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짧은 추모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머리 위로 새하얀 눈이 송이송이 내렸다.
또 눈이 오는 건가. 다행히 많이 쏟아지는 건 아닌 것 같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눈송이가 작아도 시간이 갈수록 커질 수 있으니까.
입구에 서서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을 쳐다보자 우산을 쓰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페르데스였다. 관리인도 그를 발견하고 반색하며 말했다.
“역시 오늘도 오시는군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항상 이 시간에 오셔서…….”
나는 관리인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길 중앙에 적나라하게 남은 내 발자국 옆으로 보폭이 큰 그의 발자국이 큼지막하게 새겨졌다.
“역시 영애였네.”
남은 거리를 단숨에 좁힌 페르데스가 내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이며 물었다.
“부친을 만나러 온 건가?”
“네. 페르데스 님도 아버지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관리인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으로 사실을 듣고 싶어 일부러 물었다.
“응. 나도 오랜만에 레오폴드 공작에게 인사를 드릴까 해서…….”
“관리인에게 페르데스 님이 매일 아침, 아버지의 묘비 앞에 국화꽃을 두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
페르데스는 멈칫하더니 내 시선을 피하며 사과했다.
“미안.”
“제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데, 왜 사과를 하세요.”
“그런가.”
그는 약간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페르데스가 대가를 바라고 이런 일을 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직접 확인하니 더 고마웠다.
“고마워요, 페르데스 님.”
그 마음을 거짓 없이 진솔하게 표현하자 페르데스가 옅게 웃었다.
“천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마워할 필요 없다고 부정했다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담백하게 받아 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자란 페르데스를 올려다봤다.
어제는 발목이 부러질 것 같은 높은 힐을 신고 있어서 몰랐는데, 벗으니 확실하게 키가 큰 게 느껴졌다.
외모도 예전보다 더 수려해졌는데, 다행히 외탁인지 그는 황제를 닮지는 않았다.
황금색 눈동자는 황제와 똑같았지만…… 그건 황족의 특징이니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어릴 때는 색이 약간 흐렸는데, 나이가 들면서 또렷해진 눈동자의 색이 더욱 황제를 연상시켰다.
“…….”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영애?”
그런 내 모습을 본 페르데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대답했다.
“괜찮아요.”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황금색 눈동자에 걱정이 서렸다.
그 눈동자가 날 걱정하는 척하며 결혼을 강요했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이런 상상을 하지 말자고 애써 부정했지만.
두려움과 복수심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으로 얽혀 생긴 환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데.”
페르데스가 내 이마 쪽으로 손을 뻗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
그러자 페르데스가 무척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거뒀다.
당황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손을 피할 생각은 없었는데, 황제를 떠올리다 보니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괜한 오해를 받기 전에 풀어야 해.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 눈이 황제를 닮아서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면 페르데스가 더 상처받을 것 같기도 했고.
나까지 침묵하며 우리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뜻밖에도 관리인이었다.
“날이 많이 추우니 얼른 저택으로 드셔서 따뜻한 아침 식사를 하세요.”
“…….”
그 말에 페르데스는 나를 쓱, 보더니 관리인에게 우산을 건네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으로 가라고 했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관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와 페르데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난 긴 한숨을 내쉬며 관리가 들고 있는 우산을 가져갔다.
“괜찮으니까, 페르데스 님을 따라가 봐.”
“하오나 아가씨…….”
“정말 괜찮으니까 가도 돼.”
관리는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우산을 뒤로 기울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송이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금방 그치는 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그러고 보니 이때쯤, 또 폭설이 내려서 기차 운행이 중단됐었지.
그럼 체르노서가 황궁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 그 전에 그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 * *
페르데스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아침 식사를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가려던 때였다.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게 아닌, 페르데스가 날 찾아온 거라 약간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에요?”
“이거.”
페르데스가 내민 상자 안에는 집무실 열쇠와 가문의 인장이 들어 있었다.
“돌려주러 왔어.”
“이런 건 사용인을 시켜도 됐을 텐데…….”
“그랬다가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까 있었던 일 때문에 그가 직접 올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오더라도 한참 뒤에 오거나, 내가 먼저 찾으러 가는 게 더 빠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먼저 와 주다니.
