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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80/262)

85화

수도에는 크고 작은 축제들이 달마다 열렸는데, 8월에는 ‘해바라기 축제’가 열렸다.

해바라기 축제 때, 평소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어 연인들의 축제라고도 불렸다.

하필 내가 수도에 온 오늘이 해바라기 축제라서 거리엔 사람들이 넘쳐났다.

도저히 마차를 타고 다닐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황궁에서 많이 걸었는데, 또 걸어야 하네요.”

“그래서 싫어?”

“싫다기보다 페르데스 님이 걱정돼서 그러죠.”

“내가?”

“네. 회복한 지 얼마 안 돼서 몸 상태가 아직 안 좋으시잖아요.”

페르데스가 픽, 웃었다.

“걱정하지 마. 튼튼하니까.”

“겉으론 튼튼해 보여도 속은 독 때문에 완전히 상하셨죠.”

“그거라면 해독이 다 됐어.”

“주치의는 아직 안 됐다고 하던데요.”

페르데스가 나랑 같이 수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함하며 해독제와 보약을 잔뜩 챙겨 주던 주치의의 모습이 눈에 아직 선했다.

“건강하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못 믿네.”

“주치의가…….”

“내 몸은 주치의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내가 자꾸 주치의를 들먹이자 듣기 싫었는지 페르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묵묵히 뒤따라오는 알도르 경과 에런 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알도르 경과 에런 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요.”

“네. 건강해 보이시네요.”

첫 번째 대답이 알도르 경이었고, 두 번째 대답이 에런 경이었다.

상반된 대답을 들은 페르데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생각도 모시는 주인을 따라가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니야. 저 두 사람을 보면 맞는 것 같아.”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얼른 가요. 이러다 기차 놓치겠어요.”

수도에서 마티나 영지로 가는 기차는 하루에 한 번밖에 없었다.

이번에 기차를 놓치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니 나는 페르데스의 등을 떠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덕분에 늦지 않게 기차역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꽃 사세요, 오빠.”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소녀가 해바라기 한 송이를 페르데스에게 내밀었다.

“해바라기로 고백하면 이뤄진대요!”

댕, 댕-

그때, 기차역의 입구에 있는 커다란 시계가 힘차게 울며 5시를 알렸다.

곧 기차가 출발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만 가요.”

“잠시만.”

꽃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닌지라 가려는데 페르데스가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이거면 되겠지?”

금화를 본 소녀의 얼굴이 한순간 달덩이처럼 밝아졌다.

소녀는 페르데스가 마음이 바꿀세라 냉큼 금화를 가져간 뒤, 그 손에 해바라기를 쥐여 주고 빠르게 사라졌다.

어찌나 빠른지 붙잡을 틈도 없었다.

페르데스가 그런 소녀를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토끼 같네.”

“금화 같은 걸 쥐여 주니까 그렇죠. 해바라기를 사실 거였으면 1실링으로 충분했어요.”

20실링이 1골드니, 페르데스는 해바라기를 무려 20배나 비싸게 주고 산 것이다.

내가 타박하자 페르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 그냥 불쌍한 아이한테 적선한 셈 치지 뭐.”

저렇게 어린아이에게 큰돈을 쥐여 주는 건 오히려 위험했다.

이 장면을 본 누군가가 소녀에게 돈을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

“이런 방식의 적선은…….”

그 부분을 말해 주려는데 페르데스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방금 산 해바라기였다.

이걸 왜 나한테?

“기차 시간 다 됐다.”

잠깐 당황한 사이, 페르데스가 해바라기를 쥐지 않은 내 손을 덥석 잡고, 기차역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 * *

귀족들과 회의를 하고 황제궁으로 돌아온 다이몬은 아델이 황후를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후를 찾았다.

“폐하?”

황제와 황후는 부부였지만, 사랑 없이, 오로지 서로의 배경만 보고 정략 결혼한 부부였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잠자리를 가진 것도 황손을 가지기 위해서일 뿐.

황태자와 2황자 체르노서, 2황녀까지 낳자 다이몬은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 황후를 찾지 않았고.

황후도 구태여 그의 사랑을 바라거나, 애정을 갈구하지 않았다.

그저 필요할 때만 서로를 찾는, 형식적인 부부로 살아왔다.

특히 다이몬이 먼저 황후궁에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부르거나, 시종을 통해 말을 전했다.

그런데 다이몬이 예고도 없이 황후궁에 찾아오니, 황후는 깜짝 놀라며 그를 맞이했다.

놀라긴 했지만, 다이몬이 찾아온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코비 알슈타인이 페르데스에게 독을 먹인 일로 온 거겠지.

그래도 황제궁으로 부를 줄 알았는데, 그가 직접 이곳에 찾아온 건 조금 의외였다.

“이쪽으로…….”

“됐고.”

