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페르데스는 하네스에게 황태자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럽게 예전에 아델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가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갔다는 걸 황제가 알게 되면 분명 사람을 보낼 거예요. 2황자가 유학을 갔으니, 아마 황태자가 직접 오겠죠.”
체르노서는 해바라기 축제가 끝나고 약 사흘 뒤, 유학을 떠났다.
좀 더 일찍 갔더라면 그때 만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문득 그때 일을 떠올린 페르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아델과 나눴던 이야기를 계속 되짚었다.
“황태자가 왔다고 해도 겁먹을 건 없어요. 그는 그저 황제 대신 상황 파악을 하러 온 것뿐이니까.”
페르데스는 아델에게 황태자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말하려다 다른 걸 물었다.
“여기 상황 파악을 해서 뭐 하려는 거지? 어차피 네가 없어서 황제가 원하는 아이는 낳지 못할 텐데?”
“글쎄요. 저도 제가 없었던 건 처음인지라 그 부분은 모르겠네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페르데스가 물어봤지만, 돌아온 건 어색한 웃음뿐이었다.
그리고 아델이 유연하게 대화의 주제를 돌리는 바람에 페르데스는 다시 묻지 못했다.
그 뒤에는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걸 잊어서 물어보지 못했는데, 다시 떠올려 보니 참 이상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황태자가 온 일을 말해 주면서 같이 물어볼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페르데스 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하네스가 재차 물었다.
“어떻게 하긴. 만나야지.”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는 황태자였다.
그것도 황제의 심부름으로 왔을 게 뻔하니, 무조건 만나야 했다.
일단 대외적으로 자신은 아델이 아닌 황제의 편이어야 하니까.
그게 이중 첩자인 페르데스의 역할이었다.
‘차라리 체르노서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체르노서는 무척 다혈질적인데다가 자신의 기분을 잘 숨기지 못해서 상대하기가 쉬웠지만, 황태자는 아니었다.
황제만큼은 아니더라도 속에 능구렁이가 몇 마리는 들어 있는 타입이라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황태자는 어디에 있지?”
“일단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가지.”
페르데스는 황태자가 어떻게 나올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을 구성하는 장식품들을 구경하고 있던 황태자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돌아봤다.
곧 페르데스를 발견한 그의 입술 끝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페르데스. 그동안 잘 지냈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소 우애가 돈독했던 형제처럼 보이는 살가운 인사였다.
그러나 페르데스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짜증과 의문, 그리고 의심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선명했다.
페르데스는 황태자와 눈을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거나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 건, 페르데스 역시 황태자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뿐일까. 황족 모두가 싫었다. 가능하다면 제 몸속에 흐르는 황족의 피를 전부 뽑아서 그들과의 접점을 없애고 싶을 정도였다.
페르데스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황태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형님.”
백치 가면을 벗은 지 오래됐지만, 황족의 앞에선 적당히 바보인 척 연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페르데스는 일부러 바보 같이 웃으며 말을 느리게 했다.
그러자 황태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그가 듣기로 페르데스는 백치병이 완전히 치료돼서 정상인처럼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뿐일까. 느닷없이 연합 왕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아델을 대신해서 레오폴드 공작가와 영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가 직접 눈으로 본 페르데스는 여전히 바보 같아 보였다.
예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정상인이라곤 보기 힘들었다.
‘헛소문이었나.’
하긴 16년 동안 앓아 온 백치병이 단기간에 고쳐질 리가 없었다.
그럼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되겠지. 황태자는 긴장의 끈을 조금 느슨하게 풀며 상석에 앉았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곁자리에 앉은 페르데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잡소리 말고 할 말만 하라는, 다소 무례한 대화 방식에 황태자는 조금 언짢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치한테 뭐라고 해 봤자 말이 통할 리가 없을뿐더러, 그 역시 빨리 볼일을 보고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아델 레오폴드가 왕실 연합 아카데미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지 알고 있나?”
“저, 때문입니다.”
이건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페르데스는 미리 준비해 둔 답을 내놓았다.
“제가 기사가 되지 못하니 대신 기사가 되겠다며 떠났습니다. 공작이 되려면 기사 자격이 필요하니까요.”
“그 말은 아델 레오폴드가 공작이 되려고 한다는 건가?”
네. 당연히 그녀가 공작이 되어야죠.
“아니요. 공작은 제가 돼야죠.”
페르데스는 진심과 전혀 다른 말을 하며 이게 진심인 척, 연기했다.
그래야 아델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페르데스가 16년간 갈고 닦은 연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니 거기에 홀딱 넘어간 황태자가 흡족하게 웃었다.
“머리는 나빠도 욕심은 있군. 체르노서랑 똑같아.”
그러면서 페르데스와 체르노서를 싸잡아 비웃고, 욕했다.
