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밤새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이른 아침.
페르데스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공작저를 나왔다.
아델은 비밀 통로를 쓰지 말라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현재 아델의 대리인인 그가 움직이면 호위 기사가 최소 두 명 이상 붙는데,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을 그들에게 보여 줄 수가 없었다.
어떤 이유로 그 사람을 만나는지 알려 줄 수도 없었고.
아델이 비밀 통로를 이용하지 말라는 건, 미로처럼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자칫 길을 잃기라도 하면 아사할 수도 있으니, 사용하지 말라고 한 거지만 이미 길을 다 외운 페르데스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여소에서 말까지 빌려 탄 페르데스가 향한 곳은 외성의 끝자락에 있는 허름한 촌락이었다.
내성은 이미 길에 쌓인 눈을 말끔하게 치웠지만, 외성은 아직 눈투성이였다.
더 이상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어 페르데스는 말을 세워 두고, 걸어갔다.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한참 걸어가던 페르데스가 멈춘 곳은 수리가 필요해 보이는 허름한 집 앞이었다.
잭은 말한 것처럼 아주 기본적인 건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글자를 모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황제가 또 다른 첩자를 심어 둔 것 역시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괜찮았다.
첩자는 찾으면 되는 거였으니까.
페르데스는 첩자를 찾기 위해 하네스에게 공작저 사용인들의 자필 선언문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걸 잭에게 보여 주며 그가 따라 쓴 글씨체와 비슷한 글씨체를 고르라고 했다.
그렇게 골라낸 글씨체 중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서 최종적으로 추려 낸 용의자가 바로 이 집에 살고 있었다.
페르데스는 낡은 파란색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에서 무언가 우당탕,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걸림쇠가 걸린 채로 문이 열렸다.
“누구……!”
페르데스의 얼굴을 본 여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페르데스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이 여자가 잭에게 황제의 쪽지를 전해 준 범인이라는 사실을.
페르데스를 보고 당황해서 잠시 멈칫했던 여자는 곧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페르데스는 문틈 사이로 발을 집어넣은 뒤, 걸림쇠를 우악스럽게 잡아 뜯었다.
나무로 조잡하게 만든 걸림쇠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쉽게 부서졌다.
“자, 잠시만요!”
페르데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하자 여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안에는 동생이 있어요. 그러니까 밖에서 이야기해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여자를 응시했다.
“내가 왜 온 건지 잘 알고 있나 보네, 리네.”
“…….”
이름을 부르자 리네가 움찔하더니 시선을 길게 내리깔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왔지?”
페르데스는 확실히 하기 위해 리네에게 물었다.
리네는 대답하기 곤란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어가서 이야기해야겠군.”
“제, 제가!”
이에 페르데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리네가 다급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황제 폐하께서 보낸 쪽지를 전하께 전달해 드린 일 때문에 오신 거잖아요.”
정답이었다. 페르데스는 문틈에 발을 끼워 넣은 채 한쪽으로 비켜서며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리네는 집 안을 슬쩍 보고 밖으로 나왔다.
외투를 걸치지 못한 작고 가냘픈 몸이 매서운 추위에 발발 떨렸지만, 페르데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아델 레오폴드를 배신했지?”
배신자 따위, 추위에 떨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배, 배신한 거 아니에요!”
리네가 펄쩍 뛰며 부정했다.
“저는 그저 황제 폐하께서 전하께 쪽지를 전해 주고 싶다고 하셔서……!”
“몰래, 라는 말부터 이미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풍기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단순히 황제한테 쪽지만 받은 건 아닐 텐데?”
페르데스가 미리 입수한 편지 봉투를 흔들었다.
“황제한테 편지도 보냈더군.”
수도나 먼 곳으로 보내는 일반 우편은 모아뒀다가, 매주 월요일에 한 번에 발송했다.
리네는 그 점을 이용해서 월요일에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고, 바로 이틀 전이 월요일이었다.
그러나 폭설 때문에 기차 운행이 중단되면서 발송했던 모든 편지가 다시 우체국으로 돌아왔고, 그중에 리네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다.
페르데스가 흔드는 편지를 본 리네의 얼굴은 그를 봤을 때보다 더 창백하게 질렸다.
“여기에 내 이야기가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더군.”
아델의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건 아델이 이곳에 없어서 그런 것일 터.
이전에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델의 이야기가 있었을 거라고 페르데스는 확신했다.
“잭의 이야기도 있던데. 그가 날 잘 감시하는지 말이야.”
“…….”
“이래도 그녀를 배신하지 않고, 단순히 나한테 황제의 쪽지를 전달해 줬다고 말할 수 있나?”
