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89/262)

94화

어찌나 크게 소리치는지 연무장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로고스 교관이 그런 신입생들을 보며 혀를 찼다.

“아까 대답할 때나 이렇게 소리치지, 쯧쯧.”

그리고 나를 돌아봤다.

“그래. 누구랑 대련하고 싶지, 아델 레오폴드?”

대답하려는데 손뼉을 짝 치며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이름을 부르며 말을 놓는 게 못마땅하더라도 참게. 내 신조가 모든 학생들을 신분에 상관없이 똑`이 대하는 거거든.”

“괜찮아요.”

공작 영애로서 특별 대우를 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럼 다행이고. 그래서, 누구를 선택할 거지?”

“제가 마음대로 선택하면 되나요?”

“그래. 반 배치 시험의 스타트를 끊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이 정도 선택권은 줘야지.”

제멋대로 날 선택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선심 쓰는 척하다니.

조금 웃겼지만, 내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기사 아카데미를 일찍 졸업할 기회.

“선택하기 전에 기준을 말해 주세요.”

“기준?”

“네. 반 배치 시험을 채점하는 기준과 몇 점 이상을 받아야……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

로고스 교관이 무척 놀라며 날 바라봤다.

그건 다른 신입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반 배치도 받지 않은 신입생이 대놓고 월반할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신입생이 바로 월반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드물게 한 번씩 혜성 같은 신입생이 등장했는데, 알도르 경이 바로 그 케이스였다.

물론 알도르 경은 제 입으로 월반하겠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

반 배치 고사로 그의 실력을 확인한 교관과 교수들이 신입생과 어깨를 나란히 할 인재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두 학년이나 월반시킨 것이다.

그 바람에 입학하자마자 3학년이 된 알도르 경은 4학년 때 또 월반하면서 3년 만에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내가 아카데미를 일찍 졸업해서 기사 작위를 따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알도르 경 덕분이었다.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누구나 월반을 꿈꾸지.”

그새 놀란 표정을 갈무리한 로고스 교관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동급생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영원히 녹지 않는 만년설처럼 차가웠다.

“아델 레오폴드. 자네는 동급생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

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로고스 교관이 실소했다.

“부디 그 자신감이 자만감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릴 테니,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주세요.”

“방법은 간단하네. 배치 고사에서 동급생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여 주면 돼. 검술은 물론 교양과 기초 과목, 모든 분야에서 말이지.”

“쉽네요.”

혹시 다른 게 있나 싶어 물어봤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대로였다.

내 대답을 들은 로고스 교관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정말 쉽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이죠.”

나는 대답하며 목검을 세워 둔 진열대 쪽으로 걸어갔다.

“교양 부분은 제가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인 걸로 충분히 증명될 테고.”

대부분 고위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할 당시, 이미 수준급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교양만 보면 신입생이 아니라 4, 5학년은 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기초 과학도 같은 이유로 어느 정도 증명될 겁니다.”

고위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개인 가정 교사에게 기본적인 교양과 더불어 기초 과목을 배웠다.

“하지만 기초 과학은 교양 부문과 달리 개인 역량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니, 시험을 쳐도 상관없어요.”

목검 진열대 앞에 선 나는 다양한 크기의 목검 중, 내가 평소에 쓰던 것과 가장 비슷한 크기의 목검을 잡았다.

크기는 비슷해도 내가 쓰던 것보다 조금 묵직했다. 재질도 거칠었고.

“그럼 이제 남은 건 검술 시험뿐이네요.”

그래도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목검을 손에 쥔 채, 로고스 교관을 돌아봤다.

“제가 신입생을 10명 이상 쓰러뜨리면 인정해 줄 건가요? 아니면 20명?”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던 로고스 교관이 픽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월반하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되지.”

그는 다른 진열장에 있는 목검을 집어 들더니 날 돌아봤다.

“나와 대련하지.”

교관인 그와 직접 대련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인지라 놀라며 쳐다보자, 로고스 교관이 씩 웃었다.

“왜. 막상 나와 대련하려니 무섭나?”

“그건 아닙니다.”

“누가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 아니랄까 봐 자존심은 세군.”

자존심이 아니라 진짜 무섭지 않은 건데.

“자네가 단 한 번이라도 날 타격하는 데 성공한다면 바로 월반시켜 주겠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만큼 교관이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니, 그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고 싶었다.

“좋아요.”

“역시 자존심이 강해.”

혼잣말로 중얼거린 교관이 턱 끝으로 연무장 중앙을 가리켰다.

“대련은 저기서 하도록 하지.”

