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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92/262)

97화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에게서 답장이 온 것은 내가 연합 왕실 아카데미에 온 지 약 3주 정도 지났을 때였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그들이 보낸 편지 봉투가 탁자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무려 5개나.

그중 4개는 페르데스가 보낸 편지였고, 나머지 하나는 알도르 경이 보낸 거였다.

“무슨 편지를 이렇게 많이 보낸 거지?”

영지에 사건이라도 연속으로 터져서 연달아 보낸 건가?

편지 하부에 찍힌 날짜가 같은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 시기에 레오폴드 영지는 평화로웠다.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몬스터 습격 같은 것도 없었다.

황제도 이 시기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그러니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없는 건 내 결정에 따라 황제의 행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페르데스가 이렇게 편지를 많이 보낸 것도 신경이 쓰였고.

나는 편지 칼로 봉투를 뜯으며 메이에게 물었다.

“메이, 혹시 황제 쪽에서 연락 온 거 있어?”

“아니요. 아직 아무것도 받지 못했어요.”

“그래?”

메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아직 황제는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래,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

나는 방 정리를 하는 메이를 곁눈질로 흘끗거리며, 편지를 꺼냈다.

[영애가 미리 말해준 내년에 있을 흉년에 대비하기 위해…….]

보통 편지의 도입부에는 날짜와 함께 받는 사람의 이름을 적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본론이 적혀 있었다.

교양 수업을 받은 페르데스가 이런 기본적인 걸 모를 리는 없고.

편지지 하단에 숫자가 적혀 있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보통 이런 건 서류의 순서가 헷갈리지 않게 기입하는 건데.

“아, 설마?”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는 페르데스가 보내 준 다른 편지 봉투를 열어 확인했다.

그러자 도입부에 [아델 레오폴드 영애에게.]라고 적힌 편지지가 보였다.

편지지 하단에는 큼지막하게 숫자 1이 적혀 있었다.

그 뒤로 2, 3, 4, 5가 순서대로 적혀 있었고, 내가 처음 확인한 편지지의 하단에 적힌 숫자는 6이었다.

다른 편지 봉투에 담긴 편지지에도 그 뒤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편지가 전부 이어지는 거였구나.”

편지지가 무려 15장이나 되니, 한 곳에 담을 수가 없어 나눠서 보낸 것 같았다.

편지를 이렇게 많이 보냈다는 건, 그만큼 내게 할 말이 많다는 의미.

중요한 내용이 있나 싶어 시작부터 꼼꼼하게 확인해봤지만, 이렇다 할 내용은 없었다.

내가 편지에 적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과 페르데스의 일상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것도 일상 이야기를 어찌나 상세하게 적었는지, 그가 한 일들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질 정도였다.

이야기도 재미있게 잘 적어서, 편지를 읽는 내내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황태자가 레오폴드 영지에 찾아왔어.]

……14번째 편지지를 확인하는 순간 웃음이 사라졌지만.

지금까지는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듯이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편지를 읽었다면, 지금부터는 중요한 서류를 읽는 것처럼 한 자, 한 자 눈에 박아가며 읽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레오폴드 영지에 온 목적이 뭔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황제의 흑심이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흘리고 간 이야기는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그의 일상 이야기를 상세하게 적었던 것과 달리 황태자를 만난 것에 대해선 간략하게 적어두었다.

[황태자가 공작가의 서류를 읽으려고 했는데 내가 막았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게 전부이니 내 입장에선 답답했다. 뭘 어떻게 막았는지 좀 더 상세하게 적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알도르 경이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영지를 떠나기 전, 알도르 경에게 기사단과 더불어 페르데스가 누굴 만나는지, 그리고 뭘 하는지 정기적으로 보고해달라고 부탁했다.

페르데스를 믿지 못해서 그런 부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믿었지만, 그의 주변 상황을 믿지 못했다.

세 번째 생에서 리네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이유로 날 배신할 수도 있으니까.

그 일을 생각하면 쓴 약초를 씹은 것처럼 입 안이 썼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알도르 경이 보낸 편지를 확인했다.

[경외하는 아가씨께.]

페르데스의 글씨체는 약간 휘날리는 느낌이라면, 알도르 경의 글씨체는 그의 성격처럼 올곧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레오폴드 영지에 오셨습니다.]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잔뜩 적어둔 페르데스와 달리 알도르 경은 시작부터 본론을 적어두었다.

[……전하께서 레오폴드 공작가의 서류들을 보려고 하자, 페르데스 님이 전부 불태워버리셨습니다.]

“뭐?”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나는 육성으로 깜짝 놀랐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덩달아 놀란 메이가 물었지만, 손을 휘휘 내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계속 편지를 읽었다.

