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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0/262)

106화

체르노서가 황자로서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면, 페르데스도 황자니 그 점을 내세워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전언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마음이 들지 않아도, 듣기 싫어도 무조건 들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가장 상석에 체르노서가 앉고, 그 곁자리에 나와 페르데스가 마주 보고 앉았다.

사용인들이 우리가 쓸 식기를 세팅하고 음식을 가져오는 동안 나는 물을 마시며 사용인들을 쭉 훑어봤다.

식당에 들어온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체르노서가 아침 식사하러 식당에 온 일을 내게 보고하지 않은 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체르노서가 절대 보고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겠지만, 그래도 했어야 했다.

엄포를 놓은 사실까지 말이지.

‘정리 좀 해야겠네.’

2년 넘게 자리를 비웠더니, 기강이 많이 흐트러졌다.

리네 때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 안 되니 주기적으로 불순해질 수 있는 사용인들을 솎아내는 게 중요했다.

이참에 리네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빵을 찢어먹고 있는 체르노서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의 전언을 말씀해 주시죠, 전하.”

체르노서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뒤, 대꾸했다.

“아침 식사를 끝낸 뒤에 말해드리겠습니다.”

페르데스가 끼어들었다.

“폐하의 전언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우선 전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

체르노서는 못마땅한 눈으로 페르데스를 쳐다봤지만, 맞는 말인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크흠.”

대신 불만이 가득한 헛기침을 뱉은 뒤, 어울리지 않게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그리 긴장하며 들을 필요는 없다. 너에게도, 그리고 레오폴드 영애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나와 페르데스에게 좋은 일?

“우선 이것부터 받거라.”

체르노서가 손을 까딱이자 몇 발자국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가 다가와 페르데스에게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페르데스는 황금색 테두리가 쳐진 초대장의 겉면만 쓱 훑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신년제 초대장이군요.”

“이젠 바로 알아보는구나. 백치 병이 많이 치료가 된 것 같아 형으로서 무척 기쁘다.”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칭찬하는 것 같았지만, 페르데스를 바라보는 눈빛은 싸늘하면서도 경멸의 빛이 가득했다.

체르노서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부황 폐하께서 두 사람을 신년제 파티에 초대했습니다. 황자와 예비 황자비로서 말이죠.”

레오폴드 공작 영애가 아니라 황자비인가.

그리고 초대장에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저도 초대장을 볼 수 있을까요?”

나는 페르데스에게 초대장을 건네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초대장에는 나와 페르데스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그렇게 되는 건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영애?”

“아니요, 아무것도.”

당연히 문제가 있었지만, 체르노서에겐 말할 수 없으니 아무 일도 없는 척 웃으며 초대장을 접었다.

페르데스가 체르노서에게 물었다.

“부황 폐하께서 갑자기 저희를 신년제에 초대하시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신년제는 매년 첫 번째 주 주말에 열렸지만, 페르데스가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초대를 받았으니 페르데스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음.”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는지 체르노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부분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네가 이제 어엿한 성년이 돼서 그런 게 아닐까?”

“성년이 아니더라도 신년제에 참가할 수 있는 거로 압니다만.”

“그렇긴 하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말이야.”

체르노서가 노골적으로 페르데스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걸 비웃듯이 말했지만, 페르데스는 무덤덤하게 ‘그렇군요’하고 대답하며 빵을 뜯어 먹었다.

“…….”

페르데스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체르노서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는 페르데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갑자기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페르데스가 성인이 됐으니, 이제 곧 두 사람 결혼하겠네?”

그 말에 빵을 뜯어 먹던 페르데스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 모습을 본 건 맞은편에 앉은 나밖에 없었다.

“아마 그렇겠죠.”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하면, 나중에 빌미를 잡힐 수 있으니 어물쩍하게 대답했다.

“대답이 이상한데. 확실히 결혼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그러자 체르노서가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정말이지 귀찮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시기가 맞으면 하겠지요.”

여전히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니었고, 이번에도 체르노서는 물러나지 않았다.

“흐응. 그 시기가 언제쯤 맞는데? 봄? 아니면 여름? 아, 여름은 더우니까 역시 가을이려나?”

“……황자 전하께서 제 결혼사에 그렇게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네요.”

“당연히 많지. 만약 페르데스가 영애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내가 영애랑 결혼했을 테니까.”

빵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수프부터 마신다는 누군가의 명언이 떠올랐다.

그렇게 홀대하고, 망신을 줬는데 나와 결혼할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게 신기하기도 했고.

그만큼 레오폴드 공작의 자리가 가지고 싶었다는 거겠지.

페르데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 약혼녀에게 이상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상한 이야기라니. 그냥 과거에 대해 말했을 뿐인데.”

