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85/262)

90화

투툭, 툭-

탈선하려고 했는데 왜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건지.

갑작스러운 소나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여관 주인 아들이 우산을 빌려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물에 빠진 생쥐처럼 쫄딱 젖었을 것이다.

“우산 돌려줄 때, 빌려줘서 고맙다고 선물 보내야겠네요.”

“내가 할게.”

“제가 해도 되는데.”

페르데스가 잠시 멈칫했다가 말했다.

“그때 영애는 이곳에 없을 것 같아서.”

아. 그러고 보니 그런가.

내일. 내일. 내일.

그 단어가 가슴에 박혔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게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젠 너무 가까워서 조금 싫었다.

……조금이 아닌가.

나는 앞서 걸어가는 페르데스의 등을 쳐다봤다.

비밀 통로는 둘이 나란히 걷기에 좁은 터라 우리는 기차처럼 일자로 걷고 있었다.

나갈 땐 내가 앞에서 걸었는데, 돌아갈 땐 페르데스가 앞에서 걸었다.

“길 알아요?”

“알아. 아까 갈때 외웠어.”

“외우지 말아요.”

“외워야지. 그래야 영애가 나한테 전부 떠맡기고 떠났을 때, 나도 탈출구로 한 번씩 쓰지.”

그렇게 말하면 양심이 찔리는데.

“죄송해요.”

“뭐가.”

“너무 큰 짐을 맡기고 떠나는 것 같아서요.”

“그다지.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나한테 손 내민 거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막상 그때가 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잘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동안 지켜본 바, 페르데스는 일을 잘할 뿐만 아니라, 나름 레오폴드 영지에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했으니까.

저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상, 내가 없더라도 열심히 해 줄 것이다.

“공작저 내부의 일은 하네스랑 사라가 많이 도와줄 거예요. 모르는 게 있으면 그들에게 물어봐요.”

“그래.”

“다른 업무는 각 부처의 관리들한테 물어보면 돼요. 아, 제가 미리 계획표 세워 둔 거 봤죠? 거기 적힌 대로 실행하면 돼요.”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걸어가던 페르데스가 날 돌아봤다.

“그대로 실행하라고?”

“네.”

“이변이 생겨도?”

“웬만해선 그럴 일이 없을 거예요.”

미래를 다 경험하고 작성한 거였으니까.

“어째서 장담하는 거지?”

“미래에서 보고 왔으니까요?”

“재미있는 농담을 하네.”

농담 아닌데.

“좋아. 그건 그렇다 쳐도 나한테 몇 년이나 영지를 맡길 생각이야?”

“전에 말했잖아요. 2년 정도라고.”

“기사 아카데미 교육 과정은 6년이라고 들었는데. 연합은 달라?”

“거기도 똑같이 6년일 걸요.”

“그런데 2년 정도만 내게 맡긴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물었다.

“나머지 4년은 누구한테 맡기게? 그 남자?”

“알도르 경을 말하는 거라면 아니에요.”

그에게 맡겼다간 두 번째 생과 같은 일이 반복될 텐데 어떻게 맡기겠는가.

“그럼 누구한테 맡기게?”

“저요.”

“뭐?”

“저라고요. 2년 안에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돌아올 테니, 그동안만 잘 부탁해요.”

“허……?”

어지간히도 당황했는지 페르데스가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 같은데, 영애가 하는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고, 또 믿기니까 이게 웃기는데…….”

저건 도대체 무슨 소리람.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그만하고 얼른 가요.”

그가 앞에서 가로막고 서 있으니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내가 등을 떠미니 페르데스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가면서도 계속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 * *

다음 날.

나는 아침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연합 왕실 아카데미에 가는 걸 발표했다.

내 발표에 공작저가 발칵 뒤집힌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무덤덤한 사람과 미리 알고 있던 하네스와 페르데스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랍니까! 아가씨께서 기사 아카데미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아가씨. 혹시 공작위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그냥 황제 폐하께 작위를 달라고 하세요!”

“맞아요! 황제 폐하의 재량으로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잖아요!”

그러게. 그런 방법이 있었네.

황제가 줄 리는 없지만.

“금방 돌아올 테니까,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이라니요! 기사 아카데미 정규 과정은 6년이라고 하던데요!”

“그것보단 빨리 올 거야.”

황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예상하는 기간이 2년이라는 건 숨겼다.