고마우면서도 그를 황제와 겹쳐 생각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혹시 지금 바빠요?”
역시 제대로 된 설명을 하고, 사과를 해야겠어.
“바쁘지 않다면 같이 아침 먹을래요?”
내 제안에 조금 놀란 듯 페르데스가 날 바라봤다.
참, 그러고 보니…….
“지금 아침 훈련 시간이죠?”
페르데스는 내가 아카데미로 떠난 후에도 알도르 경에게 계속 검술 훈련을 받고 있었다.
워낙 재능이 없어 실력이 느는 속도가 굉장히 더디긴 하지만, 2년 넘게 꾸준히 노력한 덕분에 기초는 다 뗐다고 들었다.
하여간 아침 훈련 시간인데 그가 여기에 온 건 이걸 가져다주기 위해서일 터.
“얼른 가 봐요.”
페르데스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심지어 몸이 아플 때도 아침 훈련을 빠지지 않고 갔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빠지는 건 말이 되지 않아, 등 떠밀듯이 말하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같이 아침 식사하지.”
“하지만 아침 훈련 가셔야 하잖아요.”
“하루 정도는 빠져도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
미심쩍어하며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내 팔을 잡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뗐다.
“미안. 나도 모르게 잡았네.”
아까 내가 무심결에 그의 손을 피했던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일 터.
괜찮은 척 웃고 있지만, 역시 상처를 받았구나.
하긴 나라도 상처받을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끌어안듯이 딱 달라붙어 춤을 췄던 상대가 갑자기 자신을 피하는데 상처받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나 때문에 생긴 오해이니 내가 푸는 게 맞았다.
“괜찮아요.”
단순히 말로만 표현하는 것보다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의 손을 잡았다.
혹시 그가 거부감을 느끼거나 싫다면 뿌리칠 수 있게 아주 살며시.
“…….”
페르데스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사이에 그의 손을 끼워 넣어 깍지를 끼며 웃었다.
“배고플 테니 이만 아침 먹으러 갈까.”
* * *
인장과 열쇠를 계속 들고 다니는 건 위험하니 침실에 둔 뒤, 나는 페르데스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늦게 왔네.”
그러자 상석에 떡하니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체르노서가 보였다.
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체르노서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터라 나는 약간 당황하며 그를 쳐다봤다.
페르데스는 눈에 띄게 싫은 티를 풀풀 내며 체르노서에게 물었다.
“형님이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페르데스가 형님,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자 잠깐이지만 체르노서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체르노서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치 내가 못 올 곳을 온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혼자 식사하시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셔서 물어본 겁니다.”
“뭐?”
노골적인 도발에 체르노서가 역정을 냈다.
그의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식당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자 사용인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두 분, 모두 그만 하세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고, 두 사람이 싸우면 애꿎은 사용인들이 피해를 입을 테니 중재했다.
“식사는 방에서 할 테니, 방으로 가져오렴.”
체르노서와 얼굴을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싶지 않아,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체르노서가 이기죽거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구태여 방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뭡니까, 영애. 혹시 내가 불편해서 그러는 겁니까?”
그러자 페르데스가 입술을 비틀며 체르노서에게 반문했다.
“잘 알고 계시면서 구태여 물어보는 이유가 뭡니까?”
“너 이 자식…….”
체르노서는 발끈하며 뭐라 말하려다, 이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식탁을 엎고도 남았을 텐데, 철이 든 건가.
유학 가서 사고를 치고 반년 만에 돌아온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만 나가지, 영애.”
“가긴 어딜 가?”
페르데스가 내 어깨를 감싸고 돌아서려고 하자 체르노서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할 말이 있으니 앉아.”
“전 형님과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와중에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정말로 체르노서를 형님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닌 그를 화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페르데스가 형님이라고 말할 때마다 체르노서의 미간 사이 간격이 점차 좁아지기도 했고.
하지만 인내하는 법을 배운 건지, 체르노서는 화를 내지 않고 대신 억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래도 앉아야 할걸? 지금부터 내가 말할 건, 부황 폐하의 전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