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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95/262)

100화

내가 필로스 왕자에게 생일 선물 대신 부탁한 건 바로 그의 친형이자 유력한 차기 국왕인 알렉스 왕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결혼 이야기가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필로스 왕자가 한쪽 손을 가슴에 얹고 진지하게 말했다.

“비록 제가 형님보다 가진 건 없지만, 장담컨대 영애를 생각하는 마음은 형님보다 더 클 겁니다. 형님보다 영애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고요.”

“아.”

지난 일주일간 내가 한 부탁을 곰곰이 생각했다고 하더니 이상한 쪽으로 곡해했구나.

“그러니 형님이 아닌 저를 선택해 주십…….”

“그런 거 아닙니다.”

쓸데없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잘라 냈다.

“전 왕자 전하는 물론 알렉스 왕자 전하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필로스 왕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애당초 그런 오해를 왜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설마 제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습니까?”

필로스 왕자가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와 페르데스의 약혼은 세기의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대륙 전역에 소문이 쫙 퍼졌으니까.

그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오해를 하신 거죠?”

필로스 왕자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설마 저를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한테 청혼하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나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필로스 왕자가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그저 영애의 약혼자가 조금 문제, 아니 문제라기보다 그러니까…….”

그리고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했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제 약혼자이신 페르데스 황자 전하께서 백치이니, 제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그걸 대신 말해 주자 필로스 왕자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내 시선을 피했다.

“꼭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닙니다.”

아니긴. 맞으면서.

그의 엉뚱한 오해가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왜 그런 오해를 했는지 이해는 됐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두 분과 결혼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럼 왜 형님을 만나려고 한 겁니까?”

“알렉스 왕자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동시에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 그를 만나려는 거였다.

그래야 내가 바라는 걸 이룰 수 있을 테니까.

“혹시 저에게는 말해 줄 수 없습니까?”

“네.”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필로스 왕자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필로스 왕자의 눈동자는 지금까지 봤던 것 중에 가장 진지했다.

“전 왕이 되고 싶습니다.”

나랑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조금 흥미롭긴 했다.

나는 흥미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에게 되물었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죠?”

“제가 국왕이 되려면 영애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흐음. 이야기가 생각보다 더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내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쳐다보자 필로스 왕자가 크게 심호흡한 뒤 말을 이었다.

“부왕께서 정정하셔서 아직 공식적으로 정해진 왕세자는 없지만, 형님이 차기 국왕이 되는 건 거의 기정사실화 된 일이지요.”

그렇지. 실제로 알렉스 왕자가 국왕이 되기도 했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형님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닌, 형님이 장남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 아르티나 왕국 역시 장남에게 큰 하자가 없는 이상, 장자 계승이 원칙이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지 않습니까. 제가 늦게 태어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닌데, 고작 그런 이유로 제겐 국왕이 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니.”

필로스 왕자가 푸른 힘줄이 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서 더욱 국왕이 되고 싶습니다.”

눈동자에 의지가 불타올랐다.

“모름지기 장남이 최고라고 외치는 그들에게, 다른 자식들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도와 달라는 거군요. 아르티나 왕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알렉스 왕자 전하의 편일 테니까요.”

“네. 저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저와 같은 처지라서요.”

필로스 왕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니 영애가 도와줬으면 하는 겁니다. 레오폴드 공작가가 저를 지지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귀족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한결 쉬워질 테니까요.”

“거기에 레오폴드 공작가의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할 생각도 있으신 거겠죠.”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하고 진지한 대답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고민됐다.

필로스 왕자를 지지하는 건 큰 도박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가까운 미래에 알렉스 왕자가 국왕이 될 테니까.

그러니 거절하는 게 맞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필로스 왕자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작위를 받지 못해 몹시 분하고 억울해하는.

그래서 어떻게든 공작위를 받으려고 발악하는 내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미래를 알고 있는 덕분에 필로스 왕자를 국왕으로 만들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단지 알렉스 왕자를 지지하는 게 좀 더 안전하고 편해서 그러려고 했지만…….

“좋아요. 도와드리죠.”

이 역시 알렉스 왕자가 거절하면 말짱 도루묵이고, 그를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눈앞에 찾아온 기회를 잡기로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필로스 왕자의 얼굴이 한순간 보름달처럼 밝아졌다.

“정말입니까?”

