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4/262)

89화

손등 위에 닿는 메마른 감촉이 낯설었다.

페르데스가 손등 키스를 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어색했다.

전에 페르데스가 체르노서를 상대할 때도 어색했는데, 이번에도 그러네.

왜 그런지 모르겠다.

페르데스는 똑같은데, 왜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손등에 입술이 닿은 시간은 수 초도 되지 않을 만큼 무척 짧았지만, 수 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의 고개가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눈이 마주친 그때.

꼬르륵-

“…….”

“…….”

침실을 가득 채우는 우렁찬 배꼽시계 소리가 들렸다.

페르데스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풉.”

“…….”

“아, 죄송해…… 푸훕.”

평소에 들었어도 웃겼을 텐데, 진지한 상황에 들으니 더 웃겼다.

계속 웃으면 페르데스가 싫어할 테니, 어떻게든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미처 참지 못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

페르데스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놓고 휙, 일어섰다.

또 삐졌네.

“안 웃을 테니 삐지지…… 풉.”

“……그 웃음이나 그치고 말하지?”

“흠흠, 아. 죄송해요.”

헛기침하며 가까스로 웃음을 삼킨 나는 페르데스의 팔을 잡았다.

“하루 넘게 굶었으니 배고플 만하죠. 식당으로 가요. 아니면 여기로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까요?”

“됐어. 자정이 가까워졌는데 식사는 무슨. 괜히 사용인들 귀찮게 하지 말고 내버려 둬.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먹으면 돼.”

하지만 배고프면 잠이 안 올 텐데.

쿠키라도 있으면 좋을까, 그의 방에는 먹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 방에는 있던가?

……없네. 나도 쿠키 같은 건 별로 즐기지 않아서, 방에 가져다 두지 않았다.

“정말 안 먹어도 괜찮겠어요?”

“괜찮…….”

꼬르륵-

“배꼽시계는 안 괜찮다는데요.”

웃으면서 말하자 페르데스가 얼굴을 토마토처럼 붉히며 고개를 훽, 돌렸다.

“시간이 늦어서 사용인들을 귀찮게 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는 거죠?”

나는 그런 페르데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니, 절 따라오세요.”

“뭘 하려고?”

“어허, 일단 가 보시면 압니다.”

나는 페르데스의 손을 잡은 채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페르데스에겐 그의 침실과 공동 침실이 연결된 길만 알려 주었지만, 공작저 밖과 연결된 출구도 있었다.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하는데, 길 외워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페르데스가 장난치듯이 대꾸했다.

“그런 생각 안 했었는데, 영애가 그렇게 말하니, 생각해야 할 것 같아.”

“하지 말라고 말한 건데.”

“내 귀에는 하라고 들렸어.”

아까와 같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대화였지만, 기분은 훨씬 나았다.

이런 대화는 계속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출구였다.

페르데스는 벽처럼 위장하고 있는 출구를 쓱 보더니 내게 물었다.

“이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 사람이 영애 말고 또 누가 있어?”

“아니요. 저밖에 없어요. 이건 레오폴드 공작가의 혈육만 아는 통로거든요.”

“그럼 영애가 최근에 이곳을 통해 몰래 빠져나갔다는 거네.”

어라,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여기.”

페르데스가 출구 틈에 낀 이끼를 가리켰다.

“여기만 이끼가 적다는 건 최근 문이 열려서 뜯겨 나갔다는 의미지.”

“……왜 그렇게 관찰력이 좋은 거예요?”

쓸데없이, 라는 말을 삼키며 묻자 페르데스가 웃었다.

“딱히 좋은 편은 아닌데, 영애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지.”

“대답이 이상한데.”

“영애는 말이 짧아졌어.”

“페르데스 님도 말을 짧게 하는데 저도 한 번씩 짧게 할 수 있잖아요.”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페르데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그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아쉽네. 반말하는 거 허락해 주려고 했는데.”

“진짜요?”

“아니, 농담.”

내가 장난쳤다고, 똑같이 장난치는 거 봐.

내가 눈을 흘기자 페르데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서 이제 어디 갈 거야? 혹시 전에 갔던 그 가게?”

“아니요. 거기는 이 시간에 안 해요.”

“그럼 술집인가?”

“미성년자를 데리고 술집에 갈 리가 없잖아요. 가 보면 아니까 일단 따라와요.”

이러고 있다가 그곳이 문을 닫으면 큰일이니 페르데스의 손을 잡은 채 성큼 걸어갔다.

어두운 거리를 비추는 달빛을 이정표 삼아 약 이십 여분 쯤 걸어가다가 내가 멈춘 곳은 녹색 지붕의 5층 건물 앞이었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간판을 본 페르데스가 중얼거렸다.

“여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데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여기서 음식도 팔아?”

“그럼요. 홀에서 숙박객들을 대상으로 음식을 팔죠.”

