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뭐든 해도 좋아요. 다 들어줄게요.”
“…….”
마음을 활짝 열고, 대화 신청을 했건만,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다.
“뭐든 말해도 좋아요. 싫은 점이라던가, 아니면 저한테 섭섭했던 거라던가.”
“……섭섭.”
섭섭이라는 단어를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계속 읊조리던 페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섭섭했던 것 같아.”
“무엇이?”
“영애가 아카데미에 가는 게.”
아, 이제 드디어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겠구나!
“제가 아카데미에 가는 게 그렇게 섭섭하세요?”
반색하며 묻자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섭섭하다는 데 왜 그렇게 기뻐해?”
“그게 기쁜 게 아니라 페르데스 님이 제대로 말해 주신 게 기쁜 거예요.”
“……이게 기뻐?”
“그럼요! 전 페르데스 님이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 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말하자 페르데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혼란스러웠어.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이게 무슨 감정인지, 왜 영애가 아카데미에 가는 게 싫은지…… 몰라서 혼란스러웠어.”
그래서 침실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내 얼굴을 보면 이상한 말을 쏟아 낼까 봐 피했던 거라고.
다른 사람들을 피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지금도 혼란스럽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페르데스는 두서없이 그의 감정을 쏟아 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그가 뱉는 말과 표정에서 확실하게 느껴졌다.
“제가 실수했네요.”
마침내 그의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자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아니, 당분간은 숨기려고 했던 건 맞아요.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으니까.”
특히 한창 아카데미에 입학 서류를 넣고 있을 땐, 황제의 감시역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더욱 조심해야 했다.
“저도 페르데스 님에게 말해야지,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왜?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러게, 나는 왜 페르데스에게 좀 더 빨리 말하지 못했는가.
단순히 시기가 맞지 않아서라기엔 너무 늦게 말했다.
좀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말만.”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말뿐이지.”
“에이, 진짜. 어떻게 하면 제 말을 믿어 줄래요?”
“…….”
거봐. 방법도 없으면서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긴.
“제가 전에 말했었죠. 복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페르데스 님이 유일하다고. 페르데스 님을 믿기 때문에 말한 거라고.”
끄덕-
“이것도 믿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차피 보낼 사람이니 이런 것까진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섭섭해하는 그를 보니 왠지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라면 믿을 수 있어서.
세 번째 생에서 완전히 박살 났던 믿음이라는 감정이 다시 생겨서 나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하고 싶은 복수는…… 단순히 황제를 죽이는 게 아니에요.”
체르노서의 손에 비참하게 죽고 다시 시작한 두 번째 삶.
그땐 황제가 너무 밉고,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빌어먹을 목숨, 또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러려고 하니 너무 무서웠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 끔찍한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남는 데 집중했다.
알도르 경과 결혼하고, 어떻게든 황제의 눈을 피해 살아남으려고 발악했었다.
하지만…… 죽었지.
세 번째에서도 황제는 나를 또 비참하게 죽였다.
그때 눈을 감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겐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땐 반드시 황제에게 복수하리라고.
생을 반복하면서 커져 버린 복수심은 단순히 황제의 목숨을 빼앗는 걸로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했다.
“황제의 목숨은 물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로.”
“빼앗……는다고?”
“네.”
나는 떨리는 황금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엘레프테리아 제국을 대륙의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게 제가 바라는 복수입니다.”
“……!”
페르데스의 눈이 한계 그 이상으로 커졌다.
역시 놀라는구나.
하긴, 반역과 다름없는 말을 했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누군가 들으면 정신이 나갔다고, 무모한 짓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엘레프테리아 제국을 없애서, 황제가 가진 모든 걸 빼앗을 생각이었다.
그게 내가 바라는 진정한 복수였다.
“…….”
내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듯 페르데스는 멍하니 날 바라보다가 허공을 보다가, 땅을 봤다가, 다시 날 쳐다봤다.
