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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93/262)

98화

제국의 검이라고 불리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가 제국 기사 아카데미가 아닌 연합 왕실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 소문이 돌았을 때부터, 그리고 실제로 아델 레오폴드가 아카데미 정문을 넘었을 때부터 사람들 사이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아델 레오폴드는 사실 사생아고, 실제 후계자는 따로 있다고 하더라.

황제가 레오폴드 공작위를 황자에게 주려고 일부러 아델 레오폴드를 이곳으로 보냈다더라 등 소문은 각양각색이었다.

필로스 왕자가 식당에서 아델 레오폴드에게 인사했던 것도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만약 아델 레오폴드가 황제 때문에 쫓겨나듯이 이곳에 온 거라면, 그녀를 설득해서 왕국에 귀화시키려고 했다.

그녀를 왕국에 귀화시키면 레오폴드 공작령도 자연스럽게 왕국 통치 아래 들어올 수 있으니까.

보통 가문이 다른 나라로 귀화한다고 해서, 그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까지 그 나라로 넘어가진 않았다.

그러나 레오폴드 공작령은 영지 통치권이 완벽하게 레오폴드 공작가에 있어서 가능했다.

“그런데 귀화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대답했단 말이죠.”

“네, 전하.”

필로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묻는 말에 로고스가 고개 숙여 대답했다.

필로스는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쫓겨난 건 아니라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아델이 귀화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생각이 없다, 정도의 뉘앙스만 풍겼겠지.

“이것 참, 곤란하네.”

아델을 왕국으로 귀화시킨 뒤, 레오폴드 공작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차기 국왕 자리를 노리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일이 꼬여버렸다.

‘그래도 아직은 풀 수 있어.’

그래, 아직은 말이지.

아델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려면 못해도 3년은 걸릴 테니, 그 안에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리면 되는 거였다.

생각에 마침표를 찍은 필로스는 천사의 미소를 그리며 웃었다.

“내일부터는 제가 직접 아델 레오폴드 영애와 친분을 쌓겠습니다.”

* * *

[페르데스 님에게.

보내 주신 편지는 전부 읽어 봤습니다.

편지지가 무려 15장이나 와서 처음에는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다음부터는 페르데스 님의 일상을 그렇게 자세히 적어주지 않으셔도 돼요.

소설을 읽는 것 같아서 재미있긴 했지만, 페르데스 님이 힘들 것 같아서요.

궁금해하신 제 일상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잘 지내고 있어요.

반 배치 고사에서 좋은 결과를 낸 덕분에 바로 3학년으로 월반했어요.

다음 학년에도 월반 신청을 해뒀으니, 이때도 결과가 좋으면 바로 5학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선 바로 6학년이 되고 싶지만, 규정상 그건 안 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죠.

학우들과의 관계는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다들 제가 바로 월반한 게 신기한지,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만 하거든요.

메이는 외롭겠다고 했지만, 저는 오히려 편해서 좋아요. 쓸데없이 달라붙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리고 황태자 문제를 잘 해결해주셨다고 알도르 경에게 들었어요.]

* * *

“알도르 경.”

아침 훈련을 끝내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고 있던 알도르가 페르데스를 돌아봤다.

어느덧 눈높이가 비슷해진 페르데스가 불만 섞인 눈으로 알도르를 쳐다보며 물었다.

“영애에게 보낸 편지에 황태자가 왔을 때 있었던 일을 적었나?”

“네.”

“왜지?”

“아가씨께서도 아셔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적었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거슬리는 건 왜일까.

페르데스는 무덤덤한 알도르의 표정과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아 쏘아붙이듯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할 테니, 그대는 참견하지 마.”

그럴 수는 없다던가, 싫다는 등 부정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자 페르데스는 약간 놀라며 알도르를 쳐다봤다.

알도르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페르데스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기사단 숙소로 들어갔다.

* * *

[아델 레오폴드 영애에게.

머나먼 타국에 가서 고생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네.

나는 편지를 쓰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아. 오히려 일기를 쓰는 것 같아서 재미있는걸.

하지만 읽는 입장에선 힘들 수 있으니 앞으로는 적당히 조절할게.

그래도 영애의 일상도 많이 알려줘. 궁금하거든. 걱정되기도 하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걱정하고 있어.

하네스도, 사라도 영애의 편지가 온 날이면 영애가 잘 지내고 있냐고 나한테 물어본다니까?

(중략)

혹시 그 남자한테 앞으로는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어?

그 남자의 행동이 조금 이상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 줘.

만약 아니라면 그 남자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그리고 영애가 부탁한 식량 문제는 해결했어. 앞으로 2년간 흉년이 들어도 문제가 없을 만큼 넉넉히 준비해 뒀다고.

레오폴드 공작가의 이름으로 무작정 사들이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코스모스 상단의 이름을 빌렸어.

