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86/262)

91화

알도르 경과 잘 해결하고, 그의 방을 나서는데 기사들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무슨 일이죠?”

“저, 이거.”

최근에 들어온 신입 기사들이 꽃다발을 비롯한 두꺼운 노트를 내게 내밀었다.

꽃다발은 왜 주는지 알겠는데, 노트는 뭐지?

“이게 뭔가요?”

“저희들의 노하우를 적은 노트입니다.”

“노하우요?”

“네. 기사 아카데미 생활은 아가씨께서 생각하신 것보다 더 녹록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특히 교수들이 얼마나 재수가 없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기사가 불끈 쥔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다른 기사들도 저마다 아카데미를 다닐 때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털어놓았다.

“그러니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저희가 아는 노하우들을 전부 적어 놨습니다.”

“물론 아가씨께선 제국 기사 아카데미가 아닌 연합 아카데미로 가시니,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적어 뒀습니다.”

기사들의 말처럼 노트에는 저마다 다른 글씨체로 그들이 경험한 일과 그때 어떻게 해결했는지 적혀 있었다.

노하우라고 자랑스럽게 말한 만큼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지만…….

“교수에게 뇌물을 먹이라는 건 누가 쓴 거죠?”

내가 노트에 적힌 걸 보여 주며 묻자, 글씨체를 확인한 기사들이 일제히 한 사람을 쳐다봤다.

“아하하하.”

에런 경이었다. 쏟아지는 시선에도 에런 경은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대부분 교수들은 돈을 좋아하더라고요. 그러니 뇌물을 먹이면 아카데미 생활이 편하실 겁니다, 아가씨.”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제대로 된 노하우를 적어야지, 에런.”

“쯧쯧, 그러니까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지.”

쏟아지는 비난에 에런 경이 부루퉁하게 입을 쭉 내밀었다.

“아무튼…… 공작저는 저희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 무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아가씨.”

“혹시 저희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맞습니다. 당장 달려갈 테니 바로 불러 주세요, 아가씨!”

아우성치는 기사들을 보니 웃음이 나오면서도 코끝이 찡했다.

어제 페르데스가 했던 말이 떠올라 그런 것도 있었다.

기사들이 내가 공작이 되길 바란다는 그 말.

“다들 정말 고마워요. 이 노트는 유용하게 잘 쓸게요.”

“그래 주시면 저희야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기사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작별의 인사는 아쉽게도 여기까지 하고 끝냈다.

그들이 안겨 준 꽃다발과 노트를 품에 안고 숙소를 나서려는데, 입구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페르데스 님?”

먼저 본관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나?

왜 저기 계시는 거지?

나는 의아해하며 페르데스에게 다가갔다.

괜히 땅을 툭툭 차고 있던 페르데스는 내가 온 걸 알아채고 날 돌아봤다.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 다행히 그 남자랑 잘 풀었나 봐.”

“네. 그런데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본관에 먼저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어차피 영애가 날 다시 찾을 것 같으니, 기다리고 있었지.”

그렇긴 하지.

떠나기 전에 그에게 가르쳐 줘야 할 게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럼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빨리 나왔을 텐데.”

“괜히 방해하기 싫어서. 그건 그렇고.”

페르데스의 시선이 내가 안고 있는 꽃다발에 닿았다. 미간 사이가 약간 좁아졌다.

“그건 뭐야? 그 남자가 준 건가?”

“아니요. 기사들이 줬어요. 무사히 다녀오라고, 말이죠.”

“아, 그래?”

약간 구겨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다리미질한 것처럼 쫙 펴졌다.

“이리 줘. 내가 들어 줄게.”

“괜찮아요.”

별로 무겁지도 않았고, 기사들이 준 마음이었으니까.

내가 직접 들고 싶었다.

“그럼 가실까요?”

곧바로 집무실로 돌아와 페르데스에게 남은 일들을 알려 주었다.

주의 사항도 같이 알려 주자 페르데스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전부 다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저도 했잖아요. 그러니 페르데스 님도 하실 수 있어요.”

“말은 쉽지.”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페르데스가 내게 물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물어보게 마법 통신 반지나 통신구를 가져가면 안 돼?”

“저도 그러고 싶은데, 아카데미는 마법 물품 반입 금지라 반지를 들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상한 규칙이 있네.”

“학생들을 지키기 위한 규칙이죠.”

부정행위를 막기 위한 규칙이기도 했다.

기사는 순순히 자신의 힘으로 경지에 올라야 하는데, 가끔 마법의 힘을 빌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멍청이들이 있어 그런 규칙이 생긴 거였다.

“영애가 없을 때, 영지에 큰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두 번째나 세 번째 생처럼 황제가 날 굴복시키기 위해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영지는 평온할 것이다.

