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87/262)

92화

뿌우-

커다란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플랫폼에 정차했다.

자라온 환경은 다르지만, 기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아카데미에 온 학생들이 속속 기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했네.”

그중에는 아델도 있었다.

가슴 아래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높게 묶고, 흰색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그녀는 여러모로 눈에 띄었다.

우선 불꽃처럼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에 시선을 빼앗겼고.

그 다음엔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에 마음을 빼앗겼다.

녹음을 닮은 싱그러운 눈동자와 마주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어느 가문의 영애일까.

한번 가서 말을 걸어볼까?

설레는 마음으로 아델을 훔쳐보던 남자들은 그녀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보고 흠칫, 놀랐다.

“설마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건가?”

“에이,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검을 휘두를 타입으론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허리에 검을 차고 있잖아.”

“그냥 장식용으로 찬 거 아니야?”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여기사가 예전보다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나 여전히 그 수는 적었다.

기사 100명 중 여기사가 1명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여기사를 인정하지 않는 곳도 있었고. 

대표적인 곳이 바로 제국이었다. 

그나마 연합국은 여기사를 인정하기 때문에 연합 왕실 아카데미에는 여학생 수가 제법 됐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저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제국이든 연합국이든 뿌리 깊게 내린 사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건가. 

아델은 작게 조소하며 후드를 꾹 눌러 썼다.

그러자 아델의 짐가방을 들고 있던 메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후드를 쓰기엔 날이 아직 더운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레드 드래곤에게 축복을 받은 덕분에 더위에는 강했으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설령 아니었더라도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보다 나으니 아델은 후드를 고쳐 쓰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7시 30분. 입학식까진 대략 2시간 30분 정도 남았다.

여기서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까지 약 30분 정도 걸리니, 시간은 넉넉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카데미 근처에서 있어야지.

“메이, 마차를 빌려야겠다.”

혼자였다면 말을 탔겠지만, 메이가 있는 데다가 짐도 있으니 아델은 마차를 빌려 타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 * *

나는 빌린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가는 내내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국적인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와.”

메이 역시 신기한지 별을 박아놓은 것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감탄사를 연신 터뜨렸다.

“태어나서 제국을 떠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나도 그래.”

같은 생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제국을 떠나 타국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설레고 기대가 됐으며, 한편으로는 걱정됐다.

제국에 두고 온 것들과 새로운 땅에서 펼쳐질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잘해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날 수는 없었다.

반드시 해내리라고 불안한 마음을 다잡는 사이, 어느덧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나는 메이가 마차 삯을 내는 동안 아카데미 건물을 올려다봤다.

얼핏 봐도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여기가 기사 아카데미.

앞으로 이곳에서 수업을 배울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직 8시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지 정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정문 표지판에는 오픈 시간은 9시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뭘 하지?

아침이나 먹을까?

그게 좋을 것 같아 메이를 데리고 인근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자리가 만석이었다.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식당으로 몰려든 탓이었다.

겨우 구석에 자리를 잡은 나는 한숨을 돌리며 꾹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맞은편에 짐을 내려놓은 메이가 다리를 배배 꼬며 내게 말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다녀와.”

“정말 죄송해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고작 화장실을 가는데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 하는 건지.

나는, 픽 웃으며 메뉴판을 펼쳤다.

타국이라 그런지 메뉴판에 적힌 음식들이 하나같이 낯설었다. 아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

뭘 시키면 좋으려나.

아침이니까 너무 속이 부대끼지 않게 수프랑 샌드위치 정도면 되려나.

전에 보니까 메이는 고기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고기도 시킬까?

“이거.”

고민하고 있는데 메뉴판 위로 낯선 손가락이 불쑥 올라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무례한 손가락의 주인을 확인했다.

“여기는 부루스게타가 맛있어요. 기본만 먹어도 맛있지만, 제 추천은 바질을 올려 먹는 겁니다, 아가씨.”

이 남자는…….

“레오?”

“이야.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아가씨.”

레오가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원래 메이의 자리였다.

