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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98/262)

103화

페르데스가 한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내가 연합 왕실 아카데미에 갔던 것처럼 긴 시간 공작령을 떠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 의지로는 말이지.

그러니 이전처럼 페르데스와 편지를 주고받는 일도 분명 없어지는 게 맞는데…… 이상했다.

그도 영원히 레오폴드 공작령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애초에 내가 페르데스에게 제안한 계약 기간은 2년 남짓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공작위를 받기 위한 초석인 기사 작위를 딸 때까지였고, 그 기간은 이미 지났다.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기사 작위도 땄고.

그러니 페르데스가 홀연히 떠난다고 해도 그를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날 대신해서 힘써 준 걸 감사하게 여기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런 뉘앙스를 풍기니 당황스러웠다.

혹시 지난 2년 동안 레오폴드 공작가를 다스리면서 권력에 욕심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권력은 마약과도 같아서 한번 맛보면 중독돼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혹시 페르데스가 그렇데 된 경우는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이제 와 공작위에 욕심이 나서.

그래서 날 배신하고 황제의 편에 붙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가문의 인장을…… 돌려받아야겠어요.”

가슴 속에 차오르는 불안감과 두려움은 조바심을 불러일으켰다.

“집무실 열쇠도 돌려주세요.”

“그래. 내일 돌려줄게.”

“지금, 당장 돌려주세요.”

페르데스가 말하는 내일은 아무리 빨라도 아침일 게 분명하니 10시간도 넘게 남았다.

그동안 무슨 일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간이기에 당장 돌려받고 싶었다.

그러자 페르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구겨지는 그의 표정을 보니 불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왜 그러시죠? 혹시 인장과 열쇠를 제게 돌려주기 싫으세요?”

“응.”

단호하게 나온 대답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페르데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일벌레라고 해도 긴 여정에서 돌아오자마자 일할 필요는 없잖아. 거기다 오늘은 내 성년식이기도 한데…….”

……내가 착각한 건가?

지금 페르데스의 말과 표정을 보면 그런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연기 실력이 뛰어났으니까.

날 속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좀처럼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날이 밝자마자 바로 열쇠랑 인장을 가져다줄 테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

“진짜야. 정말로 가져다줄게.”

그러니 조금만 참으라며 페르데스가 어린아이 달래듯이 말했다.

“……그래요.”

여전히 불안했지만, 동시에 그를 믿고 싶었다.

페르데스는 지난 2년간 날 대신해서 영지를 잘 다스려준 고마운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당장 집무실 열쇠와 가문의 인장을 돌려달라고 펄펄 날뛰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일단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아가씨.”

“알도르 경!”

그곳에는 알도르 경이 붉은색 기사단 제복을 입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알도르 경이 반가워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보다시피요.”

“알도르 경.”

페르데스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왜인지 그의 목소리에 언짢음과 불만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경비하느라 바쁜 사람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지?”

알도르 경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가씨가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두 사람…… 여전히 사이가 안 좋구나.

지난 2년 동안 서로를 돕고 일하면서 조금은 사이가 가까워질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이가 나쁜 거지?

크게 싸우기라도 한 건가?

나는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알도르 경이 옅게 웃으며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셔서 진심으로 기쁩니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알도르 경이 내 손을 살포시 잡고 손등 키스를 하려는 그때.

휘익-

“……!”

페르데스는 마치 사냥감을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알도르 경에게 잡힌 내 손을 재빠르게 잡아채 갔다.

이에 나는 물론 알도르 경도 당황하며 그를 쳐다봤지만, 페르데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랜만에 춤추자.”

오히려 황금색 눈동자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안 그래도 내 성년식 연회니 춤을 한 번은 춰야 한다고 주변에서 성화였는데 잘 됐다. 나랑 춤추자.”

“연회가 시작된 지 꽤 됐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으신 거예요?”

“응.”

“혹시 아직 이성이랑 춤을 추는 게 어색하세요?”

전에 페르데스가 그랬던 게 떠올라 묻자 그가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영애는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잘 튀는 것 같아.”

“아닌가요?”

“아니야. 애초에 난 이성이랑 춤을 추는 걸 어색하게 생각한 적 없어.”

“네? 하지만 전에…….”

그러지 않았냐고 말하려는데 열린 테라스 문을 통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데스가 내 손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음악 시작했다. 어서 가서 춤추자.”

나는 엉겁결에 그를 따라가다가 문득 알도르 경을 돌아봤다.

