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아델이 연합 왕실 아카데미로 떠난 뒤.
페르데스가 그녀의 역할을 대신 수행했지만, 사교 활동을 하거나 공식적인 석상에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차기 레오폴드 공작이 될지도 모르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초대장을 보냈지만,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아델과 함께 랑쇼 후작 영애의 데뷔탕트에 잠깐 얼굴을 비춘 게 전부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귀족의 대부분은 페르데스의 백치병이 완전히 고쳐졌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레오폴드 영애가 4황자한테 멀쩡한 척 연기하라고 한 거겠죠.”
“맞아요. 4황자가 머리는 텅텅 비었어도 생긴 건 말끔해서 입 다물고 있으면 정상인처럼 보이잖아요.”
“그나마 두 사람의 사이가 좀 좋아 보였는데, 아델 레오폴드가 연합 왕실 아카데미로 홀라당 도망간 걸 보니 그것도 아닌가 봐요.”
뜬소문처럼 퍼지던 두 사람의 불화설은 페르데스의 성년식 연회 당일이 되자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아델 레오폴드가 단 한 번뿐인 성년식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건 물론이고 축하 선물이나 편지 같은 것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때 아델의 유력한 결혼 상대였던 체르노서가 성년식 연회에 참석했으니, 이목은 더욱 쏠렸다.
귀족들은 체르노서가 페르데스에게 폭언을 쏟아 내자 교양이 없다고 혀를 차면서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다들 체르노서처럼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해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저기 봐. 아델 레오폴드 영애가 왔어.”
“진짜 레오폴드 영애야.”
그랬는데 아델이 등장하자 귀족들은 하나같이 놀라며 그녀를 쳐다봤다.
제 눈을 의심하며 비비는 이들도 있었다.
쏟아지는 시선과 들려오는 말에도 아델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페르데스와 체르노서를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아델이 지척까지 다가와도 눈치채지 못했다.
또각-
“늦지 않게 도착한 것 같아 다행이네요.”
“!”
아델이 높은 굽 소리를 내며 말을 건넨 후에야 비로소 그녀가 온 걸 알아챈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아델을 돌아봤다.
아델은 체르노서 쪽으론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올곧이 페르데스만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성년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페르데스 님.”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 떠도는 두 사람의 불화설이 거짓이라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페르데스를 꼭 끌어안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델의 등장에 놀란 페르데스는 처음에는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고마워, 아델.”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델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의 모습에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시커먼 기름처럼 돌아다니던 불화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못 본 사이에 연기 실력이랑 임기응변 실력이 많이 늘었네.
내심 그가 놀라서 아무것도 못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어색하지 않게 이름까지 부르며 다정한 연인 행세를 해 준 덕분에 그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
한 명은 그대로였지만.
페르데스의 품을 빠져나온 나는 체르노서를 쳐다봤다.
유학 간 곳에서도 큰 사고를 쳐서 쫓겨나듯이 귀국한 황자를 이곳에 보내다니.
황제가 얼마나 페르데스를 무시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2황자 전하도 계셨군요.”
내가 그제야 그를 발견했다는 듯 인사를 건네자 체르노서가 입매를 비틀었다.
“영애의 눈에는 이 녀석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물론이죠.”
나는 페르데스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페르데스 님은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이니까요.”
“어머나!”
내 말에 주변 귀족들은 감탄사를 터뜨렸고.
“하!”
체르노서는 몹시 기가 찬다는 듯 헛바람을 찼다.
“…….”
그리고 페르데스 역시 무척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먼저 다정한 연인인 척 연기해 놓고, 뭘 이리 놀라는 건지.
내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페르데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언뜻 드러난 그의 귓불이 붉었다.
내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서 부끄러운 모양이네.
그 모습이 귀여워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분의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니, 전부 거짓말이었군요.”
“전 처음부터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레오폴드 영애는 다른 황자 전하들을 두고 4황자 전하를 딱 선택하셨잖아요.”
“맞아요. 그땐 백치병이 발발한 상태라 다들 4황자 전하를 꺼렸는데…….”
“두 분께선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시는 거죠.”
이로써 불화설은 완전히 잠잠해진 건가.
이러면 황제가 페르데스 말고 다른 황자들을 결혼하라고 들이밀지 않을 테니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백치병은 한 번 발발하면 낫기 힘들다고 하더니 4황자 전하는 다 나은 것 같네요.”