“날조된 과거지요.”

“날조?”

체르노서가 헛웃음을 지으며 페르데스를 노려봤다.

“네가 그때는 바보라서 몰랐던 것 같지만, 나와 영애는 진심으로 마음을 교류했던 사이였다.”

“그런 적 없는데요.”

이번엔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체르노서가 날 돌아봤다.

“지금 나와 있었던 일을 부정하는 겁니까, 영애?”

“황자 전하와 아무 일도 없었으니, 부정할 것도 없지요. 아, 있긴 있었네요.”

나는 살짝 기울인 뺨에 손을 대고 웃으며 말했다.

“예를 들면 푸시크를 상대했던 때라던가…….”

“……!”

체르노서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정없이 구겨졌다.

물잔을 쥔 손이 파들파들 떨리더니.

쨍그랑-

“젠장!”

결국 물잔을 떨어뜨린 체르노서가 거친 욕설을 뱉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간다는 말도 없이 휙,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호위 기사가 묵묵히 따랐다.

그 주인에 그 기사라더니, 체르노서의 호위 기사도 우리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예전에 데리고 왔던 호위 기사들은 나름 예의 발랐는데, 저 남자는 영 별로네.

“통쾌하네.”

페르데스가 체르노서가 사라진 몸을 보며 킥킥 웃었다.

나 역시 동감하며 사용인을 불러 체르노서가 쓴 식기들을 전부 버리라고 말했다.

그의 입 안에 들어갔던 건 그 어느 것도 다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 왜 초대장을 보고 표정이 안 좋았던 거야? 역시 신년제에 가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마음에 걸리는 것?”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 옆자리로 옮겨왔다.

그의 돌발 행동에 살짝 놀라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말했다.

“이러는 편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거라면 사용인들을 물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요.”

“아.”

그제야 그 방법을 깨달았는지 페르데스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시…… 갈까?”

“괜찮아요.”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페르데스를 두고 사용인들을 물렸다.

“그럼 말해 봐.”

넓은 식당에 나와 페르데스, 둘밖에 남지 않으니 평범하게 말해도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밖에서 엿듣는 귀가 있을 수도 있으니, 확실히 이렇게 앉아 작게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좋은 것 같네.

“초대장에 제 이름과 페르데스 님의 이름, 둘 다 적혀 있더라고요.”

“그래? 그게 왜…… 잠깐만.”

페르데스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영애가 예정대로 졸업식을 하고 영지로 돌아오면, 신년제 이후잖아.”

“그렇죠.”

그런데 체르노서를 통해 보낸 초대장에 내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건, 황제가 내가 지금 돌아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내가 졸업식을 치르지 않고, 일짝 영지로 돌아가는 걸 아는 사람은 필로스 왕자와 아카데미 총장과 몇몇 선생님들, 그리고 메이 뿐이었다.

다들 황제와는 연관이 없어 보였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중에 황제가 숨겨둔 첩자가 있을지도.

그래서 내가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걸 일일이 보고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혹시 나, 실수한 거 없겠지?

작은 실수라도 황제의 눈에 띄면 책잡힐 수 있으니 긴장됐다.

그러니 부디 실수한 게 없기를 바라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크고 차가운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였다.

“너무 세게 쥐지 마.”

“아.”

나도 모르게 포크를 세게 쥐고 있었구나.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으면, 손바닥 안쪽에 포크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영애가 실수한 건 없을 거야. 만약 있었다면 황제가 당장 영애를 아카데미에서 데리고 오려고 했을걸.”

그건…… 그렇지.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

페르데스의 다정한 말에 바짝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이 느슨하게 풀렸다.

“고마워요, 페르데스 님.”

“천만에.”

페르데스는 에이드처럼 상큼하게 웃었다가, 초대장을 보고 인상을 팍 썼다.

“신년제는 참가해야겠지?”

“아니요.”

“응?”

내 대답에 페르데스가 의아해하며 날 다시 돌아봤다.

“참가 안 할 거야? 무려 황제가 초대장을 보낸 거라 참가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길 텐데.”

“제가 잘못 대답했네요.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틀 내로 지독한 폭설이 내려서 기차 운행이 약 2주일간 중단될 거예요. 그러니 신년제에 참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죠.”

“그렇구나.”

미래를 예견하는, 다소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페르데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을 믿는 건가요?”

“왜? 믿지 말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보통 이런 건 믿지 않으니까요.”

“그렇지. 나도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믿지 않았을 거야.”

페르데스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날 바라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영애니까 믿는 거야. 영애가 예견한 미래는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아아, 그렇군요.”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하기 어려운 말인지 페르데스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애는 미래에…… 누구랑 결혼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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