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페르데스는 연기 실력과 임기응변뿐만 아니라 춤과 화술도 많이 늘었다.
특히 화술이 많이 늘었는데, 내가 알던 그 페르데스가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는 대화를 매끄럽게 주도했다.
그렇기에 놀라우면서도 불안한 건, 페르데스가 그사이 다른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역시 빨리 가문의 인장과 집무실 열쇠를 돌려받아야겠어.
페르데스는 내일 아침에 주겠다고 했지만,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달라고 하려는데 페르데스가 물었다.
“같이 아카데미에 갔던 그 하녀는 보이지 않네.”
“메이라면 본관에서 쉬고 있어요.”
혹 페르데스의 성년식 연회에 늦을까 봐 일정을 촉박하게 온 터라 무척 힘들 테니 일주일간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라고 일러두었다.
물론 그사이에 황제 측에서 연락이 오면 나한테 즉시 전달하라고 말했고.
메이 이야기를 하니 자연스럽게 리네가 떠올랐다.
“전에 리네를 알아서 잘 처리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신 건가요?”
줄곧 궁금했던 사실을 묻자 페르데스가 다른 걸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 성년식인데, 빈손이네? 선물은 없는 거야?”
말해 줄 수 없다는 거구나.
집요하게 물어봤자 페르데스가 말해 줄 리가 없을뿐더러, 내가 직접 알아보면 되니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당연히 있죠.”
“오?”
페르데스가 기대된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웃으며 지나가는 하인에게 준비해 둔 것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하인이 약간 길쭉한 선물 상자를 가져왔다.
“여기요.”
“지금 풀어 봐도 돼?”
“물론이죠.”
페르데스는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선물 상자를 풀었다.
곧 선물 상자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페르데스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이건…… 마나 펜이잖아.”
마나 펜이란 말 그대로 마나가 깃든 펜으로, 저걸로 마법진을 그리면 마나가 없어도 간단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즉, 페르데스처럼 마나를 느끼진 못하지만, 마법 이론을 잘 알고 있는 마조사들을 위한 물건이었다.
“이거 비쌀 텐데…….”
“조금 비싸긴 했죠.”
“조금이 아니잖아. 이 펜 하나가 웬만한 저택 가격과 맞먹는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다고.”
모를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알고 있구나.
“그래도 페르데스 님에게 그 펜을 꼭 선물해 주고 싶었어요.”
페르데스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에 아쉬워하는 내용을 볼 때마다 저 펜을 선물해야겠다는 마음은 점점 확고해졌다.
내 대답을 들은 페르데스의 표정이 약간 흐려졌다.
페르데스가 펜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건 너무 비싼 물건인데…….”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 거 하나 선물하지 못할 만큼 레오폴드 공작가가 가난하지도 않을뿐더러 오늘은 단 한 번뿐인 성년식이잖아요.”
성년식은 그 어떤 생일보다 가장 뜻깊고 의미 있는 날이었다.
가장 축복받아야 하는 날이기도 했고.
“그리고 페르데스 님이 그동안 고생하신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말을 하니 잠시 잊고 있었던 불안감과 조바심이 기어 올라왔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은 것 때문에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꾹꾹 눌렀다.
“오히려 더 좋은 걸 해 드리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뿐이니, 부디 부담 가지지 말고 받아 주세요.”
“……영애가 그렇게 말한다면.”
여러 감정이 얽혀 복잡했던 얼굴이 한순간 단순해졌다.
얼굴에 순수하게 기쁨만 남긴 페르데스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정말 고마워, 영애.”
“천만에요.”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저 펜을 선물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이 생각이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 * *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성년식 연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페르데스는 잠잘 준비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아델이 준 마나 펜을 계속 쳐다봤다.
그 시선이 어찌나 진지하고 강렬한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펜과 원수를 진 것처럼 보였다.
“왜 펜이랑 싸우시는 거예요, 페르데스 님?”
잭 역시 그렇게 느끼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제야 펜과의 눈싸움을 끝낸 페르데스가 약간 뻐근한 눈덩이를 지그시 누르며 대답했다.
“싸우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거였어.”
“무엇을요? 펜을 처분하는 것을요?”
“그럴 리가 있냐. 저건 가보로 삼아서 대대손손 물려줘야 하는데.”
“어, 그러니까 저 펜을 레오폴드 공작가의 가보로 삼으신다는 거죠?”
그 말에 페르데스는 멈칫했다.
