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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96/262)

101화

“영애.”

며칠 동안 펑펑 쏟아진 눈이 소복하게 쌓인 이른 아침.

오랜만에 몸을 풀기 위해 연무장으로 가고 있는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못 본 사이 훌쩍 커 버린 필로스 왕자가 보였다.

그 뒤에 로고스 교관도 보였다.

아니, 1년 전에 교관직을 그만두고 필로스 왕자의 전속 호위 기사가 됐으니 교관이 아니라 로고스 경이라고 불러야겠지.

“지금 한창 바쁠 시기일 텐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전하.”

필로스 왕자가 국왕이 되는 데 기사 작위는 딱히 필요 없었다.

오히려 이 중요한 시기에 아카데미에 박혀 있는 건, 시간 낭비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지지하기로 결정을 내리자마자 당장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왕국을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갑작스러운 내 요청에 필로스 왕자는 황당해하면서도 첫 번째 약속대로 군말 없이 따랐다.

그렇게 왕국으로 돌아간 왕자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 이것저것 지시하면서 왕국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방지하게 했다.

처음에는 다들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필로스 왕자가 계속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자 사람들은 조금씩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특히 필로스 왕자의 지휘 아래, 대륙 전체가 힘들어하는 대흉년까지 훌륭하게 이겨 내면서 그가 차기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목소리를 등에 업은 필로스 왕자는 꾸준히 자국 귀족들과 인맥을 쌓고, 연합국에 속한 다른 왕국과도 친분을 돈독하게 다졌다.

물론 이 모든 것도 내가 지시한 대로 한 거였다.

귀족이나 다른 왕국과 친분을 다질 때 들어가는 자금 역시 대부분 내가 지원해 줬다.

그 결과, 친형인 알렉스 왕자를 제치고 필로스 왕자가 왕세자가 되었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반란이라는 가장 큰 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국왕의 처남이자 2왕비의 친동생인 네이크로 후작이었다.

네이크로 후작은 그의 조카인 3왕자를 앞세워 아르티나 왕국을 집어삼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왕이 암살당하는 등 왕국은 큰 타격을 입었고, 연합국 내 왕국 순위에서도 밀려났다.

그러니 나는 필로스 왕자에게 긴장의 끈을 절대 풀지 말고, 반란에 준비하라고 했었다.

그 일로 한창 바쁠 그가 아카데미에 있으니 의아했다.

“설마 문제가 생긴 건가요?”

혹시 네이크로 후작이 벌써 내분을 일으킨 건가?

기억대로라면 못해도 반년 뒤에 일어나야 하는데?

걱정돼서 묻자 필로스 왕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영애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좋은 소식이요?”

“네. 네이크로 후작의 덜미를 잡았습니다.”

지금 뭐라고…….

“모두 영애 덕분입니다. 영애가 네이크로 후작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언질을 준 덕분에 큰 분란이 일어나기 전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필로스 왕자의 이야기만 들어 보면 좋은 일이었지만, 마냥 좋아할 수가 없는 건 반란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르티나 국왕이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럼 필로스 왕자가 국왕이 되지 못할 테고, 제국과의 전쟁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의미이니 그 사실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자, 필로스 왕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영애가 바라는 건 이뤄 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바라는 걸 이뤄 준다고요?”

“네.”

새하얀 눈 위에 선명하게 찍힌 내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새기며 성큼 다가온 필로스 왕자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건 금색 테두리가 쳐진 초대장이었다.

붉은 실링 왁스 위에는 아르티나 왕국의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뭔가요?”

“확인해 보면 압니다.”

씩, 웃는 얼굴이 의미심장했다.

도대체 뭐길래 이러는 거지.

나는 의아해하며 초대장 열어 확인했다.

초대장을 열자마자 대관식이라는 세 글자가 눈에 박혔다.

그 밑에 필로스 왕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초대장은…….

“국왕 전하께서…… 왕자 전하께 선위를 약속하신 건가요?”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필로스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약속한 게 아니라 그러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초대장에 적힌 대로 다가오는 2월이 제 대관식입니다.”

아, 다행히 그가 국왕이 되는구나.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걸 아쉬워했던 내가 부끄러워 볼을 붉혔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영애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죠.”

필로스 왕자는 잠시 주저하더니 내게 물었다.

“전 영애가 제 대관식에 와 주었으면 하는데……. 그래 줄 수 있습니까?”

“저 역시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내가 필로스 왕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건 대외적으로 비밀이었으니까.

황제가 날 축하 사절단에 넣어 준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갈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필로스 왕자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가, 곧 기운을 차리고 내게 말했다.

“영애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포인세티아 졸업을 한다고요.”