“네. 대신 제 부탁을 세 가지만 들어주세요.”

물론 그냥 필로스 왕자를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부탁이 무엇입니까?”

기쁜 마음에 취해 마냥 그러겠다고 말하지 않고, 신중하게 짚고 넘어가는 점이 마음에 드네.

“첫 번째는 제가 왕자 전하께 요청드리는 게 많을 텐데, 그것에 불만이나 의문 같은 걸 가지지 말고 그대로 이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조건…… 말입니까?”

“네. 싫으시다면 지금 거절하세요. 괜히 힘 빼고 싶지 않거든요.”

그가 왕족의 체면을 내세우거나, 왜 그렇게 해야 하냐고 물어본다면 아무것도 진행할 수 없을 테니 단호하게 말했다.

필로스 왕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영애가 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두 번째 부탁은 뭡니까?”

“나머지 부탁은 구두 약속이 아닌 각서를 써 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황제가 각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와 페르데스의 약혼을 허락해 준 것처럼 확실한 보증이 필요했다.

내 말에 필로스 왕자의 표정이 약간 흐려졌다.

그는 또 고심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각서를 쓰는 편이 확실하게 서로를 믿을 수 있을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럼 소파에 앉아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필로스 왕자를 소파에 앉혀 두고, 책상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각서를 썼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모두 각서가 필요하니, 전부 다 작성했다.

“여기요.”

그리고 우선 두 번째 부탁이 적힌 각서를 필로스 왕자에게 내밀었다.

“내용을 확인하시고 문제없으시면 전하의 인장을 찍어 주세요.”

서명이 아니라 인장을 찍어 달라고 한 건, 나중에 그가 다른 소리를 절대 하지 못하게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인장의 효력은 무조건적이었으니까.

각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그의 눈이 한계 이상으로 커졌다.

“정말로…… 이걸 원하는 겁니까?”

필로스 왕자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내게 물었다.

“네. 원해요.”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의 눈동자가 부질없이 떨렸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각서에 적은 내용을 말했다.

“왕자 전하께서 국왕이 되신다면, 그때 전쟁을 일으켜 엘레프테리아 제국을 대륙의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 주시길 바랍니다.”

내게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어서 혼자서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능력은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연합국의 힘을 빌려야 했다.

“…….”

필로스 왕자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놀라고, 당황스럽고, 황당함을 넘어서 경악으로 물든 눈동자가 하염없이 각서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네.

하긴 이런 중대하고 어려운 문제를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거절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고 원한다면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필로스 왕자가 물었다.

“……영애는 연합국과 제국이 싸운다면, 연합국이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지금으로선 10%도 채 되지 않습니다.”

제국이 괜히 제국이겠는가.

현재 대륙에 있는 모든 나라가 똘똘 뭉치지 않는 이상 제국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내 대답을 들은 필로스 왕자의 표정이 볼품없이 구겨졌다.

“그런데 왜 이런 부탁을 한 겁니까? 저희가 이길 가능성이 없는데…….”

“지금은 없지만, 제가 도와드린다면 생기죠.”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 연합국의 힘이 더해진다면, 엘레프테리아 제국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필로스 왕자는 말없이 내 얼굴과 각서를 번갈아 쳐다봤다. 눈동자가 의심으로 얼룩졌다.

“아무래도 이건…….”

“첫 번째 부탁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왕자 전하.”

필로스 왕자가 입을 다물었다.

“벌써 약속한 걸 어기시겠다면, 이 거래는 없던 걸로 하죠.”

내가 단호하게 말하며 각서를 가져가려고 하자 필로스 왕자가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아닙니다. 믿겠습니다.”

그리고 목에 걸고 있던 인장 반지를 꺼내 서명란에 찍었다.

마법이 걸린 인장은 실링 왁스나 밀랍 같은 게 없어도 부드럽게 잘 찍혔다.

“영애도 찍으시죠.”

“그 전에 이것도 확인해 주세요. 세 번째 부탁입니다.”

세 번째 부탁이 적힌 각서를 확인한 필로스 왕자는 황당해하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이래서 제국을 멸망시켜 달라고 했던 겁니까?”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되물었다.

“이것도 들어주실 거죠?”

필로스 왕자도 말없이 서명란에 인장을 찍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것으로 복수를 위한 두 번째 단추가 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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