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림자의 주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게 후드를 꾹 눌러 쓰고 있었다.
키는 알도르 경만큼이나 컸고, 덩치도 딱 그 정도였다.
실루엣을 보면 남자인 것 같은데 누구지?
“……결국은 왔네.”
레오는 곁눈질로 인영을 슬쩍 보더니 귀찮게 됐다는 듯 혀를 찼다.
그가 아는 사람인가?
물어보려는데, 인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레오폴드 영애.”
꾹, 눌러 쓴 후드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적당히 낮고 부드러워서 듣기 좋았다.
그나저나 날 알고 있다니.
사실 특별할 건 없었다.
내 붉은 머리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상징적인 특징으로, 공작가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으니까.
그러나 찝찝하고 불쾌한 건, 상대는 나를 아는데 나는 상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기소개도 안 하고, 절 아는 척하다니. 불쾌하군요.”
날 아가씨가 아닌 영애로 부른 걸 봐서, 귀족인 것 같으니 적당히 존댓말을 섞어 말했다.
“이런, 제가 큰 결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그러자 상대가 후드를 벗었다.
황금을 녹여놓은 것 같은 밝은 금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바다를 품은 푸른색이었다.
남자는 지나가다가 한 번쯤은 돌아볼 만큼 수려한 외모에 부드러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화가들이 흔히 상상해서 그리는 천사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처음 뵙겠습니다, 아델 레오폴드 영애. 필로스 디 프로페테스라고 합니다.”
“……!”
그저 어느 귀족 가문의 영식인가, 하고 별 감흥 없이 남자를 바라보던 나는 성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프로페테스.
그건 연합국의 속한 7개의 왕국 중, 가장 힘이 강한 아르티나 왕국의 왕족 성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그 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왕족이라는 의미.
“왕자 전하가…… 맞습니까?”
확인차 물어보자 남자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 설마 했는데 진짜 왕자였다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띵했다.
“왕자 전하께서 왜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서 왔지요.”
제국은 안전상의 문제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황족을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연합국은 왕족도 아카데미에 간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건 알겠는데, 왜 나한테 인사를 하러 온 거지?
난 이 남자는 물론 프로페테스 왕족들과 일면식이 전혀 없는데?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회였다.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연합국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내가 연을 맺고 싶은 왕족은 이 사람이 아닌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와 친하게 지내서 내게 나쁠 건 없었다.
“제가 왕자 전하와 아카데미 입학 동기라니. 무척 영광입니다, 왕자 전하.”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하자, 필로스 왕자는 조금 놀란 듯 날 바라보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저 역시 영광입니다, 레오폴드 영애.”
“인사가 끝났으면 이만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왕자 전하.”
불만스레 팔짱을 끼고 우리를 보고 있던 레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왕자 전하께서 길을 막고 계시는 바람에 가여운 여성분께서 다가오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거든요.”
레오가 말하는 가여운 여성분은 바로 메이였다.
느닷없이 지목당한 메이는 깜짝 놀라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필로스 왕자는 그런 메이를 곁눈질로 슬쩍 보곤, 내게 다시 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레오폴드 영애.”
필로스 왕자는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홀연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직후, 다시 자리에 앉는 나를 보며 레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래서 알도르가 아가씨 주변에 남자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부탁했나 봐요.”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이상한 말 하는 걸 다 들었는데.
내가 빤히 쳐다보자 레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일어섰다.
“그럼 전 볼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나중에 또 봐요.”
“그땐 내가 원하는 소식을 들고 왔으면 좋겠네.”
“하하, 노력해 보겠습니다.”
레오마저 홀연히 떠나고, 드디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메이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아가씨?”
“……나도 몰라.”
나 또한 이 만남이 얼떨떨했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레오가 추천한 음식과 수프, 그리고 마실 음료를 시키고 방금 일어난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일단 레오가 여기 온 건 알도르 경의 부탁 때문이고.
레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필로스 왕자 때문이라는 거지.
이 역시 알도르 경의 부탁을 받은 거고.
내 주변에 남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달라는 이상한 부탁.
알도르 경이 왜 그런 부탁을 한 건지.
그리고 필로스 왕자는 내게 왜 인사를 해 온 건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거 맛있네.”
솔직히 레오가 추천해준 거라 반신반의했는데, 의심이 싹 날아갈 정도로 맛있었다.
* * *
배를 든든하게 채운 뒤, 늦지 않게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오늘 10시까지 오라고 했지만, 바로 입학식을 하는 건 아니었다.
기숙사 배정과 반 배정, 교복과 교과서 배부 등을 한 뒤, 이틀 뒤에 입학식을 한다고 안내인이 알려주었다.