6월이 아닌 12월에 졸업하는 걸 12월에 피는 꽃의 이름을 따서 포인세티아 졸업이라고 불렀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고작 2년 반 만에 졸업하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영애.”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니요. 이건 운이 아니라 실력입니다. 영애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제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필로스 왕자는 그리 말하며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건 제가 드리는 졸업 선물입니다.”

상자 안에는 커다란 루비 주변으로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힌 브로치가 있었다.

졸업 선물치고는 상당히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비싼 거 아닙니다.”

이렇게 비싼 건 받을 수 없다고 말하려는데, 필로스 왕자가 먼저 선수 쳤다.

“영애에게 도움받은 것도 많고 해서 드리는 거니, 부디 부담 가지지 말고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애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간곡하게 부탁하니, 어쩔 수 없이 브로치를 받았다.

그러자 필로스 왕자가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그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새삼 사람들이 그의 외모를 보며 천사의 강림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것들을 전해 주고 싶어서 굳이 이 먼 곳까지 오신 건가요?”

“네. 영애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어제 결정을 내린 건데, 그 이야기를 벌써 들은 건가.

“실례가 안 된다면 졸업식에 왜 참석하지 않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내 대답에 필로스 왕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단 한 번뿐인 졸업식보다 중요한 일인가요?”

“네.”

그 일 역시 단 한 번뿐이니, 반드시 해야 했다.

* * *

“오늘도 편지가 안 왔단 말이지.”

하네스가 가져다준 편지들을 확인한 페르데스는 눈에 띄게 실망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3주째, 아델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눈 때문에 길이 막혀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다른 곳에서 보낸 편지는 속속히 도착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졸업 준비로 바쁜 건가.

그래도 편지 정도는 보내 줄 수 있잖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온갖 걱정과 근심, 그리고 불만이 섞인 얼굴로 편지지를 만지는 페르데스의 곁으로 잭이 다가와 말했다.

“페르데스 님. 이만 연회장에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이번엔 페르데스의 표정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그는 크게 마른세수를 한 뒤, 방을 나섰다.

잭과 함께 연회장으로 가는 길에 만난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기뻐하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성년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페르데스 님!”

“축하드립니다!”

사용인들이 말한 것처럼 오늘은 페르데스의 생일이자 성년식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페르데스는 어엿한 성인이 됐다.

공작가 사용인들은 물론 페르데스의 성년식에 참석한 귀족들도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기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에는 가장 축하받고 싶은 사람에게 받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무사히 성년식을 치른 걸 축하한다, 페르데스.”

끔찍할 정도로 싫어하는 체르노서에게 축하 인사를 받은 게 더 컸다.

유학을 갔던 체르노서는 그곳에서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1년도 안 돼서 귀국했다.

그 뒤엔 강제적으로 사교 활동을 중단하고 황자 궁에 틀어박혀 있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올 줄이야.

‘황제가 날 엿 먹이고 싶은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체르노서를 보냈을 리가 없었다.

페르데스는 저절로 구겨지는 인상을 억지로 펴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페르데스의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체르노서는 인상을 팍 쓰며 그를 노려봤다.

그러다 연회장을 쓱 둘러보더니, 픽 웃었다.

“황자인데다가 차기 공작의 성년식 파티가 이렇게 초라하다니. 뭐, 반푼이에겐 과분한 파티이긴 하네.”

“전하.”

그를 따라온 귀족이 당황하며 부르자, 체르노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응이 왜 그러지?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역시 황제는 내 속을 뒤집으려고 보낸 게 분명해.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페르데스는 휙, 돌아섰다.

“그 여자도 네가 싫어서 아카데미로 도망간 게 분명해.”

그러나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건, 뒤이은 그의 말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중한 약혼자가 단 한 번뿐인 성년식을 치르는데 코빼기도 안 비칠 리가 없잖아.”

“전하, 제발…….”

“맞는 말만 하고 있는데, 왜 자꾸 난리인지 모르겠군.”

맞는 말이긴 하지. 처맞는 말.

페르데스는 진심으로 체르노서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문제가 커질 테니 꾹 눌러 참았다.

페르데스가 화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신이 난 체르노서가 계속 비아냥거렸다.

“과연 그 여자가 너와 결혼을 하려고 할까?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

“부황 폐하도 그렇게 생각하고 날 보내신 게 아닐까? 내가 그 여자와 잘 되길 바라서 말이지.”

……그냥 패자. 이걸로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해결하면 되지.

그리 결심한 페르데스가 꽉 쥔 주먹을 휘두르려는 그때.

또각-

“늦지 않게 도착한 것 같아 다행이네요.”

높은 굽 소리와 함께 매력적이면서도 그리운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페르데스는 물론 체르노서도 놀라며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봤다.

“성년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페르데스 님.”

장미보다 더 붉은 머리칼과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

못 본 사이 더 아름다워진 아델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페르데스를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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