유령 상단인 게 들키지 않게, 손을 써 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중략)

이틀 전부터 마조사 수업을 받기로 했어.

혹시 몰라 수업을 받기 전에 마나를 측정해봤는데, 역시 난 마나를 느끼지 못하더라.

그 부분은 정말 아쉽지만, 대신 마조사 공부를 할 수 있으니 그건 정말 좋아.

열심히 공부해서 퓨라를 이용한 유용한 마법 도구를 만들어볼게.

(중략)

그럼 영애도 열심히 해.

2년 안에 돌아오겠다는 약속, 잊으면 안 돼.

기다릴 테니까.]

* * *

매번 적당히 보내라고 말했는데 이번에도 7장이 넘네.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편지를 주고받는데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항상 편지지 양이 어마어마했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편지지를 넘겼다.

그러다 편지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무언가 툭, 떨어졌다.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진 책갈피였다.

노랗게 핀 해바라기를 보니 전에 관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기다림이라는 그 말이.

페르데스는 별 뜻 없이 보낸 거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자꾸만 떠올라서 만지작거리다가 교과서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지금쯤 내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페르데스에게 답장을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는 궁금하고 걱정되니 내 일상 이야기를 적어달라고 했지만, 딱히 적을 게 없었다.

이곳에서의 내 생활은 쳇바퀴처럼 일정했으니까.

그렇다고 특별한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로고스 교관 대신 필로스 왕자가 추근거리고, 황제가 내게 자퇴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역시 그건 적지 말아야지.”

안 그래도 영지 일로 골치가 아플 페르데스에게 이런 걱정까지 얹어주고 싶진 않았다.

그런 건 내 선에서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니, 아무 일 없다고 보내야지.

그 외에 무슨 이야기를 적으면 좋으려나.

고민하고 있는데 메이가 말했다.

“아가씨, 눈이 와요!”

그 말에 나는 창밖을 쳐다봤다. 새하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연합 왕실 아카데미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온다는 건, 대륙의 북쪽에는 이미 펑펑 쏟아졌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레오폴드 공작가는 대륙의 북쪽에 있었다.

화산이 있어 눈사태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아도, 조금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걱정됐다.

[눈이 많이 내리면 영지민들의 외출을 자제하고……]

그러고 보니 이 시기쯤, 마티나 영지에 폭설이 내려 일주일가량 기차 운행이 완전히 중단됐었지.

그 말인즉, 지금 보내는 편지가 제때 도착할지 의문일뿐더러. 이 이후로는 당분간 편지를 보내지도, 받지도 못한다는 의미.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편지의 끄트머리에 짧게 적었다.

[진심으로 생일 축하드려요, 페르데스 님.]

* * *

“선물도 없이 딸랑 편지가 다인가.”

페르데스는 툴툴거리면서도 기분 좋게 웃었다.

당장 답장을 쓰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눈이 너무 쏟아져서 당분간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페르데스는 그 사실을 퍽 아쉬워하며 아델이 보내 준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문장은 몇십 번이고 곱씹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편지를 받아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잭이 매년 축하해 줬지만, 단순한 말이었을 뿐 편지를 써 주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왜 잭은 편지를 한 번도 안 써 준 걸까?

선물은 능력이 안 돼서 힘들다고 해도 편지 정도는 쓸 수 있었을 텐데?

문득 궁금해진 페르데스는 그날 저녁, 잭이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오자 물었다.

“잭, 곧 내 생일인 거 알지?”

“물론이죠. 일주일 뒤잖아요”

“선물은 준비해뒀어?”

“선물……이요?”

페르데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잭에게 생일 선물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물을 달라고 하니 잭이 당황하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서, 선물로 뭘 원하세요, 페르데스 님?”

“딱히 원하는 건 없고, 편지를 써 줘.”

“아.”

페르데스의 대답에 잭은 안심하면서도 난감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왜 그래? 나한테 편지 써주기 싫어?”

“아, 아니요. 제가 워낙 악필이라 페르데스 님이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돼서요.”

잭이 악필인 건 이전에 그가 적은 쪽지를 봐서 알고 있었다.

“글도 모르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페르데스는 덧붙인 말에 멈칫했다.

잭이…… 글을 모른다고?

“정말이야? 정말로 글을 몰라?”

페르데스가 황당해하며 되묻자, 잭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몰라요.”

“읽고 쓰는 거 전부 다 못해?”

“제 이름이나 간단한 단어는 할 수 있지만, 어려운 건 못해요.”

어려운 것의 범주가 도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페르데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협탁 아래, 잠긴 서랍에 넣어두었던 쪽지를 꺼내 잭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네가 쓴 거 아니야?”

쪽지를 확인한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황제 폐하께서 시킨 대로 종이에 적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따라 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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