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1/262)

86화

일순간 훈련장에 정적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페르데스가 알도르 경에게 대련 신청을 하는 건, 거북이가 토끼에게 달리기 경주 신청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이길 가능성이 1%도 없는, 아주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에 다들 당황하며 침묵했다.

나 역시 당황하며 페르데스를 말렸다.

“페르데스 님은 알도르 경을 절대 이길 수 없어요.”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페르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음에 안 들면 어쩌겠는가. 사실인걸.

괜히 덤볐다가 페르데스가 또 다치는 것보다 나았다.

“확실히 이길 수는 없겠지.”

“그…….”

“하지만 한 대 정도는 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다른 기사들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페르데스 님. 너무 무모합니다.”

그리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습니다. 부단장님이 얼마나 강하신데 검술 대련이라니…….”

“아가씨께 멋지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오히려 더 망신을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도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한 10년쯤 더 수련하신 뒤에 도전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컥.”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그 기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차라리 저랑 대련하시죠.”

페르데스를 호위하며 나름 친해진 에런 경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제가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에런 경 역시 기사단 내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페르데스가 이길 가능성은 0.1%도 없었다.

그런데 에런 경이 나선 건, 알도르 경이 절대 페르데스와 대련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알도르 경은 상대가 설령 초보라도 대련할 땐 진지하게 상대했다.

그래서 울린 상대가 몇이더라.

입단한 첫날, 용감하게 알도르 경에게 덤볐다가 호되게 맞고 3주 내내 침대 신세를 진 신입 기사도 있었다.

물론 페르데스는 기사가 아니고, 알도르 경은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으니 봐줄 가능성…….

“…….”

……같은 건 없구나.

페르데스를 내려다보는 알도르 경의 눈빛을 본 나는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알도르 경은 페르데스와 겨루게 된다면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막아야 했다.

“절대 안 돼요.”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걸 막았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페르데스의 진심을 읽은 알도르 경이 그의 대련 신청을 받아들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도르 경은 고개를 돌렸고, 페르데스는 불만 어린 눈으로 날 쳐다봤다.

“역시 제가…….”

“에런 경도 안 돼요.”

슬그머니 손을 들고 나서려고 했던 에런 경이 쭈굴거리며 들어갔다.

“막내야. 네가 한다고 해 봐.”

“그래. 막내라면 그나마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 기사들은 막 들어온 신입 기사를 부추겼다.

“다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신입 기사라고 해도 기사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기사였다.

검술 기본자세도 다 익히지 못한 페르데스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알도르 경을 상대할 때보단 낫겠지만…… 맥도 못 추고 목검에 두들겨 맞을 게 눈에 훤했다.

“이만 가요, 페르데스 님.”

괜히 일이 이상하게 번지기 전에 페르데스를 데리고 가는 게 맞다고 판단한 나는 페르데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검술 대련을 하고 싶은지 페르데스가 움직이지 않았다.

“페르데스 님이 해 주실 일이 있어요.”

해 줄 일이 있다고 하니 그제야 고집스럽게 땅에 붙이고 있던 발이 움직였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니까.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페르데스의 손을 잡은 채 기사단을 나왔다.

기사단을 나온 뒤에는 손을 놔도 괜찮았지만, 왜인지 페르데스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어서 그냥 계속 잡고 걸었다.

“갑자기 알도르 경에게 검술 대련 신청은 왜 한 거예요?”

“……그냥.”

페르데스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애가 날 너무 허약하게 보는 것 같아서.”

고작 그런 이유로 무모한 짓을 하려고 했단 말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멈춰 서서 페르데스를 돌아봤다.

그도 이상하다는 걸 알았는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아, 정말이지.

“페르데스 님을 허약하게 본 적 없어요.”

“그렇게 봤는데.”

“그건 독을 먹어서…….”

“일주일도 넘은 이야기야.”

그건…… 그렇지.

“그리고 내가 독을 먹어서 약해진 게 걱정되면 일은 왜 그렇게 많이 시켜?”

“음.”

할 말이 없네.

사실 일도 안 시키고 싶었지만, 이제 남은 시간이 정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시킨 거였다.

떠나기 전에 페르데스에게 전부 알려 줘야 했으니까.

“죄송해요.”

“알면 말해 줘.”

“무엇을요?”

“2년 뒤의 계획서를 미리 짜 두는 이유가 뭐야?”

아, 그거.

어쩐지 계획서를 줬는데도 아무 말이 없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속에 두고 있었구나.

“그건…….”

“아가씨!”

시기상 슬슬 말해 줘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러려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기사단에서 서무를 보는 관리였다.