그날,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말도 안 된다며 소리쳤다.

그중에는 가지 말라고 내 치마를 붙잡고 엉엉 우는 사람들도 있으니, 조금 난감했다.

아침 훈련도 빠지고, 하루 종일 날 따라다니며 나 대신 할 일을 눈에 새겨 넣던 페르데스도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네.”

“그들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죠.”

기사 아카데미는 여러모로 악명이 높았으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나는 온실에서 자란 고운 화초처럼 보일 텐데, 그런 곳에 간다고 하니 기함하는 게 당연했다.

“하긴 기사단 소문은 나도 들었으니까.”

페르데스는 이해가 된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주변을 쓱쓱 둘러봤다.

“뭐 찾으세요?”

“그 남자.”

그 남자라면 알도르 경?

“이 소식을 들으면 가장 먼저 뛰어올 줄 알았는데,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이상해서.”

그러고 보니 오늘 알도르 경이 한 번도 안 왔구나.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그런 거라면 기사들이 달려와서 소식을 알려 주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지.

“알도르 경에게 가 봐야겠어요.”

그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걸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아 나는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저녁 시간이니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없었다.

기사들에게 물어보자 그들은 하나같이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아침 훈련 때 아가씨 소식을 듣더니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십니다.”

“다른 훈련은 물론 식사도 안 하세요.”

……스승과 제자는 닮는다더니 이런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잖아.

페르데스를 겨우 설득했는데, 이젠 알도르 경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알도르 경은 내 말을 잘 들어주니까 설득하기 쉽겠지.

“페르데스 님.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계세요. 전 알도르 경을 만나고 갈게요.”

“그래.”

내심 같이 간다고 우길 줄 알았는데, 페르데스는 순순히 떠났다.

나는 곧바로 알도르 경의 방을 찾았다.

똑똑-

“알도르 경.”

똑똑똑-

“안에 없어요?”

그럴 리가. 

분명 기사들이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없으니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응?”

그러자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난장판이 된 방이 보였다.

알도르 경은 청소하는 사용인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깔끔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방이 이렇게 어지러우니 불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방에 그가 보이지 않아 더욱 불안했다.

기사들에게 얼른 알도르 경을…….

“아가씨?”

방 안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황급히 그쪽을 쳐다봤다.

알도르 경이 욕실 앞에 서 있었다.

막 씻고 나온 건지 그의 머리는 약간 젖어 있었다.

“방에 있었네요?”

그래도 옷은 다 챙겨 입었으니 개의치 않고 물었다.

알도르 경이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알고 오신 거 아닙니까?”

얘도 삐졌네.

삐졌다기보단 화가 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내가 아카데미에 가는 걸 미리 말해 주지 않아서 화가 난 모양이네요. 미안해요, 알도르 경.”

“……괜찮습니다.”

알도르 경이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가씨께 제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니까요.”

“아니.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왜 다들 하나같이 이상한 오해를 하는 건지.

“어쩌다보니 말해 주지 못한 거예요. 알도르 경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는 겁니다.”

“방금 무슨 말 했어요?”

“아니요, 아무것도.”

알도르 경이 흐리게 웃었다.

“안 그래도 씻고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아, 그랬어요?”

“네. 내일 아가씨와 함께 아카데미에 간다는 말씀을 드리려고요.”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죠?”

“아가씨와 함께 아카데미에 간다고 말했습니다.”

“왜?”

“전 아가씨의 기사니 당연히 아가씨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같이 가야지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아카데미는 관계자 말고 못 들어가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기간제 교수 신청을 하려고 했습니다.”

진심이다.

알도르 경은 진심으로 아카데미까지 날 따라오려는 거야.

물론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완벽한 타지이니, 그가 같이 가 주면 좋지만.

“안 돼요.”

알도르 경은 날 따라오는 것 말고 달리 해 줄 일이 있었다.

“알도르 경은 여기 남아서 기사단을 돌봐야죠.”

페르데스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기사단 일까지 다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검술을 잘하지 못하니, 알도르 경처럼 앞에서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없는 동안 기사단을 잘 부탁해요.”

나는 알도르 경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내 부탁, 들어줄 거죠?”

알도르 경의 표정이 흐려졌다. 울음을 억지로 삼키는 것 같은 표정이다.

알도르 경은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손등에 정중하게 입을 맞췄다.

“주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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