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0/262)

95화

아델이 연합 왕실 아카데미로 떠난 지 약 열흘이 지났다.

최종 결정권자가 아델에서 페르데스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 관리들의 일과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건 영지민과 기사들, 공작저의 사용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르데스만 아델이 있을 때보다 조금 더 바빠졌다.

아델이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건, 페르데스에게 일을 가르쳐 주고, 2년간의 계획을 미리 세워 두느라 그랬던 거였다.

페르데스는 아델이 미리 세워 둔 계획을 그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돼서 아델보다는 비교적 여유로웠다.

“페르데스 님이 일을 잘하시나 봐.”

“알도르 경이 그랬잖아. 하나를 가르치면 셋을 깨우칠 정도로 명석하시다고.”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페르데스가 일을 잘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페르데스는 그게 아니라고, 아델이 미리 계획을 세워 둔 덕분에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델이 그러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아마…….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 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이겠지.’

한두 번은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되고, 곧 의심으로 바뀔 것이다.

미래를 읽는 능력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위험한 능력이었다.

자칫 마녀나 흑마법사로 몰려 화형을 당할 수도 있기에 아델이 이 사실이 알려지는 걸 바라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나한테는 말했단 말이지.’

그만큼 아델이 자신을 믿는다는 의미이니 페르데스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의문을 가졌다.

아델은 어떻게 미래를 읽은 걸까?

사실 눈사태나 몰딘 국왕의 죽음, 흉년 등 그녀가 계획표에 적어 둔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러나 아델이 미래를 읽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 걸 적어 두었다는 것 자체가 수상쩍었다.

게다가 아델은 예전부터 황제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다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으니, 더욱 의문이 커졌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니 궁금하고 답답했다.

나중에 아델이 돌아오면 슬쩍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페르데스는 아델이 반드시 해야 한다고 별도로 적어 준 목록표를 확인했다.

“내년에 나라에 흉년이 드니 식량을 비축해 두란 말이지.”

레오폴드 공작령은 추운 북쪽 지방에 있는 데다가 뒤에 화산까지 있어, 여러모로 작물 재배가 힘들었다. 

그렇다 보니 식량 대부분을 다른 영지에서 사들였는데, 만약 나라에 흉년이 든다면 직접 재배하는 영지보다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었다.

“확실히 이건 미리 준비해야겠네.”

올해 풍년인 곳이 몇 군데 있으니, 그곳에서 곡식을 사들이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갑자기 많은 양을 사들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란 말이지.”

뭔가 있다고 파고들기라도 하면, 특히 황제가 그렇게 나오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페르데스는 한 가지 묘책을 떠올리고, 아델에게 받은 코스모스 상단 장부를 펼쳤다.

페르데스가 코스모스 상단의 비밀을 알게 된 건, 아델이 떠나기 전날이었다.

“사실 제가 코스모스 상단의 상단주였어요. 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든 유령 상단이죠.”

유령 상단이라고 해도 서류가 완벽해서 당장 장사를 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러니 페르데스는 이 상단을 이용해서 비축할 곡식들을 사들일 생각이었다.

돈은 아델의 사비로 일단 지불하고, 나중에 영지 자금에서 충족하면 됐다.

‘그들과의 거래와 운송은 어떡하지?.’

유령 상단이다 보니 이런 걸 담당해 줄 직원이 한 명도 없었다.

‘테시스 영주한테 슬쩍 떠넘겨 볼까?’

저번에 재난 지원을 해 준 일로 운송을 몇 번 공짜로 해 주기로 했으니, 그걸 잘 이용하면 될 것 같은데.

“좋아, 해 보자.”

페르데스가 당장 테시스 영주에게 편지를 쓸 생각으로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냈을 때였다.

“페르데스 님,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를 보내려고 했는데 편지가 왔네.

페르데스는 속으로 이상한 박자를 만들며 하네스가 내민 편지를 받았다.

시큰둥했던 표정이 한순간 밝아진 건 편지지 아래에 적힌 보낸 사람을 확인했을 때였다.

[아델 레오폴드]

입이 귀에 걸리는지도 모르고 환하게 웃는 페르데스를 하네스가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애타게 기다리시던 아가씨의 편지를 받으셔서 다행입니다.”

“크, 크흠. 내가 언제 애타게 기다렸다고.”

페르데스는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행복감이 가득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하네스는 페르데스가 아델의 편지를 손꼽아 기다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편지를 전해 주는 우체부가 저택에 오는 시간을 외워, 그때마다 아델에게 온 편지가 없냐며 은근슬쩍 물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오늘도 이미 한 차례 묻고 간 후였다.