“하지만 우리는 숙박 안 하잖아. 그래도 파는 거야?”

“원래는 안 팔지만, 저한테는 팔아요.”

“무슨…… 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페르데스가 픽, 웃었다.

“그래, 사랑하고 아끼는 아가씨에겐 팔아야지.”

“사랑하고 아끼는 아가씨?”

“영지민들이 영애를 그렇게 부르더라. 사랑하고 아끼는 아가씨라고.”

이거 참, 분명 페르데스보다 내가 더 오래 살았는데 그가 영지민들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왤까.

“들어가자.”

페르데스가 이곳저곳에 흠집이 난 나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이러니까 내가 그를 따라온 것 같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페르데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홀은 한적했다. 앉아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운터에는 이 여관의 주인 아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 앞으로 다가가 직원을 부를 때 쓰는 종을 남자의 귀에 대고 흔들었다.

딸랑, 딸랑-

“으악, 어서 오세…… 으악.”

종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일어선 남자는 의자에 발이 걸려 그대로 넘어졌다.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쿵, 하는 소리가 조용한 홀에 널리 울려 퍼졌다.

조금 놀래켜 주려고 한 건데, 넘어지다니.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 역시 깜짝 놀라며 카운터에 상체를 걸치고 안쪽 상황을 확인했다.

남자가 의자와 함께 뒤엉켜 쓰러져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아가씨.”

날 알아보는 걸 보니 괜찮긴 하나 보네.

“미안. 내가 너무 놀라게 했나 보다.”

일어선 남자는 세게 찧은 엉덩이가 아픈지 그곳을 만지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아가씨가 이러시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남자의 시선이 내 옆에 있는 페르데스에게 닿았다.

“옆에 분은……?”

“내 약혼자.”

“아아, 그 소문의.”

바로 페르데스를 알아본 남자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잭의 여관입니다.”

“잭……?”

“신기하죠? 이곳 여관 주인의 이름도 잭이에요.”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한 이름이니까.”

“그렇긴 하죠. 아, 지금 식사 되지?”

“되긴 하는데 어머니가 주무셔서 간단한 것만 돼요.”

“상관없어. 대충 배를 채울 수 있는 걸로 가져와.”

남자는 알겠다고 말한 뒤, 안쪽으로 사라졌다.

전부 빈자리니 눈에 띄는 아무 자리나 앉았다.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은 페르데스가 물었다.

“여기도 자주 오나 봐?”

“예전에는 자주 왔어요.”

페르데스가 입술을 달싹였다가 침묵했다.

내가 누구랑 왔는지 궁금한 모양이네.

“아버지랑도 오고, 알도르 경이랑도 오고, 올벤 경이랑도 왔어요.”

“올벤 경?”

“저한테 검술을 가르쳐 준 스승님이에요. 알도르 경 이전에 부단장이기도 했고요.”

“아아.”

페르데스가 또 내 눈치를 살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제 눈치 보지 말고 말해요.”

“……괜히 아픈 곳을 건드릴까 봐 그러지.”

“괜찮아요. 페르데스 님이 제 눈치를 보는 게 더 신경 쓰이니까.”

나름 배려해서 말한 건데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페르데스가 발끝으로 탁자 다리를 툭 건드렸다.

“올벤 경은 어떤 사람이었어?”

물어볼 거면서 괜히 심통은.

“으음, 어떤 사람이었더라.”

나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며 말했다.

“아주 올곧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아, 너무 올곧아서 다른 기사들에게 꼬장꼬장한 노친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죠.”

“나이가 많았어?”

“아버지 또래셨어요.”

“별로 나이 안 많네.”

“실제로 올벤 경을 봤으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걸요?”

오래된 추억을 풀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야채와 얇게 저민 햄을 끼운 샌드위치에 수프.

간단하지만 알찬 구성이었다.

맛도 나름 나쁘지 않았지만, 페르데스의 입맛에는 어떨지 모르니 그가 샌드위치를 먹자마자 물었다

“어때요?”

“괜찮네.”

“다행이네요.”

그제야 안심하며 음식을 먹었다.

배꼽시계가 울렸다는 건, 그만큼 배가 고프다는 의미인데 페르데스는 샌드위치를 딱 한 입만 먹고 먹지 않았다.

“샌드위치가 입맛에 안 맞으세요?”

여기까지 데리고 온 날 생각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건가?

“아니.”

“그런데 왜 안 드세요?”

“그냥.”

페르데스가 검지로 샌드위치를 툭 건드렸다.

“이거 다 먹으면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

그러니까 나랑 좀 더 놀고 싶다는 건가.

자정이 넘은 시간.

밖에서 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특히 아직 어린 페르데스가 다닐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샌드위치를 다 먹으면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만 놀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니까.

모레,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이제 내일이었다.

“이거 먹고 재미있는 곳 가요.”

내일 아침이 밝아 오면 아카데미로 가야 하니 조금만 탈선하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