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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82/262)

87화

중독돼서 꼬박 하루 동안 정신이 없었던 그 날.

[괜찮아요.]

페르데스는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다정한 손길을 기억했다.

[다 괜찮을 거예요.]

어떻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그렇게 다정한 손으로 자신을 만져 주는 사람은 아델밖에 없는 것을.

그래서 아델이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했다.

그녀의 손길을 받으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껴서.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껴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느껴서 좋아했는데…….

‘그녀가 떠난다고?’

그것도 기사 아카데미로?

페르데스는 아랫입술이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며 계속 달렸다.

사실 떠난다고 표현하기엔 애매했다.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건, 졸업하면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때 내가 없을 뿐이지.’

기사 아카데미 교육 과정은 6년이었고, 페르데스가 아델의 곁에 있기로 한 시간은 그가 성년식을 치를 때까지였다.

그러니 아델이 기사 아카데미에서 돌아올 땐 자신은 이곳에 없었다.

그래. 아델의 곁에 내가 없어.

내 곁에 아델이 없고.

“…….”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문장에 페르데스는 우뚝 멈춰 서서 차오르는 숨을 골랐다.

어둡게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을 훑었다.

헤어지는 걸 약속하고 만난 사이였다.

아델은 페르데스가 성년식을 치르면 그를 자유롭게 풀어 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웃기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아델이 원망스러웠다.

내용을 듣자 하니 이제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남짓.

아델이 그곳에 가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사흘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여태까지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니.

아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런 결정을 하다니.

내가, 내가……!

“약혼자인데…….”

마그마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마음과 달리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맥이 없었다.

이성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이름뿐인, 자유를 걸고 계약한 약혼자이면서 이런 주장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아서 브레이크를 건 거였다.

“하.”

새삼 자각한 사실이 너무 짜증 나서 페르데스는 머리를 막 헤집었다.

생각해 보면 아델은 예전부터 그녀가 떠난다는 걸 넌지시 표현하고 있었다.

페르데스에게 은근슬쩍 그녀가 할 일을 떠넘긴다던가.

2년 뒤의 계획을 미리 세워 놓는다던가.

전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거였어.

“바보같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문득 자신이 너무 한심해져서 페르데스는 벽에 쾅쾅 머리를 박았다.

“페르데스 님!”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본 하인이 깜짝 놀라며 그를 말렸다.

“괜찮으십니까?”

“…….”

페르데스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인형처럼 우두커니 서 있자 하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혹시 백치 병이 다시 도지신 건가?”

페르데스가 백치 가면을 조금씩 벗으면서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 사이엔 기괴한 소문이 돌았다.

바로 페르데스가 백치 병에 걸렸다가 아델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분에 완치됐다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정상적이었던 사람이 어떤 이유로 정신 연령이 어려져 백치처럼 생활한다는 기록이 있었다.

멀쩡한 사람도 백치가 되는데, 백치가 정상이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페르데스가 백치 병에 걸렸다가 나았다고 생각했다.

페르데스가 너무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면, 황제의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해서 더욱 그 소문이 진실처럼 굳어 갔다.

그래서 페르데스가 지금 이러는 것도 백치 병이 도져서 그렇다고 생각한 하인은 지나가는 다른 하인에게 잭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페르데스 님!”

하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잭이 단걸음에 달려와 페르데스를 침실로 데리고 갔다.

“괜찮으세요, 페르데스 님?”

잭이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페르데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이쿠, 머리를 찧었다더니 정신이 이상해지신 건가?”

“…….”

“이거 몇 개로 보여요?”

“…….”

“세상에 눈도 안 보이시나 봐. 어떡하지? 의원님을 불러야 하나? 아니면 아가씨한테…….”

탁-

아가씨, 아델이 언급되자 페르데스가 비로소 움직였다.

그는 잭의 팔을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잡으며 말했다.

“……말하지 마.”

“으윽, 아, 아파요. 페르데스 님.”

“말하지 말라고.”

“네, 네. 알겠습니다!”

잭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지 말라는 건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잭의 팔을 놔준, 페르데스가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잭은 아픈 팔을 만지며 그런 페르데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

“의원님을 불러오지 않아도 되는 거 맞죠?”

“…….”

“페르데스 님. 말이라도 좀 해 보세요.”

조용히 있고 싶은데 잭이 계속 찡얼거리자, 페르데스는 격하게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그리고 잭의 등을 떠밀어 침실 밖으로 내쫓은 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았다.