[……다행히 페르데스 님이 서류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계셔서 일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앞에 ‘전부’라는 표현을 쓴 걸 보면 불태운 서류가 한두 장이 아니라는 건데 그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일에 지장이 없었다는 건 단순히 내용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서류 작성도 다시 완벽하게 했다는 의미이니 더욱 놀라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머리가 좋나 보네.”

페르데스는 독학으로 기초 과목을 평균 이상 수준까지 끌어올린데다가, 남들은 배우는 데 몇 년씩 걸리는 교양을 몇 주 만에 익혔다.

그러니 그의 머리가 남들보다 비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마나만 느낄 수 있었으면 뛰어난 마법사가 됐을 텐데, 안타까웠다.

황태자가 공작가의 서류를 읽으려고 했다는 부분에서 떠오른 건데.

첫 번째 생에서 나와 결혼하고 레오폴드 공작이 된 체르노서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매일 빈둥빈둥 놀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공작가의 서류를 봐야겠다며 설쳐댔다.

그걸 본 나는 그가 드디어 일할 마음이 생겼다고 좋아했었지.

그 뒤에 있었던 일들도 줄줄이 떠올랐지만, 썩 유쾌한 일은 아닌데다가 지금 상황과는 연관이 없는 것 같으니 각설하고.

체르노서가 설쳤던 시기와 황태자가 공작저에 찾아온 시기는 우연하게도 비슷했다.

그 말인즉, 공작가의 서류에 뭔가 있다는 의미.

어쩌면 황제가 그토록 레오폴드 공작가와 황실의 피가 섞인 아이를 얻으려는 목적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당장 달려가서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게 그저 한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아카데미에 늦게 올걸.

그러면 입학 자체가 불가능했겠지만, 어쨌거나 이 순간만큼은 아카데미에 온 게 조금 후회가 됐다.

일단 페르데스에게 내가 돌아갈 때까지 황족들에게 서류를 보여주지 말라고 해야겠다.

알도르 경에게도 당부의 말을 보내고.

빨리 답장을 써야 일찍 도착할 테니 나는 곧바로 펜과 편지지를 꺼냈다.

“아, 이런.”

그런데 하필 남은 편지지가 두 장밖에 없었다. 편지 봉투는 고작 한 장 남았고.

“메이, 아카데미 상점에 가서 편지지와 봉투 좀 사 올래?”

“지금 당장이요?”

“그래. 서둘러 다녀와 줘.”

내가 알기로 아카데미 우체부가 편지를 취합해서 가져가는 시간이 오후 4시였다.

지금이 12시이니 4시간이나 남았지만, 오후에 수업이 있으니 지금 써야 했다.

메이가 나가고, 나는 남은 편지지에 알도르 경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페르데스는 그의 이야기를 하며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이것저것 물어본 탓에 적어야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알도르 경은 본론만 딱딱 적으면 되니, 편지지 두 장으로도 충분했다.

[……조심하도록 해요. 알도르 경.]

똑똑-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왔구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내가 아카데미에 온 이후, 점심시간마다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로고스 교관님.”

불청객은 바로 로고스 교관이었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로고스 교관은 호탕하게 웃으며 가지고 온 상자를 내밀었다.

“교수 회관에 맛있는 디저트가 들어왔길래 자네 주려고 가져왔지.”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주려는 건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눌러 참은 건 교관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에게 부탁할 게 있기도 하고.

그래서 처음에 그가 보이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준 건데, 이건 정도가 심했다.

“자꾸 이렇게 찾아오시면 불편합니다. 특별한 볼일이 없다면 찾아오지 마세요.”

“특별한 볼일이 왜 없나. 이렇게 디저트를 주려고 왔잖아.”

“이게 무슨 특별…….”

“듣자 하니 다음 학년 때 월반 신청을 했다고?”

로고스 교관은 내 말을 자르더니 그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입학하자마자 3학년이 됐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월반 신청하다니. 욕심이 많군,”

“…….”

“뭐, 그만큼 자네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의미겠지. 암, 뛰어나고말고. 그 부분은 그대와 검을 마주한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로고스 교관이 왜인지 뿌듯하게 웃으며 내 품에 디저트 상자를 안겨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자네가 먹도록.”

그리고 덩치에 맞지 않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날 쳐다봤다.

내 방에 들어가 같이 디저트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미였다.

정확히는 로고스 교관이 그가 속한 아르티나 왕국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걸 듣는 거였다.

처음에는 왜 저렇게 왕국 자랑을 하는 건지 의아했는데, 몇 번 만나니 알 것 같았다.

로고스 교관이 선물을 들고 뻔질나게 날 찾아오는 이유 역시.

“로고스 교관님.”

지금까지는 그의 호의를 받아준 것과 같은 이유로 넘어갔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노력하셔도 저는 아르티나 왕국에 귀화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으니, 이만 포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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