“흔히 사랑의 힘으로 기적도 일으킨다고 하잖아요.”
“아아, 하긴. 그렇긴 하죠.”
사랑의 힘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체르노서를 쳐다봤다.
그사이 감정을 수습했는지 체르노서의 표정이 평온했다.
좀 더 무너지는 걸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그의 표정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여러 가지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어야지.
체르노서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으니까.
폭탄을 터뜨리면 상대뿐만 아니라 나 역시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맞았다.
달리 할 일이 있기도 했고.
“그런데 두 분, 제가 오는 줄도 모르고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나게 나누고 계셨나요?”
폭탄을 지금 터뜨릴 생각은 없었지만, 치우기는 해야 할 것 같아 웃으며 체르노서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체르노서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대답했다.
“딱히 특별한 대화를 나눈 건 아닙니다. 그저…….”
“두 분께서 오랜만에 만나셔서 잠시 회포를 풀고 계셨습니다.”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해 주춤하는 체르노서를 대신해서 그를 보좌하기 위해 따라온 귀족이 말했다.
내가 쳐다보자 귀족이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뵙는 군요, 레오폴드 영애. 4황자 전하와의 약혼식 이후 처음이지요?”
손등 키스를 하기 위해 손을 달라는 거였지만, 나는 모르쇠 하며 악수를 했다.
“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마티나 백작님?”
그러자 마티나 백작이 약간 놀라며 날 쳐다봤다.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마티나 백작이 체르노서를 보좌하기 위해 따라올 줄이야.
내가 알기로 마티나 백작은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 귀족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체르노서를 보좌하고 있는 거지?
황제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거라면, 왜 그런 명령을 내린 걸까?
그리고 마티나 백작의 앞에서 호되게 망신을 당했던 체르노서가 마티나 백작이 보좌관으로 따라오는 걸 받아 준 것도 이상했다.
모든 것이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백작님께서 2황자 전하와 함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뭔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마티나 백작이 티끌 하나 없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다 보니?”
“네. 황자 전하께서 보좌관 한 명 없이, 호위 기사만 대동하고 오셨길래 제가 보좌하게 된 겁니다.”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데.
공식적인 일정이 아니니 보좌관을 대동하지 않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체르노서이다 보니 이상하게 느껴졌다.
황제가 진짜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인 그를 안전장치 하나 없이 밖에 내보냈을 리가 없으니까.
애초에 마티나 백작을 보좌관으로 낙점 짓고 왔거나,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다는 건데.
왠지 후자인 것 같아 나는 체르노서의 표정을 살폈다.
아주 드물게 체르노서가 귀신처럼 표정 관리를 잘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하필 지금이라니.
“그렇군요.”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마티나 백작과의 안부 인사를 마무리 지었다.
그와 더 대화를 나눠 봤자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티나 백작은 몇 발 뒤로 물러나 체르노서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자 전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체르노서를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뛸 걸 직감하고 충언한 것이다.
“진심으로 성년식을 맞이한 걸 축하한다, 페르데스. 멋진 성인이 되길 바라지.”
체르노서도 그게 좋겠다고 판단했는지 의례적인 인사말을 뱉고 마티나 백작과 훌쩍 떠났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페르데스가 여전히 잡고 있는 내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잠시 시간을 내 줄 수 있을까?”
그래, 눈빛을 보니 정말 할 말이 많아 보이긴 하네.
“네.”
나 역시 할 말이 많은 건 마찬가지인지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테라스로 나왔다.
보는 눈이 많은데 대놓고 테라스 문에 귀를 대고 엿듣는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페르데스에게 못다 한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내신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에요, 페르데스 님.”
“……영애야말로.”
페르데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황금색 눈동자에 나를 가두며,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3주 넘게 답장이 오지 않길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는데, 무탈해 보여서 다행이야.”
“졸업 준비 때문에 조금 바빴어요.”
어차피 성년식 연회에 참석할 건데 굳이 답장을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내 대답에 페르데스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에 불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내가 답장을 해 주지 않아서 많이 걱정했던 모양이네.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페르데스 님을 걱정시키지 않게 꼭 답장을 보낼게요.”
“……아니.”
그걸 원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는지 페르데스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거잖아.”
그리고 슬쩍 내 손을 잡으며 아까보다 조금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떠나지 않을 테니까…… 답장 같은 건 보내지 않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