어찌나 세게 닫았는지 문고리가 살짝 흔들릴 정도였다.

“어, 어? 페르데스 님?”

잭은 당황하며 다시 문을 열려고 했지만, 안에서 걸어 잠근 문은 열리지 않았다.

똑똑-

“페르데스 님.”

노크를 해 봐도 응답이 없었다.

몇 번 더 해 볼까 싶다가도, 페르데스가 몹시 살벌하게 저를 노려봤던 걸 떠올린 잭은 소름이 돋는 팔을 쓰다듬으며 돌아섰다.

“사춘기가 오신 건가…….”

* * *

페르데스는 그날 이후,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독을 먹고 심하게 앓은 날에도 빼먹지 않았던 훈련까지 빼먹고 틀어박혀 있는 데다가.

식사도 거의 안 한다고 하니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아카데미에 가는 게 충격적이었나?

“그럴 리가.”

고작 아카데미에 가는 것 때문에 그렇게 충격을 받을 리가 없었다.

역시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오해를 푸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의 침실을 몇 번 찾아갔지만, 굳게 닫힌 문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열어 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열고 들어가는 수밖에.

페르데스의 침실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마스터키로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가거나.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가거나.

안 그래도 페르데스가 진한 반항심을 품고 있는데, 전자는 그 반항심을 너무 키울 것 같아 후자를 선택했다.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간다는 건 똑같지만…… 어쨌거나 강제로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었으니 그것에 위안으로 삼으며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저택의 비밀 통로는 혹 있을지 모르는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금까지 쓴 적은 거의 없었다.

쓰일 일이 뭐가 있겠는가.

레드 드래곤이 열심히 지켜 주고 있는데.

정말 지켜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페르데스의 침실에 도착했다.

조용히 비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중앙 부분이 볼록 튀어나온 게 보였다.

침대에 누워 있구나.

자는 것일 수도 있으니 나는 신발을 손에 들고, 까치발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세 걸음.

두 걸음.

한…….

“뭐 하는 거야?”

“!”

난데없이 뒤에서 페르데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날 보고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언제부터 거기에…….”

“아까부터.”

“그럼…….”

이 침대 안에 불룩 튀어나온 건 뭐지?

나는 침대를 덮고 있는 이불을 휙 걷었다.

그러자 돌돌 뭉쳐 있는 베개가 보였다.

그러니까 베개로 사람이 누워 있는 척 연출했다는 건가.

“왜 이런 연출을 한 거예요?”

“벽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혹시 침입자인가 싶어 숨어 있었지.”

“그게 들려요?”

“응.”

나는 안 들리던데, 신기하네.

눈치만 빠른 게 아니라 청력도 좋은 건가.

“그래서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요. 페르데스 님이랑 이야기하려고 왔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지금 밖에 시간이 안 나서요.”

나도 좀 더 일찍 오고 싶었지만, 낮에는 일하느라 좀처럼 시간을 뺄 수가 없었다.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을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시간을 내겠는가.

억지로 쥐어짠다면 일, 이십 분 정도는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 페르데스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이 시간에 온 거였다.

내 대답을 들은 페르데스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픽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래. 바쁘겠지.”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곧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하는데 당연히 바쁘겠지.”

“왜 그렇게 비틀어진 거예요?”

나는 페르데스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게 그렇게 싫으세요?”

페르데스는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며 대답했다.

“싫다곤 말 안 했는데.”

“말은 안 했지만, 표정으로 표현하고 있죠.”

“표현도 안 했어.”

“하고 있는데요.”

“안 했다니까.”

“하고 있…… 아, 됐어요.”

계속 이야기를 해 봤자,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될 뿐 결론은 나지 않을 것 같아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여간 제가 아카데미에 가는 게 싫지 않다는 거죠?”

“응.”

“그럼 좋으세요?”

“아니.”

“그럼 싫은 거잖아요.”

“아닌데.”

……도대체 이 의미 없는 대화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일단 그의 눈을 똑바로 봐야,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나는 페르데스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

그러자 페르데스가 갓 잡은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며 멀찍이 떨어졌다.

“왜, 왜 여기 와서 앉아!”

“페르데스 님이랑 얼굴 보고 이야기하려고요.”

“저기 앉아도 얼굴 보고 이야기할 수 있잖아.”

“페르데스 님이 절 안 봐주시잖아요.”

나는 거리를 단번에 좁힌 뒤, 그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우리 진솔하게 대화 좀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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