리네는 더 이상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체크메이트인가.’
페르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첩자를 잡았는데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특히 리네는 한때 아델의 전속 하녀였기 때문에 더욱 기분이 안 좋았다.
‘그녀가 없어서 다행이네.’
만약 아델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큰 상처를 입었을 테니까.
“……전부 아가씨 때문이에요.”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는데 리네가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들었다.
매서운 추위에 빨개진 코끝보다 더 빨갛게 변한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아가씨께서 절 해고하지만 않으셨어도, 그래서 돈이 급하지 않았더라면 저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가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널 해고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러나 그게 네가 그녀를 배신한 정당 사유가 되진 않아.”
페르데스가 팔짱을 끼고 리네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어쩌면 아델은 네가 그녀를 배신할 걸 알고, 내보낸 게 아닐까?”
“……!”
“돈 때문에 한때 모셨던 주인을 배신했던 사람은 다른 이유로도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을 테니까.”
크게 뜨인 리네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흑, 흑흑…….”
눈이 뒤덮인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리네가 가냘픈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런 리네를 내려다보는 페르데스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돈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일자리를 구해 주지.”
처음에는 리네를 영지에서 내쫓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랬다가 리네가 황제한테 첩자인 걸 들켰다고 보고하면 일이 귀찮아지니 페르데스는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그녀를 두기로 했다.
“퓨라 광산에서 자유 없이 일하며, 그토록 원하는 돈을 벌어 보도록.”
* * *
[아델 레오폴드에게.
눈이 녹아 이 편지가 도착했을 때쯤에는 이미 한 해가 지난 데다가 영애의 생일이겠네.
새해 복 많이 받고 생일 축하해.
생일 선물을 같이 보내고 싶었는데 아카데미는 등기가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편지만 쓰네.
대신 돌아오면 한 번에 몰아서 근사한 선물 줄 테니까 기대해.
(중략)
……이건 그동안 영애한테 말해야 할지 고민 많이 했는데, 역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야기해.
혹시 한때 영애의 전속 하녀였던 리네라고 기억해?
그녀가 황제가 숨겨 둔 또 다른 첩자였어.]
……리네가 또 나를 배신한 건가.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그녀를 내보낸 건데,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아니, 날 죽이지 않고 단순히 첩자 노릇만 한 거니까 바뀌긴 한 건가.
난 쓴웃음을 지으며 페르데스가 보낸 편지를 계속 읽었다.
[첩자 노릇을 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어. 동생을 먹여 살릴 돈이 필요해서 황제가 내민 손을 잡았던 모양이야.]
그때도 동생 때문에 날 배신했었지.
[물론 지금은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잘 해결했거든.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물어도 안 가르쳐 줄 테니까 묻지 마.]
그 뒤에는 일상 이야기였다. 특별한 건 없었다.
이번에도 바로 편지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바로 펜을 들었다.
페르데스는 묻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 물어봤다.
다음 답장에 알려 주면 좋고, 아니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나중에 영지로 돌아가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되니까.
그다음엔 페르데스가 그렇게 궁금해하는 내 일상 이야기를 적어야겠지.
[얼마 전에 월반 시험을 쳤고, 바로 5학년 진급에 성공했어요.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 불과 1년 만에 5학년이 된 사람은 저밖에 없다며 다들 난리에요.]
특히 필로스 왕자와 로고스 교관이 난리였다.
내 생일은 어떻게 알았는지 필로스 왕자는 선물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물론 나는 그 선물을 받지 않고, 대신 다른 걸 요구했다.
내 요구 사항을 들은 필로스 왕자는 무척 당황하더니 생각해 보겠다며 떠났고, 그렇게 일주일째 소식이 없었다.
“거절인 모양이네.”
하긴 난데없이 그런 요구를 했으니 거절하는 것도 당연했다.
필로스 왕자가 내 요구 사항을 들어주면 편하긴 하지만, 들어주지 않아도 딱히 손해 볼 건 없었다.
다른 방법으로 이루면 되니까.
알고 있는 미래 대로라면 올해 중순에 ‘그 사람’이 이곳에 올 테니, 그때를 노려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손을 움직인 덕분에 편지를 완성했다.
나는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실링 왁스로 편지 봉투를 봉했다.
그리고 메이에게 편지를 보내 달라고 말하려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잠시 시간 괜찮습니까?”
바로 필로스 왕자였다.
조금 전에 그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그가 나타나니 나는 약간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시죠?”
“지난 일주일간, 영애가 한 부탁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건가?
필로스 왕자가 도와주면 굳이 긴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기에 나는 약간 기대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필로스 왕자가 굳은 결심이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영애와 결혼하겠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