나는 그런 레오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마 벌써 내가 부탁한 일이 끝난 건가?”

“에이, 그럴 리가요. 제가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어려운 일을 이리 빨리 끝내지는 못한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레오는 참 뻔뻔한 성격이었다.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야?”

“그야 일하러 왔죠. 아가씨 말고도 저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들이 참 많거든요. 그런데!”

레오가 연극배우처럼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과장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아가씨를 만나다니. 제 이름과 아가씨의 가문 이름이 유사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우리는 운명인 것 같습니다.”

운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실소하며 레오를 유심히 바라봤다.

정말 우연히 그를 만난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증거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직감이었다.

정말로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면, 레오가 나를 일부러 따라온 거라면 예상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전에 한 의뢰가 완료된 것.

그러나 이건 그의 입으로 아니라고 말했으니, 제외하고.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알도르 경이 내 호위를 부탁했구나.”

“…….”

나는 순간이지만 레오의 눈 밑이 떨리는 걸 놓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호위가 필요 없다는 말에 순순히 물러난다고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그쪽은 정보 길드가 아니었나? 호위 의뢰 같은 것도 받는 줄은 몰랐는데.”

“원래는 받지 않는데, 친한 친구가 너무 간곡히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 알도르가 레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정말이야? 믿기지 않는데.”

“저도 제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레오가 씩 웃으며, 턱을 괴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설마 알도르가 그런 식으로 저한테 부탁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거든요.”

그 얼굴이 몹시 의미심장했다.

도대체 알도르 경이 어떤 식으로 부탁했길래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궁금했지만 그 부분은 묻지 않고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럼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알도르가 레오에게 내 호위를 부탁했다면, 제국에서 여기까지 계속 따라왔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나는 레오가 따라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대단한 실력자라는 거겠지.’

명색의 정보 길드장이고, 알도르도 인정한 실력자니 그건 당연했지만……. 그래도 묘하게 기분이 나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여간 레오가 그동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알도르가 ‘몰래’ 호위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내 앞에 나타난 걸까?

그럴 수밖에 없는 계기가 있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다.

의아해서 묻자 레오가 말없이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새삼 아가씨가 참 눈치가 없는 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알도르가 내게 의뢰한 걸 바로 알아챈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쉬잇.”

똑바로 말하라고 하려는데, 레오가 검지를 손에 가져다 대며 흘끗, 그의 뒤로 눈짓했다.

그러면서 내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노리는 사람들?

혹시 황제가 보낸 사람인가?

내가……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황제는 지금 황실 만찬에서 독이 나온 것 때문에 내 쪽엔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으니까.

황족은 가족 간의 화합을 다진다는 웃기지도 않은 명목하에, 3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황실 만찬을 가졌다.

마지막 황실 만찬은 지난주 월요일이었는데, 칠면조 요리에 독이 섞여 있었다.

감히 황족이 먹을 음식에 독을 타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큰일인데, 황후가 그 독을 먹고 쓰러졌으니 그야말로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황후 가문과 황태자는 물론 다른 귀족들도 독을 탄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아우성쳤고.

자칫 자신이 그 독을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황제 역시 눈에 불을 켜고 범인 찾기에 나섰다.

그러나 범인을 잡긴커녕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당연했다. 범인은 바로 황후였으니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황후 스스로 독을 먹고, 독살당한 척 연기한 것이다.

그 덕분에 난 아무런 방해 없이 이곳에 올 수 있었고.

하여간 아직 범인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황제가 내가 이곳에 온 걸 알아채고 사람을 보냈을 리는 없었다.

‘그럼 누구지?’

누가 사람을 보낸 걸까.

황제가 아니라면 달리 짐작이 가는 범인이 없어 더욱 소름이 끼쳤다.

잔뜩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레오가 픽 웃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그들은 아가씨를 해칠 의도로 노리는 건 아니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해칠 의도가 아니라면 왜 날 노리는 거지?”

“그건…….”

레오가 뭐라 말하려는 그때, 그의 뒤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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