아델과 페르데스 사이의 계약을 모르는 잭은 그가 레오폴드 공작이 될 거라고 알고 있으니, 저런 오해를 하는 건 당연했다.
페르데스가 멈칫한 것도 잭의 질문이 아닌 그가 뱉은 말 때문이었다.
가보로 삼아서 대대손손 물려줘야 한다는 말.
그 말인즉, 결혼해서 자손을 본다는 의미인데 아델을 만나기 전까지 페르데스는 독신주의였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가정을 꾸려 그 가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라웠고.
동시에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델과 결혼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경악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야.”
아델과 자신은 계약 약혼한 것으로, 이 약혼의 끝은 결혼이 아닌 파혼이었다.
아델이 말한 계약 기간은 그가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였으니, 그 계약 기간도 이제 끝이었다.
내일 당장이라도 그토록 바라던 대륙 여행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데…… 왜 기쁘지 않은 걸까.
“괜찮으세요. 페르데스 님?”
페르데스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잭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잭의 걱정조차 귀찮아서 페르데스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에게 이만 나가 보라고 말했다.
잭이 나가고, 혼자 남은 페르데스는 다시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에 대해 고민했다.
“……생일.”
이제 곧 아델의 생일인데 그걸 챙겨 주지 못하고 나가는 게 아쉬워서 기쁘지 않은 거야.
그래, 그런 걸 거야.
안 그래도 아델에게 너무 좋은 선물을 받아서, 어떤 걸로 답례를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니 그런 거라고 결론을 지은 페르데스는 아델에게 생일 선물로 뭘 해 주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 * *
나는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원래 잠이 없는 편이기도 하지만, 조기 졸업을 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천재라서 쉽게 월반하고 조기 졸업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기도 했고.
“…….”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5시.
아카데미에서 길들어진 습관 때문에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2시간 정도는 더 자도 괜찮았지만, 이미 잠이 달아난 터라 그냥 일어섰다.
일어난 김에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나기도 했고.
검은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본관을 나선 내가 향한 곳은 아버지를 비롯한 역대 레오폴드 공작가의 사람들이 잠든 곳이었다.
잠든 사이에 눈이 내렸는지, 길에 푹신푹신한 새하얀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 위에 내 발자국을 새기며 목적지에 도착하자, 눈을 치우고 있던 관리인이 깜짝 놀라며 내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들어가도 되지?”
“물론입니다. 국화꽃을 가져다드릴까요?”
“그래. 아버지의 묘비에 먼저 가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가져다줘.”
“네, 아가씨.”
관리인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묘비는 비교적 최근에 돌아가셨기에 가장 앞에 있었다.
그 위에는 이미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어제 성년식 연회에 참석한 귀족 중 누군가가 내려놓은 모양이네.
오랜만에 아버지의 묘비를 보니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날 두고 떠나신 것에 대한 야속함 등 온갖 감정이 복합적으로 밀려왔다.
곧 관리인이 올 텐데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정을 조절했다.
다른 건 몰라도 슬픔을 억지로 삼키는 건 자신이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잠시 후, 도착한 관리인이 커다란 국화꽃다발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아버지의 묘비 앞에 내려놓으며 관리인에게 물었다.
“누가 저 국화꽃을 가져다 뒀지?”
마티나 백작을 비롯해서 여러 귀족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연히 그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페르데스 님이 가져다 두셨습니다.”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거론됐다.
나는 약간 놀라며 관리인에게 되물었다.
“정말로 페르데스 님이 저 꽃을 가져다 둔 건가?”
“네. 그리고 페르데스 님이 선대 공작 각하의 묘비에 꽃을 가져다 두신 건 어제뿐만이 아닙니다.”
관리인이 뿌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아카데미로 떠나신 뒤, 매일 아침 찾아오셔서 국화꽃을 놓고 가셨습니다.”
“정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반문하자 관리인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물론입니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직접 묘비를 닦기도 하셨어요.”
“…….”
“물론 그런 잡일은 제가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직접 하고 싶다며 끝까지 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페르데스는 왜 이런 일을 한 걸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째서?
“저도 이유가 궁금해서 무례를 무릅쓰고 페르데스 님에게 살짝 물어봤습니다.”
궁금했는데, 다행히 관리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뿐인 딸인 아가씨께서 공작저를 떠나셔서 공작 각하께서 외로우실 테니, 자신이라도 그 외로움을 달래 드리고자 매일 찾아오시는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