“그래서…… 제국 기사 아카데미가 아니라 연합 기사 아카데미에 가는 건가?”
떨리는 입술이 벌어지며 그보다 더 떨리는 말을 토했다.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연합국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연합국의 힘을 빌릴 생각은 있지만, 제가 연합 기사 아카데미에 가는 거랑은 별개에요.”
“별개라고?”
“네. 저도 웬만하면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가고 싶어요.”
기초 과목이나 이런 건 대륙 어딜 가도 비슷했지만, 사교 예절이나, 댄스 같은 건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만큼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익숙한 곳에 가고 싶었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황제가 제가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걸 절대 허락해 주지 않을걸요.”
“어째서?”
“그야 제가 기사가 되면, 레오폴드 공작위를 이을 자격을 갖추게 되니까요.”
“지금도 자격은 있잖아.”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입술에 쓴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건 페르데스 님뿐이에요.”
“영지민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정하죠. 영지민들과 페르데스 님뿐이에요.”
“기사들도 그렇게 생각해.”
기사들까지?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난데없기도 했고.
하지만 페르데스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 사실이겠지.
“그래요. 제 주변 사람들은 제가 공작이 되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황제는 그걸 바라지 않아요.”
“왜지? 영애가 여자라서?”
“표면적인 이유는 그래요.”
그 시커먼 속은 모르겠지만, 황제가 반대하는 이유는 일단 내가 여자인데다가 기사 작위가 없기 때문이었다.
“귀족회도 마찬가지죠. 그러니 기사 작위를 무조건 따려고요. 그래야 공작위를 이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해가 안 돼.”
페르데스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제국을 망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 제국의 공작이 될 필요가 없잖아.”
“전 제국의 공작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이 땅의 주인이 되고 싶은 거지.”
레오폴드 공작령.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모님과의 소중한 추억이 있는 곳.
나를 사랑해 주는, 나를 믿고 따라 주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삶고 살아가는 소중한 땅.
이곳을 황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절대로.
* * *
휘잉.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스산했다. 마치 귀신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그 소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이야기에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아델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델이 황제에게 복수하고 싶어 한다는 건 진작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했다.
황제를 조금 골탕 먹이거나, 좀 더 나아가면 황제의 목숨을 빼앗는 것 정도.
그것도 큰일이지만, 하여간 제국을 무너뜨리겠다는 저런 말도 안 되는 포부를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만약 처음에 저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지금은?’
문득 마음속의 자아가 그에게 물었다.
‘지금은 그녀의 손을 계속 잡을 거야?’
그건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한 번 빠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늪 같기도 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늦지…… 않은 걸까.
‘놓고 싶다면 놔 버려. 그녀의 손을 놓고 도망치는 거야.’
“도망치고 싶으세요?”
불쑥 가르고 들어온 목소리에 페르데스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를 담고 있는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거친 풍랑을 만난 것처럼 요동치는 페르데스와 달리 그녀는 뿌리를 깊게 내린 고목처럼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진심을 들으니, 제 손을 놓고 도망치고 싶으세요?”
도망치고 싶냐고?
당연히…….
“……아니.”
그녀가 날 믿지 않는 건 아닌지.
그래서 자꾸 비밀을 만드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저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말했다는 건, 모든 걸 다 털어놓았다는 건 그만큼 자신을 믿고 있다는 의미.
“도망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도망치겠는가.
절대 도망칠 수 없었다.
아니,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 지옥 같던 황궁에서 구해 준 은인인데, 은혜를 갚아야지.
‘은혜.’
정말로 이건 은혜를 갚기 위한 결정일까?
모르겠다.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그녀를 의심했던 매 순간이 부끄럽다는 거였다.
섭섭하게 생각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고.
그러니깐 앞으로…….
“믿을게.”
페르데스가 아델과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앞으로 영애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게.”
그리고 새하얀 손등 위에 메마른 입술을 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