자신이야 대부분의 황족들이 혐오하는 백치에 반푼이였지만 체르노서는 아니었다.
게다가 황태자와 같은 배를 빌려 태어난 동복동생인데, 저렇게 말하다니.
‘인성하고는.’
페르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황태자는 그런 페르데스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가 아델 레오폴드를 대신해서 최종 결정자 노릇을 하고 있다던데, 맞나?”
“네에. 쾅쾅 찍고 있어요.”
페르데스가 인장을 찍는 시늉을 하며 말하자, 황태자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역시 관리들이 만들어 오는 서류에 도장만 찍고 있군.”
그럴 리가 있나.
처음부터 끝까지, 마침표 하나 빼놓지 않고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페르데스는 그 사실을 황태자가 알아주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말하니 조금 짜증이 났다.
황태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섰다.
“안내해라.”
안내하라니, 어디로?
영문 모를 명령에 페르데스가 멀뚱멀뚱 쳐다보자 황태자가 인상을 팍 쓰며 소리쳤다.
“뭘 멍청하게 앉아 있는 거냐. 어서 집무실로 안내해라.”
황태자가 말하는 집무실은 아델의 집무실이 확실했다.
그런데 그곳으로 안내하라는 건, 레오폴드 공작가의 서류를 보겠다는 의미.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가문의 서류를 마음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황태자가 저딴 소리를 하니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불안했다.
황태자가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걸 들어줘서 제게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그렇게 결론을 내린 페르데스는 초조한 마음을 환한 미소 속에 숨기며 일어섰다.
“그럼 집사가 열쇠를 들고 있어서 가져다 달라고 하겠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집무실 열쇠는 그가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황태자가 인상을 썼다.
“네가 최종 결정권자이면서 어째서 집무실 열쇠를 일개 집사 따위에게 맡긴 거지?”
“몰라요. 아델이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천하의 머저리라고 욕을 먹었겠지만, 페르데스는 가능했다.
황태자의 머릿속에 이미 페르데스는 머저리였으니까.
황태자는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아, 빨리 집사에게 열쇠를 받아 와.”
“네.”
곧장 응접실을 나온 페르데스는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부탁했다.
“하네스에게 집무실 책상에 초를 서너 개 정도 켜 달라고 말해 줘.”
밝은 대낮에 초를 켜 달라고 하니 하인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페르데스는 다른 하인에게는 소매 통이 큰 겉옷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임무를 완수한 하인들이 돌아오자 페르데스는 겉옷을 입은 뒤, 마치 방금 열쇠를 받아 온 사람처럼 흔들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열쇠 가져왔습니다.”
황태자가 페르데스가 입은 겉옷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 우스꽝스러운 외투는 뭐지?”
“추워서 입었습니다. 예쁘죠?”
페르데스가 통이 넓은 소매가 날개인 양 팔락거리며 바보처럼 묻자 황태자가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는 거기까지 하고 어서 안내해라.”
“이쪽입니다.”
페르데스는 황태자를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서류가 쌓인 책상 위에는 하네스가 켜 둔 초가 있었다.
“여기가 집무실입니다.”
그걸 확인한 페르데스는 우스꽝스러운 광대처럼 몸동작을 크게 하며 황태자에게 집무실을 소개했다.
“여기가 책장이고, 이곳이 책상이고, 그리고 이것이…….”
서류를 집어 든 페르데스가 팔을 크게 움직였을 때, 통이 넓은 소매에 부딪힌 초가 맥없이 쓰러지면서 서류에 불이 붙었다.
“……!”
서류를 빠르게 집어삼키며 번지는 불을 본 황태자는 혹시 제게 불똥이 튈세라 재빨리 집무실을 나갔다.
그때까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리고 있던 페르데스는 황태자가 나가자마자 표정을 싹 바꾸며 주전자의 물로 불을 껐다.
책상은 불에 타지 않게 특수 처리가 되어 있어, 서류 말고는 불이 옮겨붙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꺼졌다.
불이 난 걸 본 하인이 황급히 가져온 물 양동이로 남은 불씨까지 전부 꺼뜨린 페르데스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새카맣게 탄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무슨…….”
뒤늦게 황태자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알도르가 새카맣게 탄 서류를 보고 당황하며 페르데스에게 물었다.
“설마 황태자 전하께 가문의 서류를 보여 드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그래.”
“무모하셨습니다.”
그 말에 페르데스가 알도르를 돌아봤다. 알도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이러시면 무슨 서류가 탔는지 알 수가 없어 일에 지장이…….”
“무슨 서류인지 모른다고 누가 그러지?”
말허리를 자르고 돌아온 질문에 알도르는 멈칫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다 기억하신다는 겁니까?”
“그래.”
페르데스가 책상 끝에 걸터앉으며 웃었다.
“어떤 서류가 있었는지,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마침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기억하니 걱정하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