알도르 경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에게 버림을 받은 커다란 개처럼 안쓰러워 보여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보지 마.”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페르데스의 커다란 손에 차단됐다.

돌아보자 마찬가지로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못 본 사이에 훌쩍 더 커버린 페르데스는 이젠 확실하게 강아지보다 개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그러나 작고 왜소했던 시절부터 봐서 그런지 내 눈엔 아직도 강아지처럼 보였다.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나만 봐 줘.”

이런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싫진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고 웃음이 나온다고나 할까.

아까 그에게 느꼈던 불안과 의심이 뜨거운 태양 아래 눈이 녹아내리듯이 싹 사라졌다.

“그래요.”

오늘은 그의 생일이니까.

그것도 성년식이니까 원하는 대로 해 주자고 생각하며 그와 함께 홀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 * *

레오폴드 공작령이 대륙의 북쪽 끝자락에 있다 보니 페르데스의 성년식에 참석한 귀빈 중 대다수가 공작저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그중에 체르노서도 있었는데, 별채에 머무는 다른 귀빈들과 달리 황족인 그는 본관에 머물렀다.

현재 공작저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연회장을 나와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본관으로 돌아온 체르노서는 그의 방이 있는 3층으로 향했다.

그 뒤를 마티나 백작과 호위 기사가 따랐다.

왜인지 비장한 얼굴로 앞만 보고 걸어가던 체르노서는 그의 방 앞에 도착하자 마티나 백작을 돌아봤다.

“오늘은 다른 걸 하지 않고 푹 쉴 생각이니 이만 돌아가 봐도 좋습니다, 마티나 백작.”

“예. 혹시 제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주십시오, 전하.”

마티나 백작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난 뒤, 그 자리를 공작저에서 그의 시중을 담당하기로 한 하인이 채웠다.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그래. 그 전에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은데.”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황자 전하.”

하인까지 물러나자 조용히 곁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가 다가와 둘둘 만 종이를 내밀었다.

“…….”

체르노서는 말없이 그 종이를 받아 펼쳤다.

종이에는 레오폴드 공작저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곳곳에 새겨진 숫자는 경비가 순찰하는 시간이었다.

호위 기사가 공작저 1층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구와 출구는 빈틈없이 계속 지키고 있고, 각 층 순찰도 30분에 한 번씩 돈다고 합니다.”

“새벽에도?”

“네.”

“다들 잠이 없나.”

체르노서는 귀찮게 됐다는 듯 혀를 차며 지도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방에서 목표 지점까지 가는 길을 훑고, 머릿속으론 시뮬레이션을 그렸다.

“들키지 않으려면 타이밍을 잘 맞춰서 들어갔다가 나와야겠네.”

목표 지점까지 가는 길에 들키는 건 그나마 나았다.

잠이 오지 않아서 산책 중이었다거나, 길을 잃었다는 등 변명을 댈 수 있으니까.

문제는 그곳에서 다시 방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황제, 다이몬이 부탁한 물건을 몰래 가지고 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특히 다이몬이 또 실패했냐며, 천하의 쓸모없는 놈이라고 노발대발할 게 분명하니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

문제는 성공하려면 경비를 뚫는 등 여러 가지 난관을 거쳐야 한다는 거였다.

그중 체르노서가 생각하는 가장 큰 난관은 가져와야 할 물건이 뭔지 전혀 모른다는 거였다.

다이몬은 단순히 장소만 알려주며 그곳에 있는 유일한 물건을 가져와 달라고만 말했었다.

그리고 그의 직속 호위 기사를 붙여주었지.

“물건의 크기가 얼마나 된다고 했지?”

“그 부분에 대해선 정확하게 들은 게 없지만, 전하께서 충분히 가지고 오실 정도는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정말로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왠지 후자인 것 같아 체르노서는 흘끗 호위 기사를 쳐다봤다.

마음 같아선 사실대로 말하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다이몬이 아끼는 호위 기사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다 황자인 내가 한낱 호위 기사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건지.’

체르노서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둘둘 말아 호위 기사에게 돌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황자 전하.”

그 직후, 목욕 준비와 함께 차를 가지러 갔던 하인이 돌아왔다.

“이만 물러가 봐.” 

체르노서는 호위 기사를 물리고, 몸을 녹이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도대체 황제의 목적이 뭔지.

황제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물건을 몰래 가져서 뭘 하려는 건지.

그리고.

“황자, 폐하께서 레오폴드 공작가에서 가져다 달라고 한 물건이 뭔지 알게 되면 이 어미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세요.”

과연 모친인 황후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지 내적 갈등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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