 아니라 마차 운행도 멈추니 그 전에 체르노서를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내보낼 계획이었다.
그래서 아까 일부러 체르노서를 도발한 거였다.
몹시 화가 난 그가 씩씩거리다 알아서 수도로 돌아주길 바라면서.
그런데 체르노서의 행보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는 체르노서는 이런 걸 참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혹시 황자 전하께서 다른 말씀을 하시진 않으셨나요?”
그런데 참는다는 건 필시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의미이니 물었다.
“글쎄요. 그냥 씩씩거리며 화를 내신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요?”
“뭐, 황자 전하께서 뭐라고 말하려고 하시면, 매번 호위 기사가 진정하라고 말리니 말씀을 못 하신 것일 수도 있지만요.”
체르노서가 호위 기사의 말을 들었다고?
오히려 일개 호위 기사 따위가 감히 누구에게 훈계를 하나며 역정을 내야 정상인데?
당황스러웠다. 나는 문득 우리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홀연히 떠난 호위 기사를 떠올렸다.
대부분의 호위 기사들은 작위가 없거나, 있어도 끽해야 자작 정도였다.
그보다 높은 신분의 호위 기사는 보기 드물었고, 대부분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호위 기사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혹시 황자 전하를 따라온 호위 기사가 누군지 아시나요?”
“아니요. 처음 봅니다.”
마티나 백작도 처음 본다고 했으니, 확실히 작위가 없을 텐데.
그런데 페르데스는 물론이고 내게도 인사를 하지 않고 그냥 쓱 지나갔단 말이지.
뭔가 있다. 체르노서가 아닌 그 호위 기사에게.
호위 기사에 대해 좀 더 파헤쳐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마티나 백작이 말했다.
“갑자기 신년제 초대를 받으셔서 당황스럽겠지만, 4황자 전하를 사교계에 알릴 좋은 기회이니 너무 나쁘게 생각지는 마세요, 영애.”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길래 저런 말이 나오는 거지?
황당한 오해였지만, 오해라고 말하면 그럼 뭐 때문에 그러냐고 물어볼 테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마티나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이번 신년제에 황자 전하와 영애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요?”
단순히 페르데스를 사교계에 알릴 기회를 얻는 걸 가지고 좋은 기회라고 하진 않을 테고.
“그게 뭔가요?”
의아해서 묻자 마티나 백작은 아차 싶었는지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걸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말해 주세요, 백작님. 나쁜 일도 아니고 좋은 일인데 말씀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요.”
“으음, 하긴 그건 그렇지요.”
어느덧 응접실에 도착하면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아 하녀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말하려는데, 마티나 백작이 손을 내저었다.
“이것만 말하고 갈 거라 차는 됐습니다.”
“그래요?”
“네.”
마티나 백작은 굳게 닫힌 문과 아무도 없는 응접실을 괜히 한 번 쓱 둘러보더니,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비밀리에 황실 결혼식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지금 뭐라고…….
“황실 결혼식이라고 하셨나요?”
“네.”
마티나 백작이 묘하게 상기된 얼굴을 크게 주억거리며 말했다.
“누구의 결혼식이라곤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 황족 중에 결혼 적령기인 분은 4황자 전하밖에 없지요.”
정확히는 체르노서와 페르데스 밖에 없는 거였다.
이전에는 3황자인 이안도 있었지만, 그는 1년 전에 후작가의 영애와 결혼했으니 제외였다.
“2황자 전하의 결혼식을 준비하시는 것일 수도 있지요. 황후 폐하는 2황자 전하의 모친이니까요.”
“만약 그런 거라면 2황자 전하의 결혼 상대가 진작 나타났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그러니 4황자 전하와 영애의 결혼 준비가 확실합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오래 기다린 두 분에게 큰 선물을 주려고 비밀리에 준비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티나 백작은 뿌듯하게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황후가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면 나와 페르데스의 결혼식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황궁으로 간다면 이전처럼 강제로 붙잡아두고 결혼시킬 것 같아서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폭설 때문에 신년제를 가지 못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그때 결혼했을지도 몰라.
아니면 신년제에서 나와 페르데스가 언제 결혼할 거라고 선포했겠지.
그 장면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마티나 백작과 헤어져 침실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폭설 때문에 우리는 신년제에 참석하지 못하니, 황제가 선포를 하는 건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가 틀어진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긴장됐다.
‘황제가 쓸데없는 짓을 하기 전에 막아야겠어.’
가령 페르데스와의 약혼을 깬다던가.
아니면 전쟁을 좀 더 빨리 일으킨다던가.
후자는 절대 불가능했지만, 전자 역시 쉽진 않았다.
페르데스와 파혼하는 순간 황제는 다른 사람을 들이밀 테니까.
가령 체르노서라던지.
아마 황제도 그걸 계산하고 이곳에 체르노서를 보낸 거겠지.
전쟁도 안 되고, 페르데스와의 파혼도 불가능하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지금 당장 알도르 경을 불러 줘요.”
그 방법을 준비해야 하기도 하고, 체르노서가 데리고 온 호위 기사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알도르 경을 불렀다.
* * *
제국의 기사들은, 특히 황궁에 속한 기사들은 대부분 제국의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그중 성적이 뛰어난 자가 황궁 기사가 될 자격을 얻었으며.
그렇게 황궁 기사가 된 자들 중에서 집안 배경 등 여러 가지 조건과 능력을 보고 괜찮은 이들을 황족 호위 기사로 발탁했다.
즉, 체르노서가 데리고 온 호위 기사 역시 높은 확률로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의미.
그렇다면 같은 아카데미 졸업생인 알도르 경과 공작가의 기사 중에서 그자를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동시에 ‘그 방법’에 대한 준비도 부탁했고.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다던 알도르 경이 집무실에 있는 나를 다시 찾아온 건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내일 보고하려고 했는데, 아가씨께서 아직 집무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잘 왔어요. 그래서 내가 부탁한 건 알아봤나요?”
“네.”
알도르 경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자는 2황자가 아닌 황제, 그것도 ‘아나토메’ 소속이라고 합니다.”
아나토메. 고대어로 ‘절단’이라고 뜻을 가진 이 친위대는 주로 황제의 뜻에 반역하는 자들을 몰래 처리하는 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