“안 그래도 아가씨를 뵈러 집무실에 갔는데 기사단에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가던 참이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한테 볼일이 있었지.

“그런데…….”

관리가 페르데스와 꼭 잡은 손을 보더니 이상하게 웃었다.

이런. 또 일하던 와중에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돌겠네.

뭐, 딱히 상관없지만.

나는 페르데스의 손을 놓으며 관리에게 말했다.

“다시 들어가죠.”

“네, 아가씨.”

“페르데스 님은 씻고 집무실로 오세요.”

땀을 많이 흘린데다가 훈련복을 입고 있으니까.

페르데스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지 군말 없이 저택으로 들어갔다.

나는 관리를 데리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휘유.”

관리는 창가에 놓인 해바라기 꽃병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고백받으셨나 봐요.”

“고백? 아.”

내가 해바라기 축제 때, 수도를 다녀온 일을 알고 말하는 거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하지만 해바라기 축제에 다녀오셨잖아요.”

“축제에 갔다고 다 고백을 받지는 않아요.”

“꽃도 받으셨죠.”

“저건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준 거예요.”

관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해바라기를 주는 사람이 있어요?”

있지. 페르데스라고.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가지고 온 서류 이리 줘요.”

내가 손을 내밀자 관리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왜 저래?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빨리.”

“네, 네.”

관리는 여전히 이상한 눈을 하며 내게 서류를 줬다.

나는 찝찝한 기분을 애써 삼키며 일단 서류를 확인했다.

“아가씨, 그거 아세요?”

팔랑-

“해바라기의 꽃말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요. 그래서 해바라기 축제 때 짝사랑하는 상대한테 주는 거죠. 내가 이만큼 당신을 기다렸다, 이런 의미로.”

팔랑, 팔랑-

“해바라기 숫자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지는데 4송이면 언제, 어디서라도 당신을 바라본다는 의미고, 999송이는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바라본다는 의미래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상한 소리를 할 생각인지.

성가셨지만, 관심을 주면 더 할 것 같아 무시하고 계속 서류를 확인했다.

“그래도 역시 한 송이가 가장 의미가 깊은데, 페르데스 님이 아가씨에게 한 송이만 준 걸 보면 역시 아가씨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나 봐요.”

“…….”

페르데스가 저 해바라기를 줬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약간 놀라며 쳐다보자 관리가 손뼉을 짝 쳤다.

“역시 페르데스 님이 주신 거군요!”

……그냥 찔러 본 거였나.

그의 얕은수에 넘어간 내가 한심해서 한숨을 푹 내쉬며 서류를 덮었다.

“나중에 검토하고 가져다줄 테니, 이만 가 봐요.”

지금 보고 바로 주는 게 편했지만, 계속 뒀다간 이상한 소리만 할 것 같아 내보냈다.

그리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다시 서류를 읽으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라였다.

“아가씨, 편지가 왔어요.”

내게 편지를 가져다주는 일은 보통 하네스가 하지만, 그가 너무 바쁠 땐 사라가 했다.

“이리 줘.”

나는 사라를 내보내고 편지를 확인했다.

왕관에 꽂힌 검.

연합 왕실 기사 아카데미에서 온 편지였다.

실링 왁스로 밀봉된 편지 봉투를 뜯는 순간.

파앗-

편지가 제멋대로 허공에 떠오르더니 편지 내용을 읽었다.

[아델 레오폴드 영애에게 알립니다.]

마법이구나.

이런 마법이 있다는 건 들어 봤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지라 신기했다.

나는 마치 편지에 홀린 것처럼 빤히 쳐다봤다.

[아카데미 입학식은 9월 1일, 오전 10시. 모든 입학생들은 그때까지 아카데미에 도착하셔야 합니다. 단 1초라도 늦으시면 입학이 취소된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적힌 내용을 다 읽자 편지는 팔랑거리며 다시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내용은 다 들었지만, 다시 확인하기 위해 편지를 꺼내려는 그때.

“……뭐야.”

문 쪽에서 차가운 냉기가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아.”

언제 온 거지.

나는 당황하며 페르데스를 쳐다봤다.

마주친 페르데스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잭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같은 눈이었다.

설마 내가 그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아카데미에 간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오해는 바로 푸는 게 좋을 것 같아 일어서는데, 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페르데스는 그대로 돌아서서 집무실을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페르데스 님!”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페르데스를 쫓아갔지만, 이미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쫓아갈까 싶다가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 일단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맥없이 꺾여 바닥에 떨어진 해바라기가 보였다.

아까까진 멀쩡했는데, 어째서.

나는 가까이 다가가 해바라기를 주웠다.

그새 시든 노란 꽃잎이 마지막에 봤던 페르데스의 눈동자와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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