첫 번째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문제가 생기면.”

나는 책상 서랍에서 상자를 꺼내 페르데스에게 내밀었다.

상자 안에 든 마법 통신 반지를 본 페르데스가 약간 놀라며 내게 물었다.

“아카데미는 마법 도구 반입 금지라며?”

“몰래 들고 가면 되죠. 원래 규칙은 깨라고 있는 거잖아요.”

내가 윙크하며 말하자 페르데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으며 반지를 손에 끼웠다.

굳이 지금 낄 필요가 없을뿐더러 열 개 손가락 중에 하필 왼쪽 약지에 끼는 게 약간 마음에 걸렸지만…… 별 뜻 없이 한 행동일 테니 말을 보태지 않았다.

페르데스는 약지에 낀 반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괜히 연락했다가 들키면 안 되니, 이건 꼭 필요할 때만 연락해야겠네.”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하라고 준 물건이기도 했고.

“보통 방학 때는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던데, 영애는 아카데미에 있을 거지?”

“네. 조기 졸업을 하려면 방학 때도 수업을 들어야 하거든요.”

페르데스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힘들겠네.”

“빨리 돌아오려면 어쩔 수 없죠.”

똑똑-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사라였다.

페르데스는 저택의 일로 찾아온 그녀와 내가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 * *

하루 종일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일한 만큼 몹시 피곤했지만, 이상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려면 자야 하는데.

나는 눈을 꼭 감고, 별과 양, 심지어 오리까지 세며 억지로 자려고 했지만, 결국 잠들지 못하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불면증인 건 아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였다.

날이 밝으면 이곳을 떠나 아카데미로 간다는 것과.

나 때문에 고생할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혹시 그들이 세 번째 생에서 하녀가 그랬던 것처럼 날 배신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그리고 수틀린 황제가 공작령에 못된 짓을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등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쳐서 수마를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호기롭게 2년 안에 아카데미를 졸업한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조바심도 있었고.

그나마 페르데스가 있어서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나는 기사 아카데미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제대로 보상해야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선에서, 그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페르데스라는 안전장치를 걸어 두긴 했지만,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 불안한 마음들을 가라앉히기 전에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 테라스로 나왔다.

침실은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 있어 시원했지만, 밖은 열대야로 무더웠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을 뿐인데, 후덥지근한 밤공기가 폐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왔다.

조금 덥네.

더위를 잘 참는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면 진짜 더운 거였다.

하네스에게 당분간 저택 전체에 온도 조절 마법을 걸어 놓으라고 말해야겠네.

그러면 퓨라 소모가 심하겠지만, 퓨라야 다시 캐면 되는 거였다. 사용인들의 건강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게 나는 한동안 테라스 난간에 서서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조금 멀리 떨어진 커다란 나무 아래 누군가 서 있는 게 언뜻 보였다.

‘누구지?’

거리가 제법 있기도 하고, 달빛이 없는 정원은 너무 어두워서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실루엣을 보니 남자인 것 같은데.

문득 주치의의 조수가 이상한 짓을 했던 게 떠올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떠난다는 걸 알고, 벌써 다른 마음을 품은 배신자가 나온 건가?

“…….”

내려앉은 심장이 이번엔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빨리 뛰기 시작했다.

상대가 움직이지 않는 걸 봐서 내가 테라스로 나온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붙잡을까?’

지금 뛰어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하는 사이 위기감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인영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 * *

동이 막 튼 이른 아침.

레오폴드 공작저는 북적거렸다.

기사 아카데미로 떠나는 날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굳이 이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다들 기어코 배웅하러 나왔다.

“안색이 안 좋네.”

그중에는 페르데스도 있었다.

“어젯밤에 잠을 못 잤나 봐?”

“네.”

안 그래도 마음이 불안한데 그런 것까지 봤으니, 잠을 이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젯밤에 제 침실 근처 나무 아래 이상한 사람이 있었어요.”

페르데스에게 이 일을 알려 주고 조심하라고, 혹시 그자를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그러세요, 페르데스 님?”

“……그거 나야.”

“네?”

페르데스가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나무 아래 있던 이상한 사람이 나라고.”

“……네?”

그 수상한 사람이 페르데스였다고?

“아가씨, 준비가 다 됐습니다.”

늦은 시간에 왜 거기 있었냐고 물어보려는데 하네스가 보고했다.

떠날 시간이라는 의미였다.

“그래.”

페르데스에게 이유를 묻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안했다.

나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페르데스와 모두에게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관리와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녀와.”

페르데스는 웃으며 인사했고.

나는 사람들의 인사를 마음에 품고, 마차에 올라탔다.

하늘은 앞으로의 내 여정을 축하해 주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