연무장 중앙 바닥엔 대련할 수 있게 흰색으로 금이 그어져 있었다.

“그럼 갈까.”

교관이 먼저 걸어가고, 그 뒤를 따라가려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영애.”

아침에 식당에서 봤던 필로스 왕자였다.

“영애는 제국 사람이라 모르겠지만, 로고스 교관은 연합국에서 상당히 알려진 실력자입니다.”

연합국에서, 인가.

“그러니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혹시 알도르 샹크티스를 아세요, 전하?”

내가 말허리를 자르며 되묻자 필로스 왕자는 다소 얼떨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제국 기사지만 연합국에서도 유명하니까요.”

“그럼 됐어요.”

로고스 교관은 연합국에서만 유명했지만, 알도르 경은 제국과 왕국, 모든 곳에서 유명했다.

그것만으로 내가 로고스 교관과의 대련을 두려워하며 피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필로스 왕자의 손을 친절하게 떼어 내고,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로고스 교관은 떡 벌어진 어깨를 목검으로 툭툭, 치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 전하와 쑥덕거리길래 안 올 줄 알았는데.”

“당연히 와야죠. 그런데 왕자 전하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존칭을 쓰시네요.”

내가 지적하자 교관이 크흠, 헛기침했다.

“교관이기 전에 왕국의 귀족이라 말이지. 이런 건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이해해요.”

“그럼 다행이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이젠 내 실력을 보여 줄 차례였기에 나는 목검을 고쳐 쥐며 로고스 교관을 쳐다봤다.

“한 대라도 맞추는 걸 성공하면 된다고 했죠?”

“그래.”

“시간제한은요?”

“그런 건 없지만, 자네가 지쳐서 쓰러지거나 목검을 놓치게 된다면 그 즉시 대련은 종료다.”

“반대로 제가 교관님을 한 대라도 맞춘다면 그 즉시 종료고요.”

내 말에 로고스 교관이 조소했다.

“정말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요. 어떨지는 해 봐야 아는 거죠.”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하지 않은 건 쓸데없이 로고스 교관의 경계심을 높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그를 이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내 검술 실력을 교관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에게 제대로 어필하기 위해선 확실히 찍어 눌어야 했다.

이왕이면 단 일격에.

저 남자가 반항할 틈 같은 건 전혀 주지 않고 말이지.

그래야 그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줄 뿐만 아니라, 최대한 많이 월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역시…… 그걸 써야겠지.

머리카락이 붉은 것만이 레드 드래곤의 축복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보다 신체 능력이 약간 뛰어나다는 것도 있었다.

가령 높이 뛰는 실력이라던가.

나는 로고스 교관을 응시하며 목검 끝을 아래로 내렸다.

“…….”

내가 뭔가 하려고 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교관의 얼굴에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교관 역시 목검을 고쳐 쥐며 대련할 준비를 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했다.

조금 전까지 웅성거리던 신입생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우리를 바라봤다.

어디선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연무장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는 눈을 가볍게 감았다가 뜨는 즉시, 교관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선제공격할 걸 예상했는지 로고스 교관은 침착하게 방어했다.

그는 당연히 내가 목검을 맞부딪쳐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정직하게 앞만 방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지. 내가 노릴 곳은 거기가 아닌데.

나는 로고스 교관의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세차게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

그러자 교관이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어깨를 짚고 넘어가 그의 뒤에 착지한 나는 바로 목검을 뒤로 휘두르며 그의 허리를 베어 냈다.

로고스 교관이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방어하려고 했으나 그가 돌아보는 것보다 내 목검이 더 빨랐다.

타악-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목검이라도 맨몸에 맞으면 고통이 상당했다. 내가 있는 힘껏 휘둘렀기 때문에 더욱 아팠을 것이다.

“…….”

그러나 로고스 교관은 신음을 뱉지 않는 건 물론, 표정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맷집이 대단한데.

알도르 경조차도 이렇게 맞았을 때, 약간 인상을 썼던 터라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는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교관을 쳐다봤다.

혹시 그가 덤벼들 때를 대비해서 목검은 계속 쥐고 있었다.

그러나 덤벼들 생각이 없는지 교관은 목검을 아래로 내렸다.

그제야 나 역시 검을 내리며 그를 쳐다봤다.

지금은 인상을 살짝 쓰고 있었지만, 그건 아파서가 아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당황해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와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로고스 교관이었다.

“……내가 졌군.”

교관의 입술 끝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약속한 대로 자네를 바로 3학년으로 진급시켜 주지.”

대련에서 졌는데도 왜인지 그는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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