우체부가 사정상 평소보다 두 시간가량 늦어서 이제 편지를 받게 된 것뿐.

“그럼 전 이만.”

하네스는 페르데스가 편하게 아델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잠깐.”

그런데 페르데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손에 들고 있는 그건 뭐지?”

그리고 정확하게 하네스가 들고 있는 편지 봉투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랑 편지 봉투가 같은 걸 보니, 그것도 영애가 보낸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아가씨께서 알도르 경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남자에게?”

아델의 편지를 받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했던 기분이 날개를 잃은 새처럼 급격하게 추락했다.

페르데스는 아델이 알도르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화를 내거나 저 편지를 찢을 수가 없었다.

제겐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

아델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건 알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에 안 들어.

페르데스는 하네스가 들고 있는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잠깐 그 편지를 이리 줘.”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은 하네스가 곤란해하며 편지를 슬쩍 뒤로 숨겼다.

“이건 아가씨께서 알도르 경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페르데스 님.”

“알아.”

“하온데 어째서…….”

“그냥 한번 들어 보려는 것뿐이야.”

편지를 들어 봐서 뭘 하시려고요……?

하네스는 의아하고 무서웠지만, 페르데스가 너무 강경하니 어쩔 수 없이 편지를 넘겨주었다.

페르데스는 두 개의 편지 봉투를 양손에 각각 올렸다가, 만지작거리는 등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내 뿌듯하게 웃으며 편지 봉투를 내려놓았다.

“내 것이 더 두껍네.”

그 말인즉 알도르보다 제게 편지를 더 많이 썼다는 의미이니, 페르데스는 거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만족?

내가 왜 이런 것에 만족하는 거지?

이깟 편지가 뭐라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에 페르데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페르데스의 감정 변화에 따라 똑같이 울고 웃던 하네스는 초조하게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편지 봉투를 냉큼 가져갔다.

“그럼 전 정말로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편지 봉투의 두께가 알도르의 것보다 제 것이 더 두껍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관심이 없어진 페르데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네스가 나가고, 페르데스는 편지 나이프로 신중하게 아델이 보낸 편지를 뜯었다.

편지지는 총 6장으로, 빈 공간 없이 빼곡하게 글이 적혀 있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 거지.

흐뭇하게 올라갔던 페르데스의 입꼬리는 편지지가 넘어갈 때마다 조금씩 내려왔다.

이윽고 마지막 장에 도착했을 땐 제자리로 돌아오다 못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이게 뭐야.”

편지지에는 온통 공작저와 영지 이야기밖에 없었다.

그의 안부를 묻는다던가,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건강 조심하세요, 딱 한 줄 있긴 하네.”

이 건강 조심하라는 것도 진짜 자신이 걱정돼서가 아닌, 자신이 쓰러지면 최종 결정권자가 없어지니 그러는 게 틀림없었다.

페르데스가 아델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렸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타국에 가서 적응은 잘하는지, 밥은 입에 맞는지, 여자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는지 등등 알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는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계약 관계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페르데스는 불만스레 입을 삐죽이면서도 편지지를 던지거나 구기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편지지 위에서 주먹을 몇 번 움켜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 남자의 편지에도 이렇게 일 내용만 적은 건가?”

알고 싶은데,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대뜸 알도르를 찾아가서 아델이 편지에 뭐라고 적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한참 끙끙 앓던 페르데스는 이내 뭔가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펜을 들었다.

알도르의 편지지에 뭐라 적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아델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아볼 방법이 있었다.

“말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물어보면 되지.”

그럼 대답해 주겠지.

우선 종이에 묻고 싶은 것들을 적은 뒤, 정리해서 편지지에 옮긴 건데 그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전부 다 적고 나니 편지지가 무려 12장이 넘었다.

아델이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을 같이 적었다고 해도 양이 상당했다.

페르데스는 가장 큰 편지 봉투에도 편지지가 들어가지 않자 혀를 찼다.

“이건 편지가 아니라 등기를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잠깐. 편지보다 등기는 좀 더 일찍 도착하잖아.

가격은 몇 배로 비싸지만, 레오폴드 공작가의 재력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일단 아카데미에서 등기를 받아 주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네.

페르데스는 바로 하네스를 불러 알아보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하네스가 먼저 찾아왔다.

“페, 페르데스 님! 큰일 났습니다!”

귀신이라도 본 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무슨 일이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페르데스가 일어서며 물었다.

그러자 하네스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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