원래 기사 아카데미 기숙사는 2인 1실이 원칙이고, 그건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올해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한 여학생은 나밖에 없어서, 혼자 방을 쓰게 됐다.
나 말고 여학생이 한 명 정도는 더 있을 줄 알았는데, 혼자라니.
“하아.”
이곳에서의 생활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가씨! 욕조도 있어요!”
반면 메이는 몹시 신이 난 얼굴로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아카데미 기숙사라서 초라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있을 건 다 있네요!”
“그렇겠지”
여긴 귀족 기숙사였으니까.
평민들이 쓰는 기숙사는 좀 더 간소하다고 들었다.
그만큼 기숙사비가 싸기도 했고.
“메이, 황제 쪽에서 연락 온 거 없지?”
내가 오랫동안 날 돌봐줬던 수많은 하녀들을 두고, 메이를 데리고 온 이유가 바로 황제 때문이었다.
메이는 내 편이지만 황제의 편인 척하는 이중 첩자였으니까.
“네! 아직은 딱히 연락 온 게 없어요. 아직 음식에 독을 넣은 범인을 잡느라 바쁘신가 봐요.”
“혹시 연락 오면 바로 말해 줘.”
“알겠습니다, 아가씨!”
메이는 씩씩하게 대답한 뒤, 가지고 온 짐을 정리했다.
그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 아카데미 안내 책자를 읽었다.
안내 책자는 무려 3권으로, 이곳에서 생활할 때 주의할 점과 교칙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교칙을 어기면 벌점이 매겨지는데, 10점 이상은 유급, 15점 이상은 정학, 20점은 퇴학이었다.
마법 도구 반입은 무려 벌점이 7점이구나.
절대 마법 통신 반지를 가지고 들어온 걸 들키면 안 되겠네.
그 외 조심해야 할 게 뭐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방 배정을 담당한 안내인이었다.
“모든 입학생들은 연무장으로 모이라는 소집령이 내려졌습니다.”
“지금 당장?”
“네. 10분 내로 모두 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방에서 푹 쉬라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의아했으니, 일단 연무장으로 향했다.
“갑자기 왜 모이라고 하는 거지?”
“글쎄.”
그곳엔 나처럼 어리둥절하며 모여든 신입생들이 있었다.
아까 식당에서 잠시 인사를 나눴던 필로스 왕자도 보였다.
웅성거리던 신입생들은 내가 연무장으로 들어오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일제히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봤다.
흡사 서커스의 원숭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저들이 나를 왜 저렇게 쳐다보는지 알아서 짜증 나기도 했고.
여기서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반응해 봤자 저들에게 먹이만 던져주는 꼴이니, 최대한 무덤덤하게 연무장 변두리로 걸어갔다.
“진짜로 입학생…….”
“도대체 왜…….”
“저 머리는 혹시 레오폴드 공작가의…….”
신입생들은 그런 나를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인 걸 알아보고 경악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모두 모였나?”
신입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검술 교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오고 나서야 사라졌다.
상의를 입고 있어도 가려지지 않는 우락부락한 근육과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햇볕에 잔뜩 그을린 피부와 짧게 깎은 머리카락.
외모만 보면 교관이 아닌 용병 같았다.
“난 이번에 신입생 반 배정을 맡은 로고스 에로티아라고 한다.”
실력 있는 기사들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에로티아 가문의 일원인가.
“편하게 교관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네, 교관님!”
신입생들이 우렁차게 대답하자 로고스 교관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반 배정에 앞서 간단한 테스트를 하겠다. 이 테스트는 반 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할 테니, 부디 열과 성의를 다해서 임하길 바란다.”
“네!”
“그럼 가장 먼저 테스트를 볼 사람 있나?”
대답은 우렁차게 했지만, 선뜻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에 한심하다는 듯 로고스 교관은 혀를 차며 주변을 쓱 둘러봤다.
그러더니 날 발견하고, 멈칫했다.
……설마? 불안한 예감이 등골을 치고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올해 주목할 만한 신입생이 입학했었지.”
왜 항상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아델 레오폴드, 앞으로.”
“…….”
로고스 교관이 날 호명하는 순간 다시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나가기 싫지만…… 가야겠지.
움직이지 않는 발을 억지로 끌고 앞으로 나서자 로고스 교관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참고로 반 배정 테스트는 검술 대련이다.”
로고스 교관은 다시 신입생들을 보며 말했다.
“대련에서 이긴 사람은 높은 클래스에 배정받을 것이다.”
“……!”
“아델 레오폴드와 검술 대련을 할 사람?”
“제가 하겠습니다!”
교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부분의 신입생들이 번쩍 손을 들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