다이몬은 온기라곤 조금도 깃들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델 레오폴드 영애가 황후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장 코비 알슈타인의 일을 추궁할 줄 알았는데, 아델의 일을 거론하니 황후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뭐 때문에 찾아온 거지? 레오폴드 영애가 먼 공작령에서 이곳까지 올 일이면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황비들과 달리 황후는 정치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그러니 그녀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귀족은 하루에도 열 명 가까이 됐다.

일주일이 넘는 먼 곳에서 오는 귀족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러나 다이몬은 그 일 가지고 황후에게 그 사람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뒷조사했으면 했지.

그런데 왜 아델 레오폴드는 물어보는 거지?

애초에 다이몬이 아델의 결혼을 신경 쓰는 것부터 이상했다.

말로는 황태자를 구해 준 은인이라 그렇다고 말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다이몬은 정작 황태자비를 정할 때 아무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델의 결혼은 무척 신경을 쓰는 데다가 페르데스에겐 몸을 챙기라며 약까지 만들어 줬다.

단순히 몸을 챙기는 게 아닌 아이를 잘 만들게 도와주는 약이긴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다이몬이 직접 챙겨 줬다는 거였다.

“코비 알슈타인의 일로 찾아온 거였습니다.”

“코비 알슈타인?”

“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자가 겁도 없이 페르데스 황자에게 독을 먹였지 뭡니까.”

“아, 그런 일이 있었지.”

다이몬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약을 챙겨 주기까지 한 황자가 독을 먹었다는데, 그 일을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니.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자가 저를 배후로 지목하는 바람에, 레오폴드 영애께선 사건의 경위를 알고자 절 찾아온 거랍니다.”

“음, 황후가 그런 거요?”

“그럴 리가요. 그자가 어떻게든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막말을 뱉는 거랍니다.”

“그래?”

미심쩍다는 시선이 제 몸을 훑고 지나가자 황후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더욱 화사하게 웃었다.

“그건 조사관의 역할일 텐데 왜 영애가 직접 온 거지?”

“사랑하는 약혼자의 일이니 직접 나선 게지요.”

“아아.”

황후는 그 순간, 다이몬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올라가는 걸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오해는 잘 풀고 돌려보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흐음, 그렇군.”

다이몬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뒤, 황후궁을 나갔다.

황후는 창가에 서서 다이몬이 탄 마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녀는 다이몬이 자신의 말을 믿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필시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의심하고 파헤치려고 할 테니, 이쪽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해 두어야 했다.

그리고 다이몬이 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아델에게 집착하는지도 알아봐야지.

아델이 황제의 눈을 가리고 무엇을 하려는지도 알아보고.

황후는 다이몬이 탄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시녀에게 말했다.

“당장 아버지에게 입궁하라고 전해라.”

* * *

수도에 다녀온 페르데스는 그의 몸이 멀쩡한 걸 과시하려는 듯 바로 아침 훈련에 참여했다.

그뿐인가. 그동안 몸이 굳은 걸 풀어야 한다며 오후 훈련도 자진해서 참가했다.

주치의와 나는 물론 알도르 경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하여간 이상한 곳에서 똥고집을 부린다니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지금쯤 열심히 페르데스가 아침 훈련을 받고 있을 기사단 훈련장 쪽을 쳐다봤다.

“한 번 가 볼까?”

검술에 끔찍하게도 재능이 없는 페르데스가 얼마나 성장했을지 궁금했다.

마침 기사단 쪽에 볼일이 있었던 터라 나는 서류를 들고 기사단 훈련장 쪽으로 걸어갔다.

“하압!”

훈련장이 가까워지자 우렁찬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무더운 땡볕 아래, 웃통을 벗고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다들 열심히 하네.

그런데 페르데스는 어디 있지.

훈련장을 쭉 훑어보던 나는 훈련장 구석에서 알도르 경의 지도를 받고 있는 페르데스를 발견했다.

“손을 좀 더 위로 들어 올리셔야 합니다.”

휘익-

“이번엔 허리가 비틀어졌습니다.”

자세는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열심히 하고 있긴 하네.

원하는 걸 봤으니, 괜히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가씨?”

“아가씨께서 오셨다!”

쓸데없이 눈이 좋은 기사들이 날 발견하고 반갑게 불렀다.

그 바람에 내가 온 걸 눈치챈 페르데스와 알도르 경이 내 쪽을 쳐다봤다.

이런. 조용히 구경하고 가려고 했는데.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갈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다가가 인사했다.

“열심히 하고 있네요?”

“……응.”

페르데스가 짤막하게 대답하며 수건으로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죠?”

“없다니까.”

“정말요? 조금이라도 아프면 말해요. 전처럼 갑자기 픽 쓰러지지 말고요.”

내 말에 페르데스가 곁눈질로 쓱, 날 보더니 알도르 경에게 말했다.

“알도